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36화 (36/86)

#36. 어른이라고 다 큰 건 아니구나

2017.09.03.

계단 앞에 선 모단은 견에게 온 문자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대신 아직 안 사귀고 있으니까 헤어지지도 않는다는 조건이에요. 나 아니면 아무하고도 사귀지 말고,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도 나하고만 해요. 정모단 씨가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 나일 때까지 기다릴 거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가슴속 어딘가가 지잉 울렸다. 먹먹한 무엇이 둥근 파문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이토록 제 감정에 솔직한 그가 부럽기까지 했다.

나도 당신이 싫지 않아.

이미 당신에게 휩쓸려 버려서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일도 없을 거야.

근데 이 감정의 온도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알아. 어쩌면 내가 막 끓기 시작했을 때 당신은 이미 식고 있을 수도 있어. 그래서 겁이 나.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계단에 발을 내딛는데 문자가 왔다.

―계단에서 휴대폰 보지 마요. 넘어지려고.

모단의 눈이 커졌다. 얼른 고개를 들고 둘러보았으나 견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는 사람인데.

그 대신, 계단 위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

무탈이가 동그란 두 볼 가득 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시금 눈을 크게 뜬 모단은 한 번에 두세 계단씩 얼른 뛰어 올라갔다.

“계단에서 뛰지 마세요, 선생님. 또 넘어져서 다쳐요.”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었다면 ‘또’라는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겠지만, 너무 반가워 그냥 흘려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무탈아! 어린이집 온 거야? 못 올 것 같다더니.”

“그렇게 됐어요. 사람 일이라는 게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더라고요.”

어린애가 세상사 다 초월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 모단은 그저 웃고 말았다.

“잘 왔어. 선생님도 친구들도 무탈이 많이 보고 싶었거든. 무탈이는 선생님 안 보고 싶었어?”

“저도…….”

애써 천진한 웃음을 꾸며낸 견이 모단의 팔에 매달려 얼굴을 감췄다.

이런 모습 말고, 다른 모습으로…….

“보고 싶었어요.”

‘밤새도록.’

마음도 표정도 가다듬은 견이 다시금 순수한 눈으로 모단을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그런데 남자친구 생겼어요?”

“어…… 뭐라고?”

모단의 눈가에 당황스런 기색이 스쳤다.

이 순간 그녀가 저를 떠올려 주었을지, 견은 궁금했다.

조금 어색하게 웃은 모단이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예뻐져서요.”

“뭐?”

“선생님이 더 예뻐진 것 같아서요. 누가 그랬거든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예뻐진다고.”

살짝 입을 벌린 모단의 뺨에 엷은 홍조가 내렸다.

“……그런가.”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은 제가 지금 무탈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을 뻔했다.

***

“와아, 무탈이다!”

“무탈아아아아!”

견이 바다반 교실에 들어선 순간, 아이돌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왜 이제 왔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응, 나도. 예뻐졌구나.”

“무탈아, 뭐 하고 지냈어?”

“애들은 못 하는 거 하면서 잘 지냈어. 앞니 빠졌네. 귀엽다.”

견의 입에서 영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번 달에도 안 올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기에 몹시 착잡한 상태였다.

어쩐지 그새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무탈이에게서 남다른 아우라를 느낀 아이들의 눈빛은 더욱 반짝였다.

동후만 빼고.

“야, 백무탈. 너는 왜 맨날 어린이집 빠지냐?”

“더 빠지고 싶었는데 온 거란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린이집 안 가고 싶다고 하면 엄청 혼내시는데. 너네 엄마는 안 그래?”

“엄마는 아니지만 같이 사는 누군가가 좋아하긴 하더라. 종일 시중들 인간 없으니 살 것 같구먼, 하면서.”

“응?”

“아무것도 아니야.”

모단이 다가왔다. 이제껏 의자 등받이에 한 팔을 걸치고 삐딱하니 앉아 있던 견의 태도가 돌변했다.

“오랜만에 친구들 보니까 좋아요. 혼자 노니까 너무 심심했어요.”

무릎에 가지런히 손을 올린 견이 모성애를 자극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모단의 눈동자 가득 하트가 피어올랐다.

“그랬어? 우리 무탈이 매일매일 오면 좋을 텐데. 그치?”

“그건 아닌…… 네, 뭐.”

간식을 먹고 나서 옥상 놀이터에서의 바깥놀이가 있었다.

