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 나는 당신이 싫어 (7)화 (7/61)

〈7〉

두 곡째의 음악이 끝이 나자 다른 귀족들 또한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연인과 함께 참석한 이들은 무대 중앙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고, 다른 귀족들과 어린 영애들은 헤일론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의 주변에 몰려 있었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무대와는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돌아가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것이 뻔해 시간이나 때우려는 이유에서였다.

조금 전까지 마시던 와인을 다시 입에 가져다 댔다.

음?

아까는 분명 달콤한 음료였는데 이제 보니 왠지 조금 써진 것도 같았다.

‘취한 건가?’

아니, 보통은 그 반대로 느껴야 하지 않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오랜만에 돌아올 사교계에서 실수를 해서는 안 되기에 천천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달칵.

“음료가 별로신가 보네요.”

‘?’

잔을 내려놓자마자 들려온 목소리는 왠지 기분 나쁠 정도로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였다.

“누구신지?”

소리가 닿은 곳에는 밝은 연갈색의 머리칼을 한껏 넘긴 남성이 저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아, 제 소개를 못 했네요. 영애에게 너무 시선이 가서 그만.”

능글스러운 웃음부터 말투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누구냐고.’

차마 그 한마디를 뱉지 못한 것이 아쉬워졌다.

“네, 그러시군요.”

“영애는 클로디가의 영애 맞으시죠?”

“네, 맞아요.”

“이번에 오랜만의 복귀시라던데. 왜 이런 곳에 혼자 계시는지.”

“말마따나 오랜만의 복귀라서요.”

아아, 짧게 탄성을 뱉은 그가 훅 제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럼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덜컹, 갑작스레 다가온 걸음에 반사적으로 내 몸은 뒷걸음질을 쳤다.

“아뇨, 저는 괜찮아요.”

하나 그럼에도 그는 제 발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이, 이렇게 아름답게 등장하신 걸 보면 완전히 복귀하실 생각이신 것 같은데, 함께 계실 사람도 없으시면 이런 조력자 한 명쯤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끊기고 점점 내 등이 벽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즈음 다가오던 발걸음이 멈추자 곧 그 남성의 손길은 내 머리칼 끝을 가볍게 쥐고서 쓸어내렸다.

윽, 표정 관리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찰나에 인상이 써졌다.

“손 떼세요.”

“저 역시 큰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뭐, 서로 좋을 일 하자는 거죠. 솔직히 지금 클로디 가문에서 뭐 얻을 것이 있다고요.”

“손, 떼라고 했어요.”

내 목소리가 같은 말을 계속하자,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내 손목을 붙들어 끌고는 귓가에 제 입을 가까이했다.

“왜 이래? 가문 좀 살려 보겠다고 나온 거 아니었나?”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완 달리 힘이 들어간 손아귀가 손목에 통증을 실었다.

“그렇게 나왔으면 주제 파악을 해야지. 나 정도 되는 이가 도와주겠다는데, 솔직히 클로디 가에서는 두 손 들고 반겨야 할 일 아닌가?”

“놔.”

“사교계에 여자 혼자 나와서 뭘 할 수 있을 거 같아? 곱게 생겨서 이 정도 대접이라도 받는-악!”

그리고 바로 그 찰나에, 그는 고성을 지르며 내 손목을 놓았다.

“놓으라 했지.”

내 구두 굽이 그의 발을 콱, 내려찍었기 때문에.

“이런, 미친-”

“왜? 내가 너 같은 거랑 붙어먹으려고 여기 나온 줄 알아?”

저딴 제안도 제가 잘날 때나 하는 법이지, 무슨.

그가 제 발을 살피고 다시 일어난 순간, 큼큼, 나는 연회장 끝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자작가의 둘째라는 사람이 참 가볍기가 그지없네요, 피젠트 영식?”

“이름은 어떻게-”

내가 정식 행사 때 본 귀족이 얼만데 이걸 모르겠니.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저기, 피젠트 자작님이 오시는걸.”

지금 내 말을 듣고 다가오는, 네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네 아버지 말이야.

그가 획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해 갔다.

혹시나 다시 나를 쫓아오는 불상사만큼은 바라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발길에 속도를 더했다.

