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맞잖아. 응?
2017.09.27.
“밀어내는 게 아니라…… 더 세게 밀려오라고 하는 것 같아.”
현기증이 일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어지러웠다.
어딘가 멀리 와 있는, 꿈속인 것만 같은, 시계가 고장 난 게 아니라 정말로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아득함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휩쓸었다.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 거고.”
진심이야.
“정모단 씨 아니면 안 돼요, 나는.”
이 눈빛이 어떻게 진심이 아닐 수가 있어.
뺨이 뜨거운 것인지, 뺨을 감싼 손이 뜨거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게 너무 벅차다는 생각뿐이었다.
열기에 잠식당한 공기 사이로 가느다란 바람이 섞여들었다.
“……5분만요.”
제발 조금만 천천히,
밀려오지 말고 천천히 왔으면.
도망친답시고 넘어질 것 같으니까. 그러다 보기 좋게 폭삭 잠겨 버릴 것 같으니까.
“5분만 혼자 있을게요.”
모단의 말끝이 잘게 떨렸다. 견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요?”
모단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내리깔았던 견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말없이 걸음을 뗀 그는 전구를 모두 켜서 옥상을 환히 밝혀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후유…….”
한숨을 내쉰 모단은 무릎을 덮었던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눈꺼풀까지 굳게 닫고 혼자만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었다.
‘야경 같은 거 보지 마. 무엇보다도 그 남자 눈은 절대로 보면 안 돼.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냉정해야 해.’
나는 뭐가 두려운 걸까.
‘결국 또 같은 이유로 헤어질까 봐.’
사귀기도 전에 결혼의 걸림돌을 따지다니, 한참 앞섰다는 건 안다.
하지만 예전에도 설마가 현실이 되었다. 똑같은 실수를 두 번 하는 건 바보 아닌가.
둘이서 싸우거나 맞출 수 있는 일이라면 괜찮다. 저 혼자 상처받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집안 문제로 커져 혜숙까지도 다치는 일이 생기는 건 죽어도 싫었다.
‘그래서 어쩌고 싶은 건데. 사귀지 않으니까 헤어질 일도 없는 게 정말 내가 원하는 거야?’
이게 갑질이 아니면 뭔가 싶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뭔가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베풀어주는 건 다 받아가면서 끝까지 한 발 빼고 있는 게.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야.’
점점 더 가라앉는 어둠 속, 오래전 민철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니까 결국엔 너 마음고생 하기 싫어서 나 정도는 쉽게 포기가 된다 그거잖아.”
“넌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그럼 사람을 이렇게까지 매달리게 만들지를 말았어야지.”
이 남자에게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라톤도 아니고 무조건 끝까지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럴 땐 한 걸음이라도 덜 가고 빨리 포기하는 게 맞아.’
모단이 치열한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견이 돌아왔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를 본 견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바로 앞까지 다가가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주서서 그녀를,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를 꼭꼭 숨겨주고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던 견이 다리를 접고 앉았다. 그 기척에 모단이 꿈틀했다.
“안 답답해요?”
놀랄세라 조심스레 물은 견이 담요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옛 아녀자들 쓰개치마 쓰듯 여미고 있던 담요가 어깨까지 미끄러졌다.
마지못해 눈을 뜬 모단은, 쭈그리고 앉아 저를 올려다보는 견을 보고 숨을 삼켰다.
늘 올려다보거나 비슷한 높이에서 마주 보던 얼굴을 이렇게 보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정모단 씨.”
달램과 애원, 바람과 확신이 뒤엉킨 눈동자.
완연한 남자와 필사적인 소년을 한데 품고 있는 그 눈.
“한마디만 해봐요.”
말할 수 있어.
“한마디도 어려우면 딱 한 글자만 해도 돼요. ‘응’ 하고.”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좋은 사람이라서 마음이 가려고 했는데 역시 부담스럽다고.
앞으로는 애매하게 굴지 않겠다고…….
“나 좋아하는 거 맞죠?”
곧 소리가 되려던 생각들이 단숨에 바스라졌다.
그의 속삭임 한 번에 먼지처럼 가벼이 흩어졌다.
“맞잖아. 응?”
견의 손이 웅크린 모단의 무릎께를 톡톡 두드렸다.
그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분홍빛 파문이 출렁 번졌다. 머리로, 심장으로, 팔로, 다리로, 길게 뻗어 나가 전부를 흠뻑 적셨다.
