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타이밍과 스파크
2017.08.30.
“그냥 내가…… 끝까지 못 참아서 그래.”
입술 위로 뜨거운 속삭임이 흐트러졌다.
무슨 뜻인지 물어볼 겨를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입술이 맞닿아 뭉개지는 순간, 뭘 못 참았다는 건지 단숨에 느낄 수 있었다.
극도의 긴장이 혼란으로 돌변해 어쩌지 못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견은 순식간에 그녀를 장악했다.
물고, 빨고, 핥고, 얽히고, 삼키고.
깊게 미끄러져 들어와 헤집는 혀끝은 거침없고 솔직하고 집요했다. 맹렬히 탐하는 동시에 심술궂게 희롱하며 묻고 있었다.
나는 결국 무너졌는데, 당신은 언제까지 버텨볼래요?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어둠을 헤치고 급히 견에게 갈 때만 해도, 심지어 기절초풍해서 매달릴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무섭지는 않았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제가 싫다고 한다면 당장 그만둘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불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매우, 아주…….
“……숨.”
정말 숨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지독히도 야하게 들리는 시옷 발음이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에서 비어져 나왔다. 달싹이는 감촉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모단은 그제야 가쁘게 차오른 숨을 내쉬었다.
엉킨 호흡 끝에 달뜬 소리가 섞여 나왔다. 제 소리에 제가 놀라 내뱉은 아, 소리마저도 야릇하게 울렸다.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견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잠깐의 틈만 주고 다시금 입술이 포개져 왔다. 이번엔 더 거칠었다. ‘본능적’이라는 단어를 키스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왜 매번 이런 식일까.’
맥없이 늘어뜨려져 있던 모단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해놓고 결국엔 휘말려 있어.’
그 손에 딱딱한 어깨가 잡히고, 널찍한 등이 닿았다.
아랫입술을 물고 빨아들이던 견의 입술이 탁 풀어지며 낮은 신음이 흘렀다. 언젠가 그가 입에 넣어주었던 팝콘보다 몇 배는 더 달고 끈적한 것이 입안 가득 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제 탓이라고 못 박았지만, 아니었다.
‘얘만 미친 게 아니라 나도…….’
가늘고 가늘게 늘어지던 이성이 끝내 톡, 끊어졌다.
‘같이 미친 거지.’
타이밍과 스파크.
그 두 가지가 부싯돌처럼 맞부딪치며 일으킨 불꽃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탁.
불이 들어왔다.
눈꺼풀을 정통으로 찌르는 불빛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움직임을 멈췄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밝은 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광경을 보는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제정신이 돌아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견은 한쪽 다리를 세우고 다른 다리는 길게 뻗고 있었다. 모단은 그 다리 사이에 앉아 완전히 체중을 싣다시피 기대 있었다.
모단은 그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떼고 서둘러 몸을 세웠다. 뒤늦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여전히 모단의 허리에 감겨 있던 견의 손이 움직였다. 거의 속옷 끈 아래까지 밀려 올라가 있던 티셔츠 자락을 가만히 끌어 내려주고, 다른 손으로는 뺨 옆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고맙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것 같다.
말은커녕 눈도 못 마주치겠다.
급히 몸을 뺀 모단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벙커룸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잔뜩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용케 집으로 가는 것처럼, 의식과 발이 따로 움직였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정말 이 색이 맞나, 이런 풍경이었던가, 눈에 닿는 모든 게 이질적이었다.
순간 다른 세상에 떨어졌다 되돌아온 것처럼.
혹은, 이전에 알고 있던 세상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처럼.
***
“어?”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둔 차 안에서 창문 너머를 지켜보고 있던 섭호는, 갑자기 건물 밖으로 뛰어나오는 여자를 보고 몸을 세웠다.
“선생님?”
부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모단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뒤이어 견이 나올 거라 짐작했으나 잠잠했다.
섭호는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나더니 북카페를 비롯해 불이 켜져 있던 창문들이 갑자기 캄캄해지는 게 아닌가. 옆에 있는 건물의 간판까지 꺼진 걸로 봐서 일시적인 정전 같았다.
혼자 있는 것도 아니니 괜찮을 것 같아 기다리고 있는데 좀처럼 불이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망설이다 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받지 않았다. 들어가 볼까, 고민하는데 건물이 다시 환해졌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단이 나온 거였다.