하지만 그때.

“영애!”

낯선 이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곳은…….”

내가 돌아본 곳에는 조금 전 피젠트 영식과 꽤 닮은, 그치만 조금은 더 순하게 생긴 이가 서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 탓인지, 그 얼굴을 제대로 떠올리기도 전에 그이가 누군지 눈치챌 수 있었다.

“피젠트 자작 영식 맞으시죠? 아까 그…….”

아까 그 남자의 형인가.

“아, 죄송합니다. 피젠트 자작가의 비안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 일은 제 불찰입니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그만…….”

본인 잘못도 아닌 일에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제 형제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피젠트 자작가라.

그리 잘나가는 가문은 아니었지만 황실에서는 꽤 자주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자작이 워낙 엄한 분위기를 띠던 이라 기억에 남은 것인데, 어째 그의 가족 중 비안만이 선한 인상인 듯 보였다.

“전 베리안 클로디예요. 사실 별로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다치지도 않았고.”

사실상 먼저 친 건 나라서.

머쓱하게 웃음을 보이고 있자 그 역시도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럼 영애, 돌아가는 길이라도 배웅해도 될까요?”

다가오는 모습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도록 선해서, 그 모습에 나는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사람은 또 처음이네.

따스한 비안의 분위기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편하던 마음이 훅 가라앉은 듯했다. 좋아진 기분에 굳이 그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가 내민 손을 잡으려 손을 움직이던 순간.

“영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본 나는 비안을 마주했을 때보다 조금, 아니 사실은 훨씬 더 놀란 눈을 깜박였다.

가벼운 은발에 자주색 눈동자. 그것들을 가진 성인 남성은 제국의 내가 아는 한 단 한 사람뿐이었다.

‘테하스 공작.’

공작 부부에게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어린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았음에도 그는 무엇 하나 빼어나지 않은 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타고난 검술과 영특한 두뇌, 그것들을 실행시키는 행동력과 자신감. 그런 그를 뒷받침해 주는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가까지.

그렇기에 웬만한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할 정도의 사람이었는데.

“카를 테하스입니다.”

그런 사람이 왜 여기?

“공작님을 뵙습니다. 베리안 클로디라고 합니다.”

조금의 불안한 마음과 호기심이 섞인 인사말과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역시 이유를 모르는 상황에 대한 불안함이 더 강했기에 나는 조금 긴장을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옅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쓸데없이 아름다웠다. 그의 뒤를 비추는 조명에 밝은 은발이 반짝였고, 그 덕에 영애들의 시선이 쏠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놀랄 만한 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한마디에 내 뒤통수에 여러 시선이 우수수 쏟아졌다. 조금 전 헤일론과 마주했을 때와 맞먹는 시선들에 피부가 따가웠다.

“아뇨, 저는 지금 나가 보려고 해서요.”

시선이 너무 몰렸기도 하고.

“그럼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네?”

왜요? 너무도 물어보고 싶은 그 한마디를 잠시 접어 두고서 머리를 굴린 나는 살며시 비안을 바라보았다.

먼저 내게 에스코트를 제안한 사람은 비안이었고 그렇기에 그 답을 받아야 하는 쪽도 물론 비안이었지만, 그렇다고 공작의 청을 받자마자 비안과 함께 나가는 것은 그다지 좋은 그림은 아닐 듯싶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비안을 바라보자 그는 입 모양으로 괜찮다고 말해 주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괜찮지가 않았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허나 결국 답은 하나였다. 나는 깊게 숨을 내뱉고는 공작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제가 불편해서요. 피젠트 영식도,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정말로.”

둘 모두에게 거절하기.

짧은 시간, 내가 알아낸 최선의 해답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나는, 재빠르게 그곳을 피해 빠져나갔다.

쿵, 마차의 문을 닫자마자 훅 몸에 힘이 빠졌다.

예상은 했지만 조금씩 과거와 틀어져 가는 일들에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

‘이제 이런 일들이 예삿일이 될 텐데 벌써 이 모양이니.’

마차에 몸을 기댄 나는 긴장감과 불안함에 잘게 떨려 오는 팔을 꽉 쥐고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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