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42화 (42/86)

#42. 더 세게 밀려오라고

2017.09.24.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무슨 생각이요?”

“사모님 소리 들어보고 싶은 생각.”

모단의 입꼬리가 삐뚜름해졌다. 잘나고 비싼 얼굴을 받치고 있는 팔을 툭 쳐버리고 싶은 심보가 치밀었다.

견은 맞기 전에 알아서 자세를 다소곳이 고쳤다.

“근데 집사랑 셰프랑 메이드가 다 한 사람이에요. 위섭호라고.”

방심했던 모단이 빵 터졌다. 주위에 그득하던 불량기가 단숨에 날아갔다.

“위 비서님이랑 둘이 사세요?”

“네. 전에는 혼자 살았고 위 비서님이 가끔 봐주셨어요. 아, 섭호 말고 섭호 아버님이요. 우리 아버지 비서로 오래 계시던 분이라,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도 저를 돌봐주셨거든요.”

“그러셨구나.”

“섭호가 대학 졸업할 때쯤에 비서님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시골로 내려가시고 섭호가 제 비서가 됐죠. 그때 아예 집으로 들어온 거구요. 원래 그전에도 방학이니 휴가니 할 때마다 붙어 있긴 했지만.”

그래서 피 안 섞인 가족이라 했구나 싶다.

강렬하던 첫 만남 그날, 누구보다 놀란 얼굴로 뛰어나와 길에 쓰러진 그를 업고 뛰던 건 역시 상사와 부하 이상의 정이 있어서 그런 거였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데도 늘 깍듯한 거 보면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섭호가 일부러 더 그래요. 비서하고 말 놓고 장난치는 걸 보면 사람들이 저를 우습게 본다고. 그래도 둘이 있을 때나 집에서는 좀 바뀌죠.”

충남스타일로.

속으로만 덧붙인 견이 뭔가를 더 챙겨 왔다.

“밥도 있으니까 같이 먹어요. 후식으로 면 당기면 컵라면도 있고. 술은 내일 출근하니까 와인 한 병만 샀는데 괜찮죠?”

어느새 다른 손에 가위를 들고 고기를 썰고 있던 모단이 견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눈에서 ‘백견 씨 최소 배운 사람, 완전 좋은 사람’ 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식성이 비슷하면 더 호감이 간다는 말은 역시 진리인가 보다. 견은 흐뭇한 속내를 감추고 와인잔을 든 채 손가락질을 했다.

“정신 차려요. 누가 꽃등심 사준다고 하면 유괴도 당하겠어요.”

“다 됐다. 먹어요, 이제.”

“아니라고도 안 하네.”

잔 두 개에 와인을 따른 견이 주섬주섬 채소를 겹치고는 맛있게 잘 익은 고기를 올렸다.

“아.”

제 입 앞에 바짝 다가든 쌈을 본 모단은 홀린 듯 입을 벌렸다.

원래 이런 거 넙죽 받아먹는 스타일이 아닌데, ‘됐어요, 내가 먹을게요’ 하는 대답까지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씹고 있다.

공복에 고기 냄새가 가뿐하게 이성을 무너뜨려 버린 탓이다.

“흐아앍…….”

스테이크 먹을 때보다 더 발전한 녹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외계어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소리 안에 내가 구웠지만 기가 막힌다는 말부터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거냐는 말까지 다 들어 있다.

견은 채소의 물기가 남은 손을 가볍게 털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으음…… 아으, 악! 진짜!”

우물거리던 모단이 뒤늦게 뭉개진 고함을 내질렀다. 키들거리는 견을 노려보며 간신히 음식을 씹어 삼킨 모단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야단을 했다.

“벌칙이야, 뭐야! 생마늘을 몇 개를 넣은 건데요!”

“모단 씨 마늘 좋아하잖아요. 너무 많이 넣었나?”

“오늘은 안 먹을 거예요!”

“왜요?”

견의 눈빛이 음흉해졌다.

“난 상관없는데.”

와인 한 모금을 머금었다 삼킨 모단이 눈을 흘겼다.