“뭔 일이랴?”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무사히 월경을 넘겼다면 데려다주겠다며 같이 내려왔을 터였다. 일이 바빠 못 간다면 저라도 같이 가라고 시켰을 거다. 모단이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혼자 뛰어가게 내버려 둘 견이 아니다.
‘설마…… 변한 걸 보았다거나?’
쾅 소리가 나게 차 문을 닫은 섭호는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올라가 문이 반쯤 열려 있는 북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북카페 안을 채웠다. 카운터 뒤까지 훑어본 후에야 벙커룸 안에 쓰러져 있는 견을 발견한 섭호가 눈을 부릅떴다.
“도련님! 대체 뭔 일이래유!”
천만다행으로 작아지진 않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안으로 들어가 보려는데, 견이 비척비척 일어나 앉았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멍하던 눈에 초점이 돌아오는가 싶더니, 다시 흐려졌다.
“섭호야…… 나 죽을 것 같아.”
너무 좋아서, 라는 말을 덧붙이지 못한 탓에 섭호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설마 뭔 일 당했슈?”
“심장에 전기 충격기 맞은 줄 알았어…….”
상태가 영 안 좋은 걸 보니 드디어 허벅지보다 더한 곳을 차이기라도 한 건가 싶었다.
“또 건드려서 기어코 얻어터졌구먼.”
“근데 살았다. 다행히 내 심장이 생각보다 튼튼해서…….”
“뭐라는 겨.”
잠시나마 걱정했던 게 아까워진 섭호가 인상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견은 여전히 조금 전의 꿈 같은 현실을 되짚어 더듬고 있었다.
대체로 현실이란, 기대와 상상에 비하면 초라하고 실망스러운 법 아니던가.
그런데 정반대였다. 멋대로 떠올라 쉬이 거둬지지 않던 상상 속 어떤 장면들보다도 아찔했고, 관능적이었고, 다디달았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성이 끊어진 와중에도 뺨을 맞을 거라는 각오 정도는 잊지 않았는데, 때리기는커녕 분명 저를 마주 안았다.
시작은 혼자였으나 끝은 같이 한 거였다. 분명!
“나 한 대만 때려봐.”
섭호는 굳이 잘못 들은 거냐고 되묻는 절차 따위는 거치지 않고 긴 팔을 벙커룸 안으로 쑤욱 넣었다. 그러고는 견의 이마에 가차 없는 딱밤을 선사했다.
“야!”
비명을 지른 견이 이마를 감싸고 끙끙대다 고개를 들었다.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후려 패는 거……!”
“어어, 코피!”
견의 코에서 익숙한 핏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그 정도로 세게 때린 건 아닌데 싶어 섭호가 더 놀랐다.
“코피? 아…….”
손등으로 코끝을 문질러 본 견이 덜컥 굳었다.
“까, 까먹, 잊어버렸…… 너무 정신이 없어서, 가장 중요한 걸! 아직 가면 안 되는데!”
방언처럼 터진 몇 마디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 섭호가 헛숨을 뱉었다.
“다 끝난 게 아니었단 말유?”
“어!”
“그럼 여태 둘이 뭐 했댜?”
견이 뜨끔 멈칫했다가 외쳤다.
“싸, 싸웠어! 격하게 싸웠어!”
“얼라들도 아니고 만나기만 하면 쌈박질이유? 치고 박고 할 때 하더라도 상황 봐가믄서 해야 할 거 아뉴!”
“치고 박고라니……! 아, 아무튼 알았으니까 빨리 정모단 씨 다시 오라고 해!”
섭호가 바로 모단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벨소리가 견 바로 옆에서 울렸다. 아까 어두울 때 플래시 삼아 들고 들어왔다가 그대로 두고 가버린 거였다.
모단의 휴대폰을 들고 나온 견이 의자에 있는 그녀의 가방까지 챙겼다.
“아직 시간 있어. 정모단 씨 집 멀지 않으니까 빨리 가면 될 거야.”
견과 섭호가 제집으로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모단은 집 근처까지 다 왔던 걸음을 다른 데로 틀었다.
“오늘은 혼자 왔어? 잘생긴 남자친구는 어디다 두고?”
‘이모네 닭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인이 반겼다. 모단은 어색하게 웃었다.
“남자친구는 아니고요.”
“썸인지 뭔지 타다가 파투났어? 아니면 사귀다 그새 헤어졌어?”
“둘 다 아니에요.”
“그래?”