내 눈빛으로 눈을 가리고, 내 목소리로 귀를 덮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이 달콤한 말들을 삼켜보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모단은 홀린 듯 견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조심스레 미끄러뜨리자, 걸릴 것 하나 없이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솔직하지 못했을 뿐, 처음부터 애매했던 적 없는 마음이라는 걸.
“……응.”
고작 한 글자.
이 한 글자가 바꾸어놓을 수많은 것들.
시선이 마주치고, 그림처럼 멈췄다.
늘 그랬듯, 그는 감정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반짝이는 기쁨이 팡 터져 흩어지고, 또 피어나고, 더 환해지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꽃놀이 아래 서 있는 것처럼 황홀해졌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 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모단의 넋을 덥석 잡아들였다.
“잠깐만요. 나 방금 또 분위기에 휩쓸린 것 같아요!”
모단이 벌떡 일어섰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담요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다시 말할게요.”
덩달아 일어선 견의 눈동자에 불안이 스쳤다. 그냥 입을 막아버릴까 하는 기색도.
“그동안 미안했어요. 입장 바꿔서 누가 나한테 이렇게 애매하게 굴었으면 엄청 짜증 났을 텐데. 진작 정 떨어졌을 텐데.”
혹시라도 원치 않는 말이 나올까 봐 입막음을 실천에 옮기려던 견이 멈칫했다.
“내가 백견 씨 책임질 자신까진 없는데, 내 마음 정도는 책임져 볼게요.”
그때와 다를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같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어쩌면 정말로 두 번 다신 눈 밑에 점 있는 사람은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날이 오더라도, 한 번만 더……
“오늘부터 해요.”
믿고 싶어.
“언제 사귀어줄 거냐면서요. 사귀자고요.”
박력 넘치는 고백을 받은 견이 지그시 모단을 바라보았다.
눈으로만 웃는가 싶더니, 이내 입꼬리도 휘어졌다.
이번에는 견의 손이 모단의 머리를 쓸었다. 담요가 떨어질 때부터 부스스 일어나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눌러주었다.
기뻐 날뛰고 싶은 걸 그렇게라도 가라앉히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단은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지, 칭찬하듯 마냥 쓰다듬고만 있으니.
견의 손끝이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다 닿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 눈을 피했다.
갈 곳을 잃은 모단의 동공 끝에 테이블 아래 놓아둔 봉투가 띄었다. 견이 사온 것들이 들어 있는 봉투가.
“저기, 라면이나 먹을까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아무 말이다 싶은 순간, 머리에 얹혀 있던 손이 툭 떨어졌다.
“……선생님.”
갑자기 바뀐 호칭에 본능적으로 돌아보았다. 심상찮은 눈빛과 맞닥뜨렸다.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은데요.”
“뭐요?”
견이 두 손으로 제 뺨을 감쌌다. 뭔 생각을 했는지 귀까지 발갛다.
“나야 좋지만.”
그제야 제가 낮저밤저를 잘못 건드렸음을 깨달은 모단이 뒷걸음질 쳤다. 의자가 발에 걸리자 툭 차서 자빠뜨려 버리고 마저 도망쳤다.
“그 라면 아니고 아까 컵라면 있댔잖아요! 그것까지만 먹고 얼른 집에 가게요!”
뺨을 받치고 있던 손을 확 내린 견이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진짜 라면 먹자는 거였어요? 순수하게?”
“그럼요!”
솔직히 더 집어넣으면 위장이 욕을 할 것 같았지만, 이 조마조마한 공기를 부수기 위해서라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순수하다면서 도망은 왜 가는데요? 그것도 텐트 쪽으로.”
“백견 씨 눈빛이 안 순수해 보여서요!”
“순수는 어린이집 가서 찾아요. 다 큰 남자친구한테 찾을 일이야?”
견이 긴 다리로 단숨에 거리를 좁혀왔다.
“나는 정말 배고파서 한 말이라고요!”
“아까 먹은 고기는?”
“피와 살이 됐겠죠.”
“지금껏 만난 남자들이 모단 씨 식비 대다가 파산했다거나 한 일은 없죠?”
“내 식비는 내가 벌어 먹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만 다가오고 물이나 끓여요!”
“진짜 먹게요?”
견이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삐딱하게 섰다.
“이제껏 먹은 거 소화시키려면 밤새 운동을 해도 모자랄 텐데.”
“운, 운동이요?”
‘호텔에서 밤새 할 만한 운동이라면…… 옘병, 음란마귀야! 물러가라, 좀!’
모단이 속으로 온갖 동요 메들리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견은 물을 끓이거나 라면을 뜯는 대신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아직 시간이 이렇게밖에 안 됐네.”
