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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나는 당신이 싫어 (11)화 (11/61)

〈11〉

“꽤나 오래 기다렸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은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다가오는 후작의 입에 발린 말들에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예의상 ‘아닙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이제 굳이 착하게 말해야 할 이유도 없지.’

나는 후작이 그런 것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기별도 없이 찾아오신 후작님 덕분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예의도 없이 말도 안 하고 찾아오니?’

공손하기만 한 목소리로 뱉은 말이었지만 속에 담긴 뜻은 그리 어여쁘지 않았다.

후작은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설마 그 멍청하던 이가 일부러 돌려 말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표정 관리를 했다.

“큼, 괜찮으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네, 조금 더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쉬고 싶으니까 빨리 나가.’

내 언행은 점차 대담해졌고 결국 후작도 내가 그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제가 영애께 조금 무례했나 보네요.”

물론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멈출 마음은 없었다.

“어머, 처음으로 이렇게 알아주시니 무척 감사할 따름입니다.”

‘넌 항상 무례했어. 그걸 이제야 알겠니?’

그 말을 마친 나는 생긋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헛기침과 함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미소를 되찾았다.

나에게 더 뜯어 갈 것이 있는 이상 그는 내게 진짜 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생각인 거다.

‘더 상대하고 싶지 않은데.’

안 그래도 조금 전까지 헤일론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 인내심이며 기력이며 전부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영애를 보는 건 성인식 이후 처음이지요? 또 한번 찾아오려 했는…….”

“후작님.”

나는 그의 말들이 전부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쓸데없이 서론이 기시네요.”

“예?”

“어차피 오늘도 제게 사기나 치러 온 것이 아닌가요. 평소에는 돈이나 내놓으란 식으로 용건만 말하셨으면서 오늘은 왜 이리 혀가 기신지.”

대담한 언행에 방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사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영애!”

역시 직접적인 질문은 파급력이 꽤 센가 보다.

후작은 어느 정도 당황했는지 꽤나 큰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후작님?”

네가 내게서 가져간 것들. 그건 전부 돌려받아야지 않겠어?

“메이샤.”

내 목소리에 문밖에서 기다리던 메이샤는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탁자에 나열하기 시작했다.

내가 후작을 만나러 들어오기 전에 그녀에게 준비해 달라 부탁한 것이었다.

“이게 무슨…….”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네가 내게 사기로 팔아넘긴 물건들이잖아.

방긋 웃어 보인 나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가리키기 시작했다.

“구슬, 보석, 목걸이는 전부 신성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없던 물건들이고. 반지와 통신구에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하셨는데 역시 이것들도 사기.”

이걸로 내가 얼마를 빼앗겼더라. 지목하다 보니 이렇게까지 사기를 많이 당했었나, 머쓱해졌지만 애써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제 인정해 주시나요?”

인정하면, 큰 문제로는 만들지 않을게.

하고 생각하며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책상에 놓인 물건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어떤 대답도 꺼내지 않았다.

“인정 못 하시겠다면, 그 상자라도 보여 주시겠어요?”

나는 후작이 들고 온 붉은 상자를 가리켰다.

“그 가짜 치유석이 들어 있는 상자 말이에요.”

그 말을 마치자마자 후작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

그럼 넌 이제 뭐라고 반론할까?

“……증거 있습니까?”

“뭐라고요?”

후작은 붉은 상자를 열어 보였다.

역시나 안에 들어 있는 보석은 에메랄드빛 치유석이었다.

“이게 가짜라는 증거가 있냐는 말입니다. 다른 물건들 역시 말이죠. 엄한 곳에서 말을 듣고 제게 이리 대하시니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만.”

‘가문에 돈이 없으니 성력이나 마력 검사는 못 할 거라 생각한 건가.’

이미 내가 답을 알고 있는 것을.

“이리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거 엄연한 귀족 모욕죄인 건 아시지요?”

포커페이스까지 유지하며 열심히 반박하는 그의 모습은 애잔하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증거는 물론 없었다. 그 치유석이 가짜라는 것도 내 이전 기억에 의존한 것이니까.

고로 후작은 지금 나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치유력도 신력의 하나.

검증이 필요하다면 신전까지 가야 할 텐데, 만약 일이 커진다면 신전에 가기 전 신력을 불어넣든가 할 생각인 것이다.

‘머리 좀 쓰네?’

나는 그 보석을 집어 들어 그것을 빛에 비춰 보았다. 녹색과 붉은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을 빛에 비춰 보니 후작은 작게 숨을 내뱉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보십시오, 치유석이 아니라면 어떻게 두 가지 색으로 빛나겠습니까?”

잠시 움츠렸던 어깨를 다시 편 그는 이건 예상 못 했겠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정말 두 가지 빛이네요.”

이 정도는 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확실하게 속일 생각이었나 보다.

일반 보석에 두 가지 색을 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 과정보다 치유석이 거래되는 돈이 더 컸기에 그도 실행에 옮긴 것이겠지만.

그래도 돈을 좀 들였구나.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보석을 든 손에 힘을 풀어 그것을 바닥에 툭 던졌다.

“영애?”

그러고는 그것 위에 살포시 구두 굽을 올리고서-

“흠.”

가볍게 발에 힘을 주며 그것을 세게 짓눌렀다.

“여, 영애!”