“원래 구운 것만 먹구요, 그마저도 지난번에 원 없이 퍼먹어서 질렸어요. 됐어요?”

모단이 집게로 집은 고기를 다짜고짜 견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역시나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 입부터 벌리고 받아먹은 견이 소리를 질렀다.

“아, 뜨겁잖아요! 호호 불어서 쌈장 찍어서 줘야지!”

“이런 쌈장, 뭐라는 거야. 아예 소화도 잘되게 씹어서 달라 하시지?”

“버섯도 구워줘요. 꼭꼭 냠냠 꿀꺽 잘할 수 있으니까.”

“하여간 손 더럽게 많이 가요. 어휴.”

한 번씩 난리를 친 후에야 와인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어쨌든 간에 맛은 더할 나위 없다.

“신입사원의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게 회식 때 고기 잘 굽는 거라던데, 맞아요?”

고기 굽는 손놀림을 유심히 지켜보던 견이 물었다.

“필수 덕목까진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센스 있어 보이는 지름길이긴 하죠.”

“흐음.”

“숯불에선 자주 뒤집어줘야 하지만 고깃집에서 굽는 건 달라요. 불판이 충분히 달궈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올리고, 안 눌어붙게 슬슬 문질러만 주다가 옆면까지 노릇노릇하게 익으면 딱 뒤집는 거예요. 그래야 육즙이 덜 빠지거든요.”

견은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할 때 못지않게 먹을 때도 프로페셔널하네요.”

“사람들 먹는 속도를 봐가면서 먹다가 끊기거나 너무 많아서 딱딱해지지 않게 양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해요. 그날 그 테이블에서 집게를 누가 쥐느냐가 회식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봐도 무방하죠.”

“그 정도라고요?”

“그럼요. 그리고 또 중요한 거. 고기가 적당히 들어갔다 싶을 때 딱 테이블을 둘러보면서 이멘트를 꺼내줘야 돼요.”

“무슨 멘트요?”

“냉면 드실 분∼?”

“미치겠다.”

견이 한참을 웃다가 중얼거렸다.

“별게 다 귀엽네.”

모단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고기에서 기름이 떨어지는 바람에 불이 세져서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다.

두 번째로 고기를 올릴 때는 견이 집게를 뺏어 들었다. 어깨로 가붓하게 모단을 밀어내고 그릴 앞에 섰다.

눈썰미 좋은 편이니까 믿고 맡겨보라던 말대로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능숙해 보였다.

“아, 너무 배불러.”

“나도요. 그만 먹어야지 하면서 결국 끝까지 먹었네.”

꽉 찬 배를 두드리며 먹은 흔적을 대강 치운 둘은 자리를 옮겼다.

옥상 너머가 잘 보이는 쪽에 캠핑의자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와인잔을 올려둘 사이드테이블도 가져다 두었다.

어느새 완전한 밤이 되어 있었다. 등 뒤의 텐트에 걸린 전구와 발아래 도시에서부터 점점이 넘쳐 올라오는 빛 덕분에 생각보다 어둡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 너무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내가 고마워요. 나랑 편하게 밥 먹어줘서.”

맘 없는 사람과 밥 먹는 건 불편하다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견은 새삼 설레어 애꿎은 와인잔만 만지작거렸다.

적당히 팽팽하게 등을 받쳐 주는 의자와 적당히 떫은 와인, 적당히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배만 부른 게 아니라 마음까지 불렀다. 졸리지도 않은데 자꾸만 눈이 사르르 감기려고 해서, 모단은 아무 말이나 꺼냈다.

“근데 백견 씨 정도면 삼겹살 말고 스카이라운지 같은 데서 엄청 비싼 스테이크 썰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거기서 먹을 고기 한 접시 값이면 이렇게 배 터지게 서너 끼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살다 살다 재벌 3세 입에서 우리 엄마랑 똑같은 멘트를 듣게 될 줄이야.”

진심으로 충격받은 모단을 돌아본 견이 옅게 웃었다.