몇 걸음 만에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견이 모단의 허리에 길게 팔을 두르고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딱 30분만 뽀뽀할게요.”
그 시계로 30분이면 30분이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에서 촉 소리가 났다.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몇 번쯤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진득하게 맞물렸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시작부터 잡아먹을 듯 밀려들었던 처음과는 달리 다정하고 나긋한 입맞춤이었다.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보고 음의 여운을 느끼듯, 견의 혀끝이 느리고 섬세하게 모단의 입안을 탐닉했다.
“아, 흣…….”
타인의 살이 은밀한 곳을 건드리고 헤집고 부비다 뒤엉키는 감각에 손끝 발끝이 찌릿거렸다.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고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체온보다 조금 더 뜨거운 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풀어지고 녹아내렸다. 뱃속이 뻐근하니 부풀어 터질 것 같으면서도, 꼭 그만큼의 갈증과 허기에 몸이 달았다.
깊이, 조금 더 깊이, 언제까지고 파고들 것 같던 혀끝이 아쉬운 듯 빠져나갔다.
모단의 아랫입술을 길게 핥고, 살짝 물었다 놓은 견이 그 위에 제 입술을 겹친 채로 웅얼거렸다.
“꿈꾸는 것 같다고 하면…… 또 때릴 거예요?”
“……안 때려요.”
묻고 답하는 입술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젖은 피부가 맞닿아 전율하며 신음 같은 웃음이 새었다.
“어쩌지. 자꾸 웃음도 나고 키스도 해야겠고 목소리도 듣고 싶고.”
“하나만 해…… 읏!”
‘요’ 자를 입술째 삼켜 버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반말이 되어버렸다. 아무려면 어떠냐는 듯, 견은 더 아찔하게 파고들었다.
모단은 부들거리는 무릎에 간신히 힘을 주고, 발돋움을 해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렇게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풀썩 주저앉을 것 같았다.
상체가 더 밀착한 순간, 견의 입술 사이에서 꾹 억눌렀던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하아…….”
견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지며 입술이 더 세게 포개졌다. 등을 받치고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누구 것인지 모를 탄성과 흐트러진 숨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열이 올라 눈가가 뜨끔거렸다. 어쩐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그를 받아들이기도 벅찬 와중, 띄엄띄엄 생각의 파편이 스쳤다.
고민하다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마음이 홀가분해진다면 좋은 선택을 한 거라고 그랬다.
‘그러니까 난…… 잘한 거야.’
잠시 숨통이 트였다.
혼잣말 같은 부름이 새어 나왔다.
“모단…… 정모단.”
낮게 잠겨 갈라지는 목소리가, 내리깐 눈매에 드리운 짙은 음영이 오싹할 만큼 야했다.
“그냥. 이름도 예뻐서.”
툭 뱉어놓고 입술 끄트머리를 지그시 깨물며 웃는다.
모단은 천천히 손을 올려 견의 뺨을 감쌌다.
그 미소를, 제가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동자를 전부 다 손안에 잡아두기라도 할 것처럼.
‘이것 봐. 이런데 어떻게 내가…….’
다신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일도, 받을 일도 없을 줄 알았다.
어떤 바람에 잠시 설렌다 해도 지금보다 어렸던 때만큼 뜨거워지지는 못할 거라 믿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수만 가지 감정 중 사랑 하나쯤 빼먹고 살면 뭐 어떠냐고, 가장 치열한 감정 몇 개만 포기하면 가장 무거운 감정들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속 편한 생각마저 했더랬다.
그가 이토록 깊이 박히기 전까지는.
지금보다 어렸던 때는 물론, 살아온 어느 순간에도 없었던 열기 속으로 빠뜨려 버리기 전까지는.
“백견 씨.”
견이 뺨을 감싼 손 위로 제 손을 겹친 순간,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말을 해야 한다고.
“좋아해요.”
달떠 흐려진 눈에 힘을 주려 애쓰며 그려내는 속삭임이 견의 심장을 터질 듯 움켜쥐었다.
“좋아한다고요.”
너무 작게 말해서 못 들은 걸까, 한 번 더 말해놓고 민망해진 모단이 손을 내렸다.
견의 손도 떨어지나 싶더니 곧장 모단의 어깨를 쥐었다.
“……!”
목덜미로 미끄러진 손이 뒷머리를 강하게 감쌌다. 그러고는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짓쳐들어왔다.