“치유석은 웬만한 다이아몬드보다도 단단하다 들었습니다. 제 발길 몇 번에 설마 부서지기라도 하겠어요?”

파삭—

내 말이 끝을 맺자마자 보석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곧 그것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보석 조각들을 보며 난 ‘풉’ 하고 짧게 조소를 날려 주었다.

마법으로 색을 심은 보석은 속이 텅 빈 것들보다도 약하다는 게 상식이지.

“이제, 증명이 좀 되었나요?”

툭, 내 발끝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보석 조각을 그에게로 차 버리자, 후작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 이게…… 네가, 감히…….”

“감히?”

또 가문의 이름 뒤에 숨을 작정인가.

이전 생의 내가 그에게 휘둘린 것도 다 저 잘난 지위 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이걸로 사기죄는 입증되었네요.”

“뭐?”

어색하게 쓰고 있던 가면조차 벗어 버린 후작은 짧은 말들로 내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

“귀족을 대상으로 한 사기라…… 벌금이 적어도 10만 골드는 넘는다고 알고 있는데. 뭐, 리노테인 후작가에서 그깟 돈이 문제겠어요?”

당연히 아니겠지.

리노테인 후작가는 상당한 재력이 있으니까.

하나 그에게는 또 다른, 어찌 보면 돈보다도 큰 약점이 있었다.

“그 고귀하신 명성에 흠이 가는 거면 몰라도.”

후작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되려나?’

귀족 간에 사기죄를 인정한다면 당연하게도 수많은 소문이 따라붙는다.

리노테인 후작가 같은 고위 귀족은 더더욱 시선이 모이겠지.

게다가 그의 사업은 귀족들과의 거래가 주이니만큼 그 타격이 상당할 터다.

그렇다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두 가문이 재판까지 갈 터인데, 그것만큼 가문에 흠집이 생기는 일도 없었다.

‘믿는 구석이라고는 가문의 이름밖에 없는 네가 가문에 흠이 가는 짓을 하려고?’

내가 승리를 확신함과 함께 후작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 원하는 게 뭐야. 돈? 얼마든지 주겠다.”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면서도 내 심기를 맞추는 후작의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네 가문의 돈은 됐고, 내가…….”

내가 네게 뺏긴 돈만 달라고 하려던 찰나,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 때문에 얼마나 끔찍한 경험을 했는데. 이 정도로 끝내기엔 너무 쉬운 처사가 아닌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돈이나 빼앗아 자본을 채워 볼까 생각했지만 접점이 없던 가문 사이에 큰 돈거래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많이 받게 되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럼 어쩐다.

그렇게 고뇌하던 내 머릿속에 순간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받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자본을 채울 수 있는 것. 그 순간 무언가 머리에 번뜩 떠올랐다.

“내가 당신한테 사기당해서 준 돈과, 레이즌을 받아 가고 싶네요.”

“뭐……?”

“후작가에서 관리하는 클럽 말이에요, 이번에 새로 관리 중인 레이즌. 아시잖아요?”

레이즌.

리노테인 후작가가 관리하는 사교 클럽이자 사실상, 하위 귀족들의 도박판이었다.

그만큼 적은 돈이 오가고 클럽의 수입도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딱 이맘때쯤인가? 제국에 들어온 외국 무역상들이 고위 귀족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임 장소인 레이즌에 고위 귀족들을 끌어들였고, 그 귀족들의 눈에 들기 위해 또 다른 하위 귀족들이 들어섰다.

이후로도 귀족들의 끊이지 않는 발길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해 리노테인 후작가에 더 드높은 명성과 힘이 되어 준 클럽이 바로 레이즌, 그곳이었다.

그걸 받아 간다면 가장 골칫거리였던 가문의 자본 문제도 해결이었다.

“클럽 레이즌의 고유 권한을 모두 저희 가문으로 넘겨주세요.”

“그건……!”

후작은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그 눈빛을 싸늘하게 받아쳤다.

“설마 후작가의 명성이 그깟 클럽보다 못하겠나요.”

“……그, 영애. 그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을-”

“뭐, 무너진 명성으로 손가락질받으면서까지 운영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요.”

서로를 향하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레이즌에 꽤 공을 들였는지 후작도 쉽게 발을 빼지는 못했다.

하나 나는 그 순간 주저 없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메이샤, 후작님이 돌아가신단다. 밖으로 모시렴.”

그 외침은 어찌 보면 모험이었다.

아직 레이즌에 고위 귀족은 몇 명 보이지 않았지만, 후작가에서 그 클럽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커질 것을 예상한다면 명성이 조금 무너지더라도 클럽을 잡고 있을 수도 있었다.

혹여 그가 이대로 나가 버린다면 아예 후작가와 척을 지게 될 것이니 내 쪽에서도 좋은 결과는 아닐 것이기에 조금은 긴장하긴 했지만.

“자, 잠깐!”

역시나 후작은 그리 간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넘기겠다.”

내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오른 것을 나조차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럼, 일주일 안에 관련 서류 넘겨주세요. 서류에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마시고.”

몇 가지 경고를 보낸 나는 밖을 나서며 고개를 푹 숙인 채 굳어 있는 후작에게 작게 읊조렸다.

“오늘 일은 똑똑히 기억해 둬, 후작.”

나를 흘겨본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를 남겨 두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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