견은 슬슬 노는 시늉을 하다가 미끄럼틀 그늘 아래 은근슬쩍 엉덩이를 붙였다.

“야, 너는 왜 안 놀아?”

“노는 거야.”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뭐가 노는 거야?”

“햇볕하고 숨바꼭질하는 중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놀아.”

동후에게 손짓한 견은 땀나지 않게 가만히 앉아 눈으로 모단만 좇았다. 종일 모단 옆에 붙어 다닐 건데 땀 냄새라도 나면 어쩐단 말인가.

“무탈아, 선생님이 그네 태워줄까?”

“아니요. 저는 그냥 여기서 선생님 보는 게 좋아요.”

“으응, 그래.”

모단이 다른 아이들과 노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옥상 문이 열리더니 커피컵을 든 직원들 몇 명이 들어섰다.

그중 한 남자가 모단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모단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견의 눈빛에 빠직 날이 섰다.

‘저 자식, 홍보팀 유영훈이라고 했던가?’

“이번 주말에 동호회 나오시죠? 보육원 가는 거요.”

“네.”

“뭐 타고 가세요?”

“효림 선생님 차요.”

모단은 아이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답했다. 그래도 영훈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마침 토요일에 그 근처에서 볼일이 있는데…….”

“선생니이이이임!”

벌떡 일어선 견이 고함을 질렀다. 모단이 돌아보았다.

“응, 무탈아. 왜?”

“저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네 태워주세요.”

“그래.”

모단이 영훈에게 눈짓을 하고는 견 쪽으로 뛰어왔다.

모단의 손을 꼬옥 잡고 그네로 향하며, 견은 영훈을 대놓고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모단의 뒷모습을 쫓느라 한참 아래 있는 견까지는 보지 못했다.

‘저 자식은 일도 안 하나? 진짜 잘라 버릴까?’

그네를 한바탕 타고 났는데도, 함께 올라왔던 일행이 내려갔는데도 영훈은 가지 않았다. 한 번 더 말을 시켜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견은 절대로 틈을 주지 않았다.

“선생님, 나랑 같이 놀아요.”

“선생님, 해빛이가 선생님 불러요.”

“선생님, 나 여기 부딪혔어요. 호 해주세요.”

그쯤 되자 영훈도 뭔가 싸했는지 견을 힐끔대기 시작했다. 쪼끄만 게 밉상이라고 속으로 욕하는 게 분명했다.

결국 영훈이 옥상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견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선생님,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럼 다른 친구들도 같이 가자. 화장실 가고 싶은 친구들 손!”

몇 명이 손을 들고 놀이터 밖으로 나와 모단을 따랐다.

옥상을 나와 15층 엘리베이터 옆 화장실로 다 같이 들어가는데, 마침 거기 영훈이 있었다.

“……흐음.”

걸음을 재게 놀린 견이 가장 안쪽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영훈의 바로 옆에 섰다.

견을 알아본 그는 떨떠름한 눈으로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천진한 눈동자를 가장한 견이 영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를 가늠하듯 아래쪽을 주시하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어른이라고 다 큰 건 아니구나.”

“뭐, 뭐?”

견은 듣는 척도 안 하고 총총 몸을 돌렸다.

까치발을 하고 야무지게 손을 씻은 후에 나가는 남자애의 뒷모습을 보며 입만 벙긋거리던 영훈이 얼른 따라 나왔다.

“야, 너……!”

나오자마자 아이들을 챙기고 있던 모단과 맞닥뜨린 그가 움찔했다. 안에 아이들만 있는 줄 알았던 모단도 놀라 짧은 비명을 흘렸다.

“모단 씨, 그게…….”

모단의 앞치마 자락을 잡고 매달린 견이 바짝 붙어 속닥거렸다.

“선생님, 저 아저씨 화장실 갔다가 손 안 씻고 나왔어요. 세균 백만 마리 있겠다.”

“아냐! 다, 닦았어!”

영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견은 모단을 더욱더 꼬옥 안으며 겁먹은 눈으로 한술 더 떴다.

“선생님, 저 아저씨 무서워요오…….”

모단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기 시작했다. 영훈이 냉큼 억지웃음을 지었다.

“으허헛. 제가 너무 커서 아이가 무서웠나 봅니다. 아! 물론 키가 말입니다.”

“우리 형은 더 큰데요. 아저씨 우리 형 여기밖에 안 오는데요.”

