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2017.10.15.
매끄러운 실크 타이를 만지작거리는 재미에 빠져 있던 해빛이 갸웃했다.
“왜 삼촌한테서 무탈이네 집 냄새가 나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견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해빛이가 견에게 더 바짝 매달려 킁킁거렸다.
“진짜다! 무탈이 냄새 맞아!”
“해빛아, 뭐 하는 거야?”
얼른 일어난 새윤이 견의 무릎에서 해빛을 내렸다.
또 무탈이 타령이라며 섭섭해하던 은규가 팔짱을 끼다 말고 멈칫했다.
“설마…….”
모단도 아니고 은규가 뭘 알 리가 없는데, 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은규의 한쪽 눈썹이 실룩했다.
“부자 냄새?”
“어휴, 창피하게 왜 이래!”
근본 없는 드립에 새윤이 고함을 쳤다.
모단은 어영부영 사과하는 은규를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무탈이를 안을 때 비슷한 향이 스쳤었나, 떠올려 보려던 건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견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해빛이 저 녀석, 전에 백화점에서도 단번에 섭호를 알아봤었지. 커서 뭐가 돼도 될 아이라니까.’
얼마간 소소한 대화를 더 나눈 후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차는 어디에 뒀어요?”
“모단 씨 집 근처에요. 데려다주고 가면 돼요.”
커피숍 문을 잠그고 돌아선 새윤은 잠자코 견을 훑어보았다.
부자 냄새 나는 미끈한 차림으로 참외가 든 노란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게 어울릴 리가 없는데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제 머릿속에 있던 백견의 이미지와 오늘 직접 만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잘생긴 삼촌이 이모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눈이 이렇게 하트가 돼, 하던 해빛의 말을 떠올린 새윤이 픽 웃었다.
“백견 씨.”
“네?”
“모단이 잘 부탁드려요.”
새윤의 말을 들은 견의 눈동자가 더 새까맣게 보일 만큼 커졌다가 담뿍 휘어졌다.
“고맙습니다.”
유부녀도 조금 설레게 만들 만큼 근사한 웃음이었다.
“저 모단 씨에 비하면 되게 많이 부족한데…… 부탁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다음 날 퇴근길, 통화 내내 견의 목소리는 시무룩했다.
[미안해요. 할아버지가 소식 듣고 걱정이 많으셔서 오늘은 본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미안은요. 잘할 거니까 걱정 마시라고 말씀 잘 드리고 와요.”
[출근하면 엄청 바빠질 것 같아서 그전에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는데.]
“주말에 오래 보면 되죠.”
[얼마나 오래?]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또 불이 붙었다.
[오션뷰하고 시티뷰. 뭐가 좋아요?]
“갑자기 뭔 뷰요?”
[스위트룸 잡는다, 진짜.]
“잠은 집에서. 내 방 천장뷰로 할게요. 외박하면 엄마가 머리 밀어버린댔어요.”
[어떻게 숏컷 정도로 합의해 봐요. 나는 삭발도 예쁘게 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너무 겁내지 말고.]
“자기 머리 아니라고 막 던지는 거 봐. 시끄러워요.”
[그럼 해 뜨기 전에 만나서 자정 넘어 집에 가요. 그 정도는 돼야 오래 보는 거지.]
“그동안 뭐 할 건데요?”
[다 큰 남자친구랑 만나서 할 거 없을까 봐 걱정해요, 지금?]
“말을 말아야지.”
통화를 마치고, 모단은 버스정류장이 아닌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오늘은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혼자 볼일을 보려고 했다.
새 출발이라기보다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첫 출근이니까 작은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한때 사장이었던 회장 손주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면 얼마나 말이 많을 건가. 월요일에 회사가 발칵 뒤집힐 거라는 건 안 봐도 빤했다.
‘그쯤은 다 짐작하고 벌인 일이겠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힘내라고 말이라도 해줘야지.’
은규와 함께 새윤의 선물을 샀던 백화점에 도착한 모단은, 일전의 가방 매장이 있던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성복 매장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넥타이 좀 보려고 하는데요. 선물하려고요.”
“받으시는 분 나이대가 어떻게 되세요?”
“이십대 후반이요.”
“아. 남자친구 선물이신가 봐요?”
직원이 상냥한 웃음으로 물었다. 모단은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친구라니, 왠지 아직도 쑥스럽다.
“평소에 어떤 스타일 즐겨 입으세요?”
“슈트도 많이 입고 셔츠도 잘 어울리고요.”
가게 입구의 마네킹 정도는 손쉽게 쭈구리로 만들고도 남을 훤칠한 몸매가 그려졌다.
