〈15〉
“저, 영애, 방금 뭐라고…….”
내 곁의 영애들이 놀라 목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그들 중 방금까지 신나게 이야기를 하던 로웬은 역시나 바쁘게 제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깊은 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아,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이해하세요. 영애의 무례한 언행을 막아 주려는 일종의 배려였으니까요.”
“하, 찔리는 거라도 있는 건 아니고요?”
전처럼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으려 마음이라도 먹었는지 눈동자에 힘이 들어간 게 아주 선명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그녀는 이제 내겐 더 넘어설 것도 없었다.
“영애, 제가 전에 다 말하지 않았나요. 이제 영애께 더는 어린아이라는 패는 없다고.”
테이블에 우리 두 사람의 눈빛만이 굴러다녔다.
“제 무슨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몰라도 저는 그다지-”
“아, 설마.”
그리고 로웬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 뚝 그녀의 말길을 끊어 버리고서 나는 가볍게 조소를 올렸다.
“백작 부인의 핏줄을 함부로 논하신 일이 별일이 아닌 일이었나요?”
조금은 비뚤어진 말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가세가 기울었대도 백작가는 백작가, 귀족이었다. 귀족들의 모든 행동은 엄격한 계급제에 따라 법에 의해 보호받고 법에 의해 처벌받았다.
많은 이들의 앞에서, 그것도 대놓고 하는 험담이라니.
내가 차마 가문의 치부를 내 입으로 꺼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건가?
그런 거라면 생각보다 큰 오산일 텐데.
예상치 못한 곳에 내가 있어 많이 흥분하기는 했나 보다.
싱긋 미소 짓는 내 모습에 로웬은 잠시 당황한 듯 미간을 좁혔다.
“그건, 그건 전에 있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던 로웬은 제 곁을 흘끔거리며 도움을 구했다. 몇몇은 도와주려고도 했으나 차마 답이 나오지 않던 찰나, 한 후작 영애가 대신 답을 내 주었다.
“실수였나 보죠.”
도우려는 건지 아닌지도 헷갈리는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로웬은 잽싸게 그 답을 잡으려 했다.
“그래요, 저는-”
“정말 실수였나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내 목소리가 그것을 가볍게 잘라 냈다.
“귀족 간의 대화에서는 그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조심해야 하는걸요. 이 정도는 어릴 적부터 받는 아주 기본적인 교육일 텐데. 그런 것을 혹시 단순한 ‘실수’라고 넘어가실 생각이라면…….”
“아, 그게 아니라.”
제 명예를 가장 중요시하는 그녀가 이런 말을 듣고도 넘어갈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역시나 이번엔 당황한 그녀가 먼저 내 말을 끊었다.
“역시 그렇지요?”
난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그녀를 향해 아주 밝게 입꼬리를 올려 주었다.
“그럼 영애께서 저희 어머니, 그러니까 백작 부인의 핏줄에 대해 운운하신 것은 실수가 아닌 거지요.”
“!”
로웬의 표정이 순간 아차, 하며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이미 실수가 아니었다고 말해 버린 이상 이 말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설마 그 사고 한 번을 근거랍시고 그런 무례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건 엄연한 귀족 모욕죄니까요, 그렇죠?”
“저는……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제 어머니의 핏줄을 좋지 않게 표현하신 것을 이 자리에 모두가 들었는걸요. 그렇죠, 영애들?”
갑작스레 질문의 방향이 틀어진 탓에 제삼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다툼을 구경하던 영애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편을 들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저들과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로웬의 편에 설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양 주장이 서로 타당한 질문을 했다면 그들은 내 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랐다.
사교계를 넘어서, 살면서 익혀야 하는 기본적인 예법을 어긴 로웬.
무엇이 정답인지 뻔히 나온 질문을 지적해 물은 이상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었다.
하나, 로웬을 도우며 제 명예를 깎아 먹거나.
둘, 로웬을 버리며 제 명예의 흠집을 내지 않는 것.
반대로 모두가 내 말을 무시해 버린다면 선택지를 무시한 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저는, 포르티안 영애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거기까지 생각할 정도로 그 자리의 모두가 멘탈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 되레 자신이 선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민감해지는 어린 귀족들이 섞여 있었으니까.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마찬가지예요…….”
상석에서부터 먼 자리에 위치한 이들이 다급하게 대답을 이뤄 냈다. 그 위까지 가지는 않아도 상관없었다.
“지금 무슨…….”
이미 로웬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서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영애?”
무거운 공기와 긴장감이 이 자리를 누르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것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였다.
로웬의 두 눈동자가 가여울 정도로 떨려 왔다.
그리고 그때.
“그만하시지요.”
내 오른쪽에서 어느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석 근처에 앉은, 포르티안 가문이 매번 뒤따르던 후작 가문의 영애이자 조금 전 로웬을 도우려 하던 영애였다.
“포르티안 영애가 잘못을 한 건 맞지만 지금 영애의 행동 역시 올바른 것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남의 티 파티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요.”
로웬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주위를 돌리겠다는 건가?
“포르티안 영애께서 저를 대하는 모습은 퍽 고와 보였나 보네요.”
툭 뱉은 말에 아주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피부에 꽂혔다.
당연히 내 쪽도 더 할 말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내가 이들을 이겨 먹으러 온 것도 아니니 더 문제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뭐, 이번 일은 기억해 둘게요, 포르티안 영애.”
싱긋 웃어 보인 내가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자 그제야 로웬의 상태도 괜찮아졌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는 눈치들이 전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계속 받고 있기에는 내가 그리 참을성이 있지 못했기에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라엘에게 다가갔다.
“베리-”
“포르한 영애.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데, 저는 먼저 돌아가도 될까요?”
현재 그녀가 나와 친분이 있는 걸 밝혀 좋을 것도 없었다.
예의를 지켜 물은 말에 심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곧 나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