견이 손날을 세워 턱 아래에 대고 까닥까닥했다. 영훈은 모단만 없었어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감추느라 기를 썼다.

견이 모단을 돌아보며 해맑게 물었다.

“선생님 남자친구는요? 선생님 남자친구도 크지요?”

영훈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모단은 이때다 싶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럼. 선생님보다 이만큼이나 더 커.”

모단은 손을 펴서 제 머리 위 허공에 올렸다. 마주 보고 있을 때 견의 이마가 있던 곳쯤에.

“모단 씨…… 남친 있었습니까?”

“유영훈 씨.”

모단이 눈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근무 중에, 그것도 아이들이 있는 데서 자꾸 사적인 얘길 꺼내시니 제가 좀 곤란하네요.”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볼게요.”

영훈은 더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멈칫거렸다.

모단의 손을 꼭 잡고 가던 견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명백한 썩소를 날렸다.

영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뭐야, 저 애 같지 않은 애는!’

점심을 먹고 난 오후, 무탈이를 지켜보던 모단은 갸웃했다.

늘 초롱초롱하고 빠릿빠릿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 틈틈이 저를 따라다니긴 하는데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한곳만 뚫어져라 보며 앉아 있거나, 뭔가를 하려다 말고 엉뚱한 실수를 하기도 했다.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은 기획안 생각으로 골똘해서 그런 거라는 건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 무탈아?”

정신없이 돌아가던 머릿속에 모단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퍼뜩 눈을 든 견은 책을 든 모단과 친구들이 다 저를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이마를 긁적였다.

“이 책에 나오는 제이크는 딸기가 너무 무서웠대. 무탈이도 혹시 무서워하는 게 있을까?”

“무서워하는 거요?”

정모단 씨 화내는 거 빼고 무서운 게 뭐 있더라.

짧게 고민한 견이 답했다.

“달이요.”

“달? 하늘에 떠 있는 달님?”

“네. 달이 커지면 저를 잡아먹을 것 같아서 무서워요.”

실제로 잡아먹히기도 해요.

견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선생님은 달에게 고마운데.”

“왜요?”

“선생님은 깜깜한 걸 무서워하는데, 달이 커지면 환해지잖아.”

아이들도 재잘재잘 거들었다.

“맞아요! 달님이 있으면 안 깜깜해요!”

“어젯밤에 달이 진짜 이만큼 컸어요. 아빠랑 슈퍼 가다가 봤어요.”

“선생님, 달에 정말로 토끼가 살아요?”

왁자지껄한 소리를 듣고 있던 견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앞으로 달이 괴괴하게 느껴질 때마다 지금 이 소란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아서.

“그럼 어떻게 하면 달이 안 무서워질 수 있을까?”

모단의 물음에 견이 답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손잡고 같이 보면 돼요.”

순간, 모단의 눈앞에 어느 날의 풍경이 그려졌다.

봄밤.

꽃이 핀 나무, 그 위에 달.

모단의 시선이 무탈이의 눈 아래 있는 점에 머물렀다.

그 점이 도도록해지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선생님도 깜깜해서 무서울 때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손잡아 달라고 하세요.”

맑은 아이의 목소리에서 어쩐지 익숙한 말투가 들린 것 같았다.

“언제든지.”

***

그날 저녁, 모단은 백화점에서 새윤 모르게 은규와 접선했다.

곧 결혼기념일이라 선물을 사려는데 도저히 못 고르겠다며 은규가 도움을 요청한 거였다.

“같이 안 왔으면 어쩔 뻔했대. 맨날 우리 새윤이, 우리 새윤이 하면서 윤새윤 취향을 그렇게 모르냐?”

“왜? 아까 그 가방 내 눈엔 괜찮아 보이던데.”

“어머님 선물 고르러 오셨어요? 골라도 제일 노티나는 걸.”

“그런가? 어휴,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여기 가보자. 요새 여기 것도 많이 들더라.”

“먼저 가서 보고 있을래? 온 김에 시계 AS 맡기고 가게.”

“알았어.”

혼자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모단에게 직원이 인사를 했다.

편안한 차림에 화장기도 별로 없고, 몸에 걸친 것 중 눈에 띄게 비싸 보이는 것도 없는 모단을 빠르게 스캔한 직원의 표정에서 정중함이 얼마간 덜어졌다.