맨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이래저래 더듬어본바, 저처럼 옷 속에 여기저기 숨겨놓은 군살 따위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평소에 슈트를 자주 입으시면 기본은 어느 정도 갖고 계실 테니까 독특한 디자인도 좋을 것 같은데, 이런 건 어떠세요?”
직원이 아무나 하진 못할 것 같은 화려한 타이를 가리켰다.
이런 걸 어떻게 하지 싶은데 견의 얼굴 아래 매치해 보니 묘하게 또 어울린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했던가.
“아무래도 색이 좀 튀긴 하죠?”
“얼굴이 워낙 하얘서 아무거나 잘 받긴 하는데…… 신입사원이라 너무 요란한 건 안 될 것 같아요. 조금 더 무난한 쪽으로 볼게요.”
고민 끝에 잔잔한 무늬가 있는 타이를 골라 예쁘게 포장해서 들고 나왔다.
그의 드레스룸에 더 좋은 타이가 몇십 개는 있을 것 같아 자꾸 소심해지려는 것을 애써 털어냈다.
‘괜찮아. 아무리 비싼 꽃보다 아이들이 접어준 색종이 꽃이나 버스에서 불쑥 건네준 분홍 카네이션이 더 예쁘고 소중한 법이니까.’
카드사에서 월급 다 퍼가기 전에 뭐라도 하나 질러볼까 하고 화장품 매장이 있는 곳을 둘러보는데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어어, 했던 모단은 얼른 뒤따라가 그를 불렀다.
“백지협 이사님.”
돌아본 그가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정모단 씨.”
“안녕하세요. 쇼핑하러 오셨어요?”
“누구 선물 살 게 있어서요.”
“엇, 저도요.”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되었다.
“견이하고 정식으로 만나기 시작했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아, 네.”
그래서 제 점수는요,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할 뻔했다.
“이사님하고 백견 씨, 참 보기 좋은 것 같아요. 친형제도 아니고 사촌인데 서로 대화도 자주 하시는 것 같고 잘 챙기시는 것 같고.”
“글쎄요. 그걸 대화라고 해야 할지……. 얼마 전에 전화해서는 형은 여자친구 없지? 그럼 내가 먼저 가정을 꾸릴게, 하고 끊어버리더군요.”
민망해서 딴소리를 한 건데 더 부끄러운 말만 돌아왔다. 모단은 웃는 둥 마는 둥 한숨을 내쉬었다.
“견이 좋아하십니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어머니 면담 타임인가 보다. 모단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기회가 된 김에 확실히 말씀드리자면 돈 많아서 좋은 건 아니에요.”
“그랬으면 처음부터 마음을 활짝 여셨겠죠. 어쩌면 그러지 않은 게 더 고도의 유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잠시나마 다소곳했던 모단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이왕 그렇게까지 갈고닦아 덤빌 거면 이사님께 덤볐을 것 같은데요.”
지협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렇잖아요. 가진 돈이야 어차피 거기서 거기일 거고, 인물도 둘 다 쓸 만한데 굳이 사회적 지위가 더 낮은 쪽에 고도의 유혹을 들이댈 필요가 뭐 있겠냐고요.”
진짜 덤비고도 남을 듯한 눈빛에서 오히려 진심이 보였다. 지협은 낮게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말이 지나쳤습니다. 좀처럼 곁을 안 내주실 것처럼 보였기에 사실 좀 놀랐습니다.”
“저도 제가 그럴 줄 알았어요.”
모단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진심이 아닌데 진심이라 믿은 거다, 그럼 나중에 눈물 나겠죠. 진심이 아니라고 믿고 피했다, 근데 알고 보니 진심이었다고 하면 피눈물 나겠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좀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괜찮은 알고리즘이네요.”
지협은 선선히 수긍했다.
“차라리 돈 많아서 만난다고 하셨으면 제 마음이 더 놓였을 것 같은데. 견이가 가진 돈이 어디 가지 않는 이상 옆에 있어줄 거 아닙니까.”
견의 솔직함이 천진난만한 쪽이라면, 지협의 솔직함은 상대의 당황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쪽이었다.
“농담이면 살벌하고 진담이면 서글픈데요.”
아예 모르는 사람이 이런 말들을 했다면 어디서 꽃뱀 취급이냐고 명치를 후려쳤겠지만, 모단은 그 말속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런 확신이라도 얻고 싶으신 것 같은데 못 드려서 죄송하네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건 마음이나 돈이나 똑같아서요. 있을 땐 세상 다 가진 것 같다가 없으면 세상 구질구질해지는 것도 똑같고. 무조건 믿어도 되는 건 없다는 뜻…….”