자극이 지나쳐 질식할 것 같았다. 감당하기 벅찰 만큼 거셌다.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모단은 손에 닿는 것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려 했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못한 손이 얇은 천 위를 헛짚고 긁어댈 때마다 등과 어깨의 근육들이 움찔거렸다.
“흐읍…… 아!”
몸을 조금 낮춘 견이 모단의 허리를 잡아 안아 올렸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새어 나온 짧은 비명마저도 견의 입안으로 남김없이 삼켜졌다.
그대로 몇 걸음 옮긴 그가 모단을 테이블 위에 앉혔다. 단단히 짚은 팔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마음껏 머금었다. 입술 밖까지 번지는 흔적이 아찔하다 못해 위태로웠다.
그래도 밖인데.
간신히 이성의 끝자락을 잡은 모단은 견의 어깨를 두드리고 밀어냈다. 그래 봤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누가 보면…….”
“카드키 없으면 못 올라와요. 주변에 여기보다 높은 건물은 없고.”
목덜미를 잘근대는 감각 위로 처음 듣는 탁성이 포개졌다.
물러나기는커녕 다리 사이로 더 바짝 다가드는 몸에서 열기가 전해졌다. 모단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래도, 누가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웃음기조차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그래야 적당히 할 것 같아서.”
고장 나 멈춰 버린 시간 속, 둘은 몽롱한 환희 속에 몸을 맡겼다.
오랫동안 서로를 끌어당겨 온 보이지 않는 힘을 어렴풋 느끼며 서로를 누렸다.
달은 차게 기울고, 마음은 뜨겁게 차오르는 밤이었다.
***
언젠가 목소리 대신 글자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시각.
둘은 모단의 집 앞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지금 다시 택시 잡기 힘들 텐데. 따라 내리지 말고 바로 가지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면 나만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것 같잖아요.”
“누가 보면 지금 보고 오래 못 보는 줄 알겠네.”
“오래 못 보는 거 맞잖아요! 모단 씨 퇴근할 때까지 언제 기다려. 대체 몇 시간이냐고!”
“회사 뽑아버릴 기세네.”
“그건 안 되죠. 거기 들어가 있는 내 지분이 얼만데.”
잠은 집에 가서 자겠다던 견의 말대로, 텐트 안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고 호텔을 나섰다.
말하지 않아도 둘 다 직감한 거였다. 들어가는 순간 지금까지 한 건 애들 장난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고도 남을 불장난이 벌어졌을 거라는 걸.
“얼른 들어가요, 모단 씨. 푹 자고 출근해야죠. 다른 일도 아니고 애들 보는 일인데 졸면 안 되지.”
말은 그렇게 하는데 표정은 영 아니었다. 축 처진 눈꼬리를 보고 있자니 어디서 낑낑 앓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말에 예약할 걸…….”
“주말이고 뭐고 잠은 집에서 잤을 거거든요? 자기만 완두콩 공주인 줄 아나.”
눈으로만 웃은 견이 모단의 손을 잡았다.
“그냥 해본 말이고, 집에 어머님도 계신데 늦게 보내서 미안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괜찮아요. 술 마시면 이보다 더 늦게 들어갈 때도 많아서 별로 신경 안 쓰세요.”
“깜박 속아서 잘했다고 할 뻔했네.”
견의 잔소리가 터지려는 찰나, 모단이 잡고 있던 손을 악수하듯 위아래로 흔들고는 놓았다.
“조심해서 가요.”
비죽한 견이 몸을 굽혀 모단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응. 아침에 연락할게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이마로 손을 올렸던 모단은 어영부영 머리를 매만지고는 얼른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고작 몇 걸음밖에 되지 않는 현관까지 느리게 걸었다. 아직도 발걸음이 둥실거렸다.
사랑에 무게가 없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지.
그토록 듬뿍 받고도 이토록 가벼울 수 있으니.
최대한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늦게 들어온다고 등짝 맞을 나이는 지났다 한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니까.
막 방문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갑자기 거실 불이 켜졌다.
“아오, 깜짝이야!”
놀라 주저앉을 뻔한 모단이 소리를 질렀다.
잠옷 차림의 혜숙이 한 손에 컵을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엄마! 안 잤어?”
“드라마 정주행하느라고.”
“아아, 그, 그 드라마? 윤담 나오는 거? 나도 그거 하도 재밌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12화까지 다 봤는데. 하하하.”
얼렁뚱땅 대꾸하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혜숙이 뒤에서 가방을 덥석 붙들었다.
뒤이어 오싹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누구야, 그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