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34화 (34/86)

#34. 지금 뭐가 더 무서운지 모르겠어요?

2017.08.27.

희명병원을 나와 섭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하던 길, 견은 치미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미쳤어? 이 날씨에 히터를 왜 틀었어?”

“안 틀었슈.”

“근데 왜 이렇게 더워.”

혹시 버튼이 잘못 눌렸나 확인한 섭호가 룸미러로 뒷좌석을 건너다보았다.

“열 있는 거 아뉴?”

견은 잔뜩 찡그린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았다.

“아닌데…….”

손도 이마도 미적지근한데 더웠다. 겉보다는 속이 홧홧 뜨거운 느낌이다.

견은 창문을 열었다. 1분도 되지 않아 욕을 내뱉었다.

“아이 씨, 냄새!”

자동차 매연을 비롯한 온갖 도시 냄새가 예민해진 후각을 후려쳤다. 곧바로 창문을 닫은 견은 멀미가 나는 것 같아 관자놀이께를 짚었다.

“에어컨 틀었응께 문 닫고 기댕겨 봐유.”

한 손으로 타이를 빼서 던진 견이 셔츠 단추도 풀었다. 땀이 주르륵 흐르는 보통의 더위가 아니라 사막처럼 바싹 마르는 듯한 더위가 숨통을 조였다.

‘부작용인가?’

눈을 감고 제 몸을 진찰하듯 샅샅이 느껴보았다. 두통은 현저히 가라앉았고 속도 얼마간 편해진 것 같다. 예리하게 느껴지던 통증도 확실히 줄었다.

‘부작용인가 보네. 그래도 아픈 것보다는 더운 게 낫지.’

등을 기댄 견은 느긋하게 앉아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느긋하게 되지가 않았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불쾌한 감각이 살갗 바로 아래에서 스멀거렸다.

팔짱을 끼었다 풀고, 다리를 꼬았다가 고쳐 앉아보기도 했다. 움직이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데, 가만히 있을라 치면 금세 불안해졌다.

‘이건 또 뭐야. 하지불안증후군? 그렇다기엔 다리뿐만 아니라 전신이 다…….’

뭔지 모를 충동이 자꾸만 치밀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척을 느낀 섭호가 뒤를 살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이유가 뭐유? 어디 불편하신 거유?”

“어. 근데 어디가 불편한지 모르겠어.”

띵동 하고 견의 휴대폰에 문자가 날아들었다.

―오빠! 1번하고 2번 중에 어떤 게 더 취향인지 섭호 오빠한테 물어봐 줘. 절대 내가 시켰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금지가 보낸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견의 눈썹 사이에 빡 하고 힘이 들어갔다.

글래머러스한 모델이 수영복을 입고 있는 사진이다.

하나는 가릴 곳만 간신히 가린 베이지색 비키니, 다른 하나는 옆구리며 등이며 가슴 한복판까지 깊게 트인 블랙 모노키니 수영복이었다.

“제정신이야, 이거? 사이즈라고는 뽀롱뽀롱 뽀로로만 한 게.”

현실 친오빠에 빙의한 견이 복장 터진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기집애만 아니었어도 당당하게 여자는 안 때린다고 할 수 있는데.”

말속에 가득 찬 분노를 느낀 섭호의 어깨가 움찔했다.

견이 아는 여자 중 뽀롱뽀롱 뽀로로만 하면서 저토록 성질을 돋울 수 있는 기집애는 한 명뿐이다.

“누굴 잡으려고 1번 2번을 찾아? 친동생이었으면 잡아다가 머리를 빡빡 밀어놨다, 내가.”

대꾸도 안 하고 휴대폰을 던져 버리려는데 문자가 또 왔다.

―어쭈, 읽씹하냐? 지금 내 몸매 무시해? 모단 언니 정도는 돼야 걸치는 거다 이거야?

“이게 미쳤나. 누구 허락받고 정모단 씨를 들먹…….”

맹세코 그러려던 게 아닌데, 방금 본 사진 속 모델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교체되고 말았다.

얼핏 안 입은 것처럼 보이는 누드 톤에 끈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수영복.

혹은 가슴선이 거의 배꼽까지 파인 데다 새하얀 피부를 더 고혹적으로 강조해 줄 것 같은 블랙 수영복을 입은…….

“……잠깐만.”

아랫배가 저릿했다. 막연하던 불편감이 확실하게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니까 이거,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그.’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 갑자기, 심지어 속옷도 아니고 수영복에? 사춘기냐? 발정기야?’

평소의 견은 결코 욕구가 과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금욕적인 편에 가까웠다.

호르몬을 따라 식욕도 성욕도 들쭉날쭉했기에 욕구를 욕구 그대로 믿지 않았다.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현상마저도 다른 증상들처럼 통제의 대상으로 보게 된 거였다.

‘자존심 상하