지협이 모단의 팔을 잡아 가볍게 당겼다. 쇼핑백을 잔뜩 들고 전화통화를 하던 남자가 모단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아, 고맙습니다.”
바로 손을 놓으려던 지협이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멈칫했다.
익숙한 남녀의 옆모습이다.
수려한 눈썹이 슬쩍 이지러졌다 돌아왔다.
‘……만에 하나 보게 된다면,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그가 팔을 잡은 채로 입을 뗐다.
“죄송하지만,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견이 선물 좀 같이 봐주시겠습니까?”
“네? 뭐, 그래요.”
지협이 먼저 몸을 틀었다. 모단도 돌아섰다.
“선물 사신다는 게 백견 씨 거였어요? 그런 전화를 받고 선물까지 사주고 싶으세요?”
“그러게 말입니다. 안 챙기고 싶은데 자꾸 챙기게 되네요.”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모단은 혼자 쑥스러워 냉큼 정색했다.
어쩌면 이것도 그 남자의 능력인 것 같다. 섭호도 그렇고 하물며 금지까지도, 다들 챙겨주고 싶게 만드는 게.
“견이가 결혼 운운하는 게 부담스럽진 않으십니까? 처음부터 결혼이 전제로 깔리면 거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마 대부분이 그렇겠죠. 저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고요. 그런데 백견 씨의 경우는 오히려 일종의 확신을 준 것 같기도 해요.”
“확신이라면, 어떤?”
“재벌가라면 연애는 몰라도 결혼은 맞는 집안끼리 하잖아요. 근데 처음부터 너무 확고하게 결혼 타령을 하니까, 최소한 혼전에 원 없이 놀려고 만나는 건 아니구나 싶었어요. 어쩌면 그게 더 고도의 유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지협은 흐리게 웃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속 한 조각이 튀어 올랐다.
“처음부터 결혼이 전제로 깔린 만남이라니, 난 숨이 막혀요. 집안끼리 의논하고 계약서에 도장 찍듯이 이루어진 만남에서 뭘 기대하는 거예요? 난 싫은 사람하고 평생 같이 살 자신 없어요. 책임감 때문에 억지로 버티지 말아요.”
모단이 살짝 우울해지려던 목소리를 밝게 올렸다.
“이사님 만난 김에 여쭤봐야겠다.”
“뭘 말입니까?”
“백견 씨랑 결혼할 사람 있으면 지금 귀띔해 주세요. 똑같은 일을 두 번 당하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질 것 같거든요.”
황당한 표정을 한 지협이 허, 하고 웃었다.
“결혼할 사람, 견이 열두 살 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네?”
“느닷없이 나타나서 인생 저당잡고 홀연히 떠난 여자.”
지협이 턱짓을 했다.
“정모단 씨요.”
모단의 심장이 쿵쾅 내려앉았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 나뿐이라는 말.
견에게서 숨 쉬듯 들은 말인데, 제3자에게서 들으니 기분이 또 달랐다.
멍하니 서 있던 모단은 향수 매장으로 들어서는 지협의 뒤를 얼른 쫓았다.
“잠깐만요. 이러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데요?”
“이번엔 또 뭡니까?”
“남녀 관계는 식장 들어가기 전까진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죠. 약혼했다가도 파혼을 하고 결혼했다가도 이혼을 하니까.”
찔끔한 모단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의 파혼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리면 안 되니, 지나치게 당황해서도 안 된다.
“거기까지 가려던 건 아니고요. 어쨌든 제가 결혼까진 아닌 것 같다고 하면 백견 씨를 두 번 죽이는 꼴이 되잖아요.”
“두 번 죽지 않는 게 견이의 할 일이겠죠.”
향수 하나를 집어 든 지협이 지나가듯 흘렸다.
“싫은 사람하고 어떻게 평생을 같이 삽니까. 책임감 때문에 억지로 버티는 게 서로에게 더 못 할 짓입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정모단 씨 마음대로 하세요. 견이랑 헤어진다고 희명그룹 차원에서 보복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왜 있을 것 같지…….”
같은 시각, 민철과 여은도 백화점에 있었다.
“이걸로 할까?”
“네 마음대로 해.”
피곤함과 지루함을 감추지도 않는 대꾸가 여은의 신경을 긁었다.
“이젠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것조차 귀찮은가 보네.”
“너희 집에서 언제 내가 고른 거 마음에 들어 하신 적 있어? 내 안목은 그렇게 고상하지 못하니까 알아서 고르라고.”