“다음엔 그런 데 가서 돈이랑 분위기랑 고기를 같이 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의 말투도 살짝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근데 난 오늘 먹은 고기가 태어나서 먹어본 고기 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나도요.”

들릴 듯 말 듯 떨어진 대답을 들은 견의 입꼬리가 가만히 말려 올라갔다.

옥상 너머의 야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던 모단이 중얼거렸다.

“꼭 서울 아닌 것 같아요. 어디 멀리 와 있는 것 같네요.”

“나는 현실이 아닌 것 같아요. 꿈꾸는 것 같은데 한 대만 때려줘 봐요.”

바로 와인잔을 내려놓은 모단이 엄지와 중지를 야무지게 말고는 홱 돌아앉았다.

이 낭만이라고는 없는 여자야. 툴툴거린 견이 급히 가드를 올렸으나 모단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아아, 잠깐! 거기는 안 돼요!”

딱밤 준비를 갖춘 오른손을 치켜들고 왼손으로 견의 이마를 까려던 모단이 뭔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견이 얼른 머리카락 위를 손으로 덮었다.

“다쳤어요?”

최대한 눈에 안 띄는 연갈색 반창고를 간신히 상처를 덮을 크기로만 붙이고 머리카락으로 잘 가려두었는데 걸리고 말았다.

그녀가 혹시라도 무탈이의 이마에 난 상처를 떠올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모서리에 찍혀서 조금 찢어졌어요. 키가 크면 부딪힐 데도 많거든요. 모단 씨는 모르겠지만.”

“뭐가 어째요?”

사납게 흘겨보는 와중에도 직업병이 돋았는지 상처를 살펴보고 싶어 하는 듯한 기색이다.

견은 불쑥 다가들어 모단의 시야를 저로 덮어버렸다.

“근데 이 상처요…….”

그러고는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하트 모양으로 찍힌 거 있죠. 신기하지 않아요?”

뭐라 받아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부르르 떨려 버렸다. 솜털까지 삐죽 곤두서는 것 같아 모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추워요? 안아줄까요?”

“……방금 열 받아서 안 추워졌어요.”

모단이 이마 대신 어깨를 밀어냈다. 낮게 웃은 견이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요?”

“잠깐만요.”

성큼성큼 걸음을 뗀 견이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럭대다 다시 나오더니, 갑자기 텐트 입구에 있던 스위치를 눌렀다.

텐트와 테이블 주변에 둘러져 있던 전구들이 한꺼번에 꺼지며 옥상이 깜깜해졌다.

“으아악! 뭐 하는 거예요!”

“나 여기 있으니까 지난번처럼 빨리 나한테 와요. 아직 덜 깜깜한가?”

“욕할 거예요, 진짜!”

짓궂은 웃음소리를 흘린 견이 다시 불을 켰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던 모단은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러자 불이 또 꺼졌다.

“와아이씨!”

켰다가, 껐다가, 또 켰다가, 껐다가.

“계속 껐다 켰다 하면 전구 고장 난다 그랬는데 왜 멀쩡하지? 오늘은 정전 안 되나?”

“이런 옘……!”

진짜로 욕이 나오기 직전에 관둔 견이 되돌아왔다. 불은 꺼둔 채였다.

“다시 켜놓고 와요!”

“적당히 어두워야 야경이 더 잘 보이죠. 이 정도도 무서워요?”

견은 텐트 안에서 꺼내온 담요를 펼쳐 모단의 무릎 위에 덮어주고는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모단의 손을 잡았다.

“자, 됐죠? 안 무섭죠?”

“이 정도는 원래 안 무서워요. 그냥 더 밝은 게 좋은 거지. 이게 무서울 것 같으면 밤에 어떻게 놀러 다녀요?”

손을 비틀어 빼려는데 견이 슬그머니 힘을 주었다.

“위험하니까 밤에 놀러 다니지 말랬죠.”

“요샌 바빠서 못 놀았어요. 갑자기 그 얘기가 왜…….”

견이 손을 잡은 채로 들어 올렸다. 모단의 눈앞에 견의 손목시계가 놓였다.

