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전하, 어서!”
급하게 들려온 황태자, 헤일론의 방문 소식에 태자비의 처소는 시종들의 준비 소리로 꽤나 시끄러웠다.
철컥—
회의 당시 입었을 검붉은 제복을 미처 갈아입지도 못한 채 들어온 헤일론.
그리고 그 앞에 선 태자비, 베리안 클로디는 어김없이 반듯한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전하, 기별도 없이 무슨 일이신지요.”
또다시 작은 기대감이 가슴을 채웠다.
“헬렌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아.’
하나, 곧바로 들려온 그의 날 선 목소리에 한순간 뭉그러진 기대는, 조금 전 일어났던 일을 순식간에 내 머릿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저 작은 충고를 했을 뿐입니다.”
“고작 충고 한마디에 그녀가 그리 울고 있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불신이 가득한 눈빛과 기가 찬 헛웃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가 믿지 않을지라도 내가 전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헬렌이란 여자는 황실의 법도를 어겼고 자신은 그것을 조금, 아주 조금 지적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데 자신의 앞에선 눈을 치켜뜨고 짜증을 내던 그녀가, 그의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니.
‘독한 계집. 내게 자신의 두 얼굴을 숨길 마음 따윈 없다 이건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은 헬렌은, 사실 그저 역사 속 수많은 후궁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태자비인 나와 후궁인 헬렌.
누가 더 높은 자리에서 높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는 일개 하인들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태자비에게 인상을 쓰며 화를 내는 후궁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해서도 안 되었다.
그것이 황실의 예의였고 법도였으니까.
하지만 헬렌, 그 여자가 궁에 들어오고 나자 이 모든 것들은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태자비인 자신에게 굽히지 않았으며 오히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화를 내는 모습은 이미 뻔뻔함의 기준을 넘어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경고도 없었다.
헤일론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기에.
헬렌의 그런 모습을 참고 견뎌 온 세월만 해도 벌써 3년이었다.
그래도 처음 약 1년간, 그녀가 나에게 큰 압박을 가한 적은 없었다.
당시의 헬렌은 항상 헤일론의 곁만을 맴돌 뿐, 그 주변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까.
그 모습을 보고 실은 조금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남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궁에서 큰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지금처럼 조용히, 서로의 일을 하며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근 2년, 헬렌은 점차 달라졌다.
그녀는 황실의 물건들을 하나둘 깨부수는 것으로 시작해, 마음에 들지 않는 시종들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헬렌의 명령은 곧 헤일론의 명령이었으니까.
날이 갈수록 그녀의 발걸음은 더욱 거세졌고, 어느새 그 그림자는 내게까지 드리워졌다.
그럼에도 나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헬렌은 그저 평민 출신 후궁, 궁의 질서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조금만 더 지나면, 차차 그녀도 궁의 질서를 배울 것이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그간의 모욕들 또한 참을 수 있었다.
그래, 오늘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