뭔가 더 말하려던 여은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몇 걸음 떨어져 있는 다른 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어떤 게 더 나은 것 같아?”
“둘 다 너무 잘 어울려서 고민되는데.”
“자기가 좋은 쪽으로 할래. 어차피 자기가 제일 많이 볼 거잖아.”
사늘한 눈길로 그들을 지켜보던 여은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액세서리 매장을 빠져나왔다.
언젠가부터 가슴 안에 쌓이기 시작한 짜증과 원망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어쩔 때는 민철의 얼굴만 봐도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민철이 따라오는지 마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고 거칠게 내딛던 여은의 걸음이 향수 매장 앞에서 우뚝 멈췄다.
익숙한 남녀의 옆모습이다.
“어떤 게 더 나은 것 같습니까?”
지협이 내미는 시향지 두 개를 받아 든 모단이 신중하게 하나씩 맡아보았다.
“둘 다 어울릴 것 같은데. 고민되네요.”
“정모단 씨가 좋은 쪽으로 하죠. 어차피 정모단 씨가 가장 많이 맡게 될 것 같으니.”
쑥스러운 듯 뺨을 붉히고 웃는 여자.
더 부드럽게, 더 다정하게 왜곡된 지협의 표정과 말투.
그 모든 게 여은을 미친 듯 할퀴었다.
왜, 도대체 왜 그땐 몰랐던 걸까.
백지협이라는 남자는 첫인상부터 오만해 보였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한 표정, 시종일관 차분한 말투가 결혼 따위 뭐 대수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화학회사가 필요하면 화학회사 딸과, 자동차공장이 필요하면 자동차공장 딸과 결혼할 인간이겠거니 싶었다.
마지못해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건 싫어서 항상 작업이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자 아틀리에로 찾아왔다. 어떤 날은 차를, 어떤 날은 간식을, 어떤 날은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화집을 들고서.
말 한마디 걸지 않는데도 조용히 머물다 가곤 했다. 그림 보는 것도, 물감 냄새도 좋아한다는 말만 남기고.
그 모든 게 짜증스러워서 결국 쏘아붙이고 말았다.
“어차피 다 정해진 건데 뭐 하러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요?”
그는 딱 한 마디만 했다.
“그러게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할까요.”
그때 그 눈빛에 담긴 말을 알아들었어야 했다.
정략이라는 말과 낭만이란 말은 절대 공존할 수 없다고 믿지 말았어야 했다.
하필 그때 맞닥뜨린, 스무 살 언저리에 어설프게 연이 닿았던 남자를 운명적인 탈출구로 착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죽 우리 집을 무시했으면 약혼조차 쉬쉬할까, 그렇다면 결혼한 후에도 눈치 보고 숨죽여 살아야 할 게 뻔한데, 그럴 거라면 나보다 못한 남자가 낫겠다는 멍청한 영악함 따위 부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전 이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들어요.”
“그럼 이걸로 주십시오.”
모단의 말 한마디에 바로 결정을 내린 지협이 직원과 계산대로 향했다.
그제야 향수병 아래에 적힌 가격을 본 모단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0이 몇 개인지 세어보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랬다면, 저런 여자한테 저 자리를 내주진 않았을 텐데.’
“다 됐습니다. 가죠, 정모단 씨.”
“네, 이사님.”
쇼핑백을 들고 돌아선 순간, 지협과 모단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입구에 서 있던 여은과 몇 걸음 뒤에 있는 민철을 발견한 거였다.
지협은 모단의 옆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진심이 아니라고 믿고 피했는데 알고 보니 진심이었다고 하면…….’
다시 여은을 돌아본 그의 입가가 옅게 뒤틀렸다.
‘피눈물이 나겠죠, 라고 했던가.’
여은의 눈꼬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저 마주 보고만 서 있는 그들을 향해 의아한 시선이 몰렸다. 민철이 먼저 침묵을 깼다.
“또 뵙네요, 백지협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모단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인사할 사이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거니와, 괜한 오해와 분란을 일으키기도 싫었다.
그런데 여은이 모단을 똑바로 바라보며 뜻밖의 말을 던졌다.
“그때 금지랑 같이 백화점에서 뵀던 분 맞죠? 정모단 씨라고 했나.”
얼굴쯤은 기억할 수 있다고 쳐도 이름까지 아는 건 싸했다. 금지는 줄곧 언니라고만 불렀으니까.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기억이 나더라고요. 확인해 보니까 맞고.”
“뭐가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여은이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남편이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분, 맞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