주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모단은 소주 한 병과 국수 한 그릇을 시켜놓고 구석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테이블에 팔을 올린 모단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휴…… 이 미친년아. 아무리 오래 굶었어도 그렇지!’
더럭 겁이 났다.
‘이제 백견 얼굴을 어떻게 보냐고! 옘병!’
선을 넘었음에도 썸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을 보며 비겁하다 여겼다.
언제든 다른 데로 흐르는 물이고 싶어서 관계를 끓이지도 얼리지도 않고 모호한 채로 두는 거라고. 때로는 쓴 책임 대신 달콤한 설렘만 누리고 싶은 욕심이라고.
그런데 지금, 바로 그 비겁한 욕심이 치밀고 있었다.
새윤에게 말은 용감하게 했지만, 정말로 그 남자와 즐길 것만 즐기고 헤어지는 게 간단한 일인가 말이다.
당장 직장이 걸려 있지 않은가. 백견은 치사하진 않지만 충분히 집요하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또 도망치듯 옮겨갈 거야?’
집안도 집안인 데다 20대 초반이 아니라는 것도 걸렸다. 이래저래 연애의 고민이 연애에서 끝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전에 그렇게 데었잖아. 깨달을 만큼 다 깨달았잖아. 그걸 또 겪으려고?’
2년 전의 마지막 연애가 떠올랐다. 저보다 두 살 많았던, 그때 지금의 제 나이였던 남자.
제가 바랐던 해피엔딩은 그 사람이었지만, 그가 바랐던 해피엔딩은 결혼이었다. 그랬기에 결국 그는 제가 아닌 다른 여자를 택했다.
“자, 여기.”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국수 그릇과 소주를 놓아준 주인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혼자 와서 인상 쓰고 앉아 있는 사람한테는 한 병 이상 안 파니까 천천히 아껴 마셔. 매상도 좋지만 진상은 사절이야.”
“네. 딱 한 병만 맛있게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일단 병을 따서 잔을 채운 모단은 멈칫했다.
‘술은 쓰잖아.’
이걸 마시면 입안에 남아 있는 달콤한 여운까지 희석되어 버릴 것 같았다. 살면서 언제 또 이런 키스를 해볼까 싶을 만큼 좋았는데, 이렇게나 빨리 날려 버리자니 아까웠다.
다음 순간,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이를 악물었다.
“으윽……!”
입술에 힘을 주자마자 아릿한 통증이 번지는 통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얼마나 물어놓은 건지 쓰라렸다. 볼 수는 없지만 느낌이 묵직한 게 팅팅 부은 것 같기도 했다.
‘미친놈이 대책 없이 어디까지 가려고 했던 거야. 조금만 더 정전됐었으면 아주 씹어 먹었겠어!’
아직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열부터 올랐다. 모단은 차가운 소주병을 쥐고 있던 손으로 제 목을 덮었다.
입술에서 떨어져 턱과 귓불을 지나 목덜미에 파묻히던 녹진한 감촉이 생생했다. 진득하게 짓눌러 오는 습기가 너무 뜨거워 어깨를 뒤틀자,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뜨거운 숨을 흘리고는 다시 입술로 되돌아가던 것이.
역시나 어둠은 무섭다. 위험하다.
다시금 등줄기가 찌릿거렸다. 모단은 쓰디쓴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일부러 오래 머금고 있다가 삼키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삶을 달콤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맛보고 누려보면 절대 잊을 수 없다고, 그게 없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진다고 했던가.
이제 정모단 씨 없으면 못 살게 됐다는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나는 아니야.’
아껴 마시려던 술은 생각보다 빠르게 비워졌다.
‘미안하지만 난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싶어요, 백견 씨.’
입술도 먹고 술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까먹었음을 깨달은 건, 술값을 계산하려다가 지갑이며 휴대폰은커녕 가방조차 없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망했다! 넋을 빼고 다니는 것도 정도가 있지!’
다행히 안면 있는 사이인 데다 술값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눈썹 휘날리게 새윤의 커피숍으로 뛰어가 다짜고짜 현금을 뜯어다가 값을 치렀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데, 집 앞에 낯익은 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잠시 잊었던 키스의 여운이 되살아났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무책임한 심보도.
그러나 차 옆에 서 있던 섭호가 그녀를 발견하는 게 먼저였다.
“정모단 선생님, 이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제 가방을 본 모단은 하는 수 없이 다가갔다.
“잊고 가셨다고, 도련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짙게 썬팅이 되어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차를 힐끔 돌아본 모단이 물었다.