“딱 30분만 잡고 있을게요.”

초침이 없어 언뜻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견이 손을 내리고는 덧붙였다.

“손잡는 것쯤은 1단계잖아요. 아니면 10단계로 훅 넘어갈까요?”

3단계가 그 정도였으면 10단계는…….

머릿속에서 새빨간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단은 얼른 위험한 생각들을 털어냈다.

“대체 그 단계는 누가 정한 거고 기준이 뭔데요?”

“내가요.”

견이 자신만만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1단계는 아무하고나 할 수 있어요. 악수 같은 거요. 2단계는 팔짱이나 어깨동무나 포옹처럼 가까운 사람하고 해요. 3단계는 전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특별한 사람하고만 하는 거고, 4단계부터는 3단계 통과자하고만 할 수 있는 거라 상당히 세세해지는데…….”

“됐어요! 거기까지.”

손을 뺄 의욕조차 잃어버린 모단은 숨듯이 의자에 등을 더 깊이 파묻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고 다짐하니까 온갖 생각이 다 났다. 손에 땀나면 어떡하지, 하는 사춘기스러운 생각까지 치밀었을 때쯤 모단은 아무 말이나 꺼내들었다.

“이름에 한자 뭐 써요?”

“굳을 견(堅)이요.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는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린 조선시대 화가 안견(安堅)의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할아버지께서 동양화를 무척 좋아하셔서.”

개 견이 아닐 거라는 건 당연히 짐작했으나, 그림과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다. 기분이 묘해졌다.

“모단 씨 이름은요?”

“한국화에 쓰는 물감 중에 모단(牡丹)색이라는 게 있어요. 짙은 보라색.”

견의 눈에 순수한 감탄이 떠올랐다.

“잘 어울리네요. 누가 지어주셨어요?”

“부모님께서요.”

“그래요? 모단 씨 부모님도 동양화 쪽에 관심이 많으셨나 봐요?”

“엄마가 화가였어요.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대요.”

기억을 더듬던 견이 아, 했다.

“그때 집 앞에서 뵐 뻔했던 분이 어머니 맞으시죠? 그럼 지금은 그림을…….”

어쩐지 심상치 않은 모단의 분위기를 감지한 견이 말끝을 흐렸다.

“그때 뵌 분이 우리 엄마는 맞는데.”

머뭇거렸던 모단은 감출 일도 아니고 이제껏 딱히 감춘 적도 없음을 떠올리고 말을 이었다.

“화가였던 친엄마는 돌아가셨고, 지금 엄마는 나 열 살 때부터 키워주신 새엄마예요.”

이런 말까지 나올 만큼 누군가와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게 까마득해서, 당황하는 반응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계모라고 하면 다 나쁜 줄 알지만, 우리 엄만 세상에 둘도 없는 보통의 엄마예요. 그래서 내가 말 안 하면 아무도 몰라요. 새엄마인 거.”

“모를 만도 하네요. 그때 보니까 어머님이랑 정말 많이 닮았던데.”

견은 움직이면 빠져나갈 것 같아 이제껏 꼼짝도 않고 잡고 있던 손을 부드럽게 고쳐 쥐었다.

“피가 안 섞였다는 게 어쩔 때는 더 각별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마치, 지금 맞잡고 있는 이 손처럼.

본질적으로는 남이라는 불안이 안개처럼 깔려 있어서, 그걸 덮기 위해서 더 꼭 붙잡게 되는.

“나한테는 위 비서님하고 섭호가 그렇거든요. 뭐랄까, 가족은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건데 그 사람들은 선택이란 걸 해준 거잖아요.”

“맞아요. 엄마가 당신의 인생을 사는 대신 날 선택해 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죠.”

“엄청 효도해야겠네요.”

“백견 씨야말로 위 비서님 떠받들고 사셔야 할 것 같은데요?”

“마음으로는 충분히 잘해주고 있어요. 겉으로도 잘해주면 이상한 소문이 나더라고요. 둘 다 장가는 가야 하니까.”