모단이 쇼케이스에 놓인 가방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이미 손에는 여기서 파는 것보다 더 비싼 가방이 들려 있고, 의상은 물론이고 화장이며 머리까지 방금 숍에서 나온 것처럼 말쑥하고 우아한 여자다.

아까 모단에게 인사를 했던 직원은 물론, 안쪽에 있던 매니저까지 얼른 뛰어나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여자는 자연스럽게 매장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힐끗 보고 바로 관심을 끈 모단은 직원을 불러 가방 하나를 가리켰다.

“저것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네, 고객님. 잠시만요.”

그때였다. 매니저가 갑자기 끼어들더니 먼저 가방을 꺼냈다. 그러고는 아까 그 여자 손님 앞으로 가져갔다. 그녀 앞에는 이미 다른 가방도 몇 개 놓여 있었다.

“요즘 가장 반응이 좋은 체인 크로스백 미디엄 사이즈입니다. 한 번 보세요.”

모단은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먼저 보여달라고 한 것 같은데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잠시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직원도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여자가 다 훑어보고 손짓을 하고 나서야 그 가방은 모단 앞에 놓였다.

“보세요, 고객님.”

한마디 한 매니저가 직원에게 눈짓을 했다.

“이 모델 소프트카멜하고 로즈레드 컬러도 가져다 보여 드리세요.”

“네.”

직원은 매장 안쪽 창고로 가고, 매니저는 여자 손님에게 가고, 모단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홀로 남았다. 슬슬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같은 층에 있는 시계 매장에 들렀던 은규가 돌아왔다.

“이거 고른 거야? 깔끔하니 괜찮네. 얼마래?”

모단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격 택을 슬쩍 들춰본 은규가 고민했다.

“이걸로 할까?”

“그러든가.”

마침 직원이 새 제품이 든 박스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은규가 손짓했다.

“이거 사려는데요.”

그러자 매니저가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고객님, 그 제품은 재고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재고가 없는 게 아니라 하나 남았는데 뭐가 문제죠?”

앉아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살까 말까 고민 중이라서요.”

지금 되게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같은 말을 품은 모단과 은규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를 한 번 보고, 매니저를 돌아본 모단이 한 손을 허리에 얹었다.

“저분이 사실지 말지 고민 다 끝난 다음에 안 사신다고 해야 저희한테 팔 수 있다?”

매니저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부정은 하지 않았다.

여자는 슬쩍 고개를 기울이더니 한쪽 귀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지루하고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모단은 굳었던 입을 열었다.

“은규야, 이걸로 할래?”

“응. 꼭 이걸로 하고 싶네.”

모단만큼이나 은규의 목소리도 싸늘했다. 평소 웬만해서는 화를 안 내는 은규지만, 한 번 정색하면 끝을 보곤 했다.

“계산해 주세요. 먼저 결정한 건 이쪽이니까.”

“저, 고객님…….”

“카드 여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 아내에게 줄 선물이니까 포장 깔끔하게 해주십시오. 고객 응대에 대해서는 따로 컴플레인을 제기할 예정인데 제품에까지 하자가 있으면 더 불쾌할 것 같으니까 특별히 신경 쓰셔야 할 겁니다.”

매니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니들이 이거 사겠니, 하고 보자마자 무시했던 고객과 시즌마다 와서 신상을 몇 개씩 팔아주는 고객의 비위를 한꺼번에 거스른 셈이니 눈앞이 캄캄할 만도 했다.

“백화점 VIP가 되면 내가 고민 중일 땐 남도 못 사게 할 수 있는 혜택까지 주는 줄 몰랐네요. 고민하는 사이에 남이 먼저 결제하면 끝인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모단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하실 거면 애초에 저 손님만 받고 매장 문을 닫던가 하셨어야죠. 아, 통째로 전세낼 정도의 급은 아직 안 되시나?”

남 일처럼 딴 데만 보고 있던 여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백화점 명품 매장 매니저쯤 되면 얼굴만 봐도 어느 손님 계좌에 돈이 더 많고 어느 손님 카드 한도가 더 높은지 딱 나오나 봐요? 근데 그 판단이 백 프로 맞다고 어떻게 장담하죠?”

“그러게요. 아까부터 봤는데 서비스는커녕 기본도 없는 매장이네.”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금지가 서 있었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금지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모단과 은규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우리 큰오빠가 이 백화점 사장님인데,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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