“백견 씨는…… 괜찮아요?”
“아아, 그게.”
섭호가 난처한 기색으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괜찮으실 겁니다. 일주일만 지나면요.”
역시나 지금은 안 괜찮은 모양이었다. 오늘 유난히 힘들어하던 게 떠올라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저기, 백견 씨에게…….”
“도련님께서 선생님께 전해 드리라고 한 게 더 있습니다.”
“네?”
“많이 놀랐을 텐데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전해달라고 하셨고요. 오늘 싸운 건 백 프로 진심이었고 할 말 다 못 했으니까 다음에 마저 싸우자고 하셨습니다.”
시킨 대로 읊긴 하는데 이게 말인지 똥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섭호가 말을 마쳤다.
모단은 금세 알아듣고는 헛기침을 했다.
“잘 알았고요, 오늘 싸운 건 쌍방 책임이니까 조용히 넘어가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섭호가 차에 올랐다. 모단도 얼결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옆에 있어주었어야 했는데. 그럼 지금은…….’
모단은 한참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쌍방 책임이라는 말을 곱씹는 아이를 뒷좌석에 태운 차가 멀어지다 사라질 때까지.
무심한 보름달의 빛이 구름 자락 뒤로 숨어들 때까지.
***
―어제 그 정전, 교통사고 나면서 차가 전봇대 들이받아서 그런 거였대요.
―다행히 운전자는 거의 다친 데 없대요. 내가 치료비라도 내 드리려고 했는데. 어제 정전으로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민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거든요.
출근하는 길, 견의 문자를 받은 모단은 안심하는 동시에 울컥했다.
밤새 연락 한 통 없기에 얼마나 아픈 건가 걱정했는데, 무슨 말로 다시 연락을 해야 하나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이토록 태연한 헛소리라니.
―근데 어제 20분 넘게 정전됐던 거래요. 2분 같지 않았어요? 나만 그랬나? 한 200년 됐으면 더 좋았을 건데.
‘그만해, 이 자식아! 200년은 무슨, 입술 붙은 한 쌍의 미이라로 발굴될 일 있나.’
아침부터 왜 이리 더운 건가.
모단은 화끈대는 얼굴도 식힐 겸 버스 창문을 살짝 열었다.
―근데 정말 미안해요. 첫 키스는 더 분위기 좋은 데서 하고 싶었는데.
첫 키스, 라는 글자를 본 모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키스라는 단어만으로도 벅찬데, 처음이라는 묵직한 의미까지 얹히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모단이 꾹꾹 글자를 찍었다.
―첫 키스 아니니까 괜찮아요.
전송 버튼을 눌러 놓고 흠칫했다. 아무리 민망해도 그렇지, 이게 할 소린가 싶었다.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 쨍쨍거릴 줄 알았는데 답은 줄곧 문자로만 왔다.
―내 기억엔 처음인데. 언제 나 몰래 나한테 키스한 적 있어요? 나 잠들었을 때 먼저 덮쳤던 거 아니야?
―사람을 뭐로 보고. 진짜 싸울래요?
―이제부터 모든 처음의 기준은 우리 둘 사이 한정이니까 딴소리하지 마요. 그보다 우리 오늘부터 1일 맞죠?
―아니요.
―그럼 어제부터예요?
모단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내 마음에 확신이 없어요. 키스 정도는 분위기에 휩쓸릴 수도 있지만 사귀는 건 심사숙고해야죠.
답이 없다. 전화도 없다.
답답해서 먼저 전화를 걸까 하다가, 말보다는 글이 덜 횡설수설할 것 같아 마저 적었다.
―나보다 백견 씨가 더 신중해야 하는 일이에요. 난 헤어진 남자하고는 절대 좋게 안 지내요. 근데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필요하다면서요. 사귀다 깨지면 지구가 멸망한대도 안 볼 건데 괜찮겠어요?
회사 앞에서 내릴 때까지 잠잠했다.
초조해진 모단이 견의 번호를 띄우고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답이 왔다.
―정모단 씨 말이 맞아요. 안 괜찮을 것 같아요. 우리 사귀지 맙시다.
막 회사 로비로 들어섰던 모단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뭐야. 서운하면 안 되지.’
눈가로 시큰한 열기 같은 것이 몰렸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내린 모단은 사원증을 찍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가기 직전에 온 문자가 그녀의 발을 또다시 그 자리에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