농담과 진담, 웃음이 뒤섞인 대화를 한참 주고받다가 모단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잠깐, 30분 넘지 않았어요?”

빠지려는 모단의 손을 꾹 움켜쥔 견이 아까처럼 손을 들어 시계를 보여주었다.

“아직 1분도 안 지났는데요?”

설마 한 바퀴 돈 건가 했는데 정말 아까 그 시각 그대로였다. 모단은 혼란에 빠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사실은 일부러 고장 난 거 차고 나왔어요. 수작 부리려고.”

뭐 이런 백견스러운 경우가 다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좋아 죽겠다는 듯 웃고 있는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더 그랬다.

피부는 왜 저렇게 하얀 건지, 웃는 건 왜 저렇게 눈부신 건지, 어두운데도 모든 게 너무 잘 보여서 난감했다.

“개수작인 거 알긴 아니 다행이네요. 하여간 엉뚱한 데 공들이는 건 알아줘야…… 으앗!”

손을 빼려는데 오히려 당겨졌다. 그리 튼튼하지 않은 캠핑의자가 통째로 휘청하며 견 쪽으로 모단의 몸이 쏠렸다.

견의 어깨에 턱을 콕 부딪힌 모단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잡지 않은 손이 언젠가처럼 등을 쓸어안았다.

“전부터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무슨 샴푸를 쓰면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요?”

“……마트에서 원 플러스 원 하는 탈모방지샴푸요.”

“분위기 깨려고 애쓰시네. 부질없이.”

맞닿은 몸이 잘게 떨린다. 웃고 있다.

“아직 사귀지는 않는 사람하고 어디까지 가능해요?”

등 뒤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감았다 풀어내는 감촉이 야릇했다. 바짝 힘이 들어가는 다리와 흐물흐물 풀어지려는 허리 때문에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언제 사귀어줄 거냐고요, 나랑.”

진득한 손길과는 달리 말투에는 투정이 찡찡 묻어났다.

결국 몸에 힘을 뺀 모단이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그 숨이 목덜미를 스친 순간, 견의 미간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백견 씨한테 기회를 주는 거잖아요. 생각보다 빨리 식어버린 마음을 후회하면서 억지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모단이 팔을 올렸다.

“17년을 찾았다면서요, 나를. 그러다 만났는데 안 좋은 게 이상한 거죠.”

작은 손이 넓은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급히 먹으면 체하듯이 너무 빨리 좋아하면 탈이 나요. 그 마음, 정말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인지 꼭꼭 씹어봐요.”

그 손길이 꼭 무탈이를 보듬을 때와 같아서, 견의 기분이 슬슬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라서 좋은 게 아니라 아프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라서 좋은 걸 거예요. 내가 아닌 누구였더라도 잡았을 거고, 고맙다고 했을 거고, 이렇게 잘해줬을 거잖아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언젠가 백견 씨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데도 그저 좋은 그런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럼 그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래도 서른 날 중 하루쯤은 당신과 보낼 수 있는 걸까.

하지 못한 말이 목 뒤로 멍울져 넘어갔다.

먼저 팔을 푼 건 견이었다.

“걱정은 내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몸을 떼고 마주 본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모질지 못한 사람이라서 받아주는 게 아닐까. 내가 아닌 누구였더라도 맘에 걸려서 도와주지 않았을까.”

“그건…….”

“어느 날 모단 씨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고, 그래서 이제 못 만나주겠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달에 하루조차 볼 수 없게 되는 걸까.”

같은 마음.

“생각해 봐요. 누가 더 불안하겠느냐고.”

걱정마저 닮아 있는 마음.

“근데 왜 내 걱정까지 모단 씨가 대신 해줘요?”

슬쩍 내리깐 눈매가 밤보다 더 짙었다.

“그러니까 자꾸 나한테 하는 말들이 다르게 들리잖아요.”

견의 손이 모단의 귓가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밀어내는 게 아니라…….”

저를 가득 담고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며, 견은 바람을 담아 속삭였다.

“더 세게 밀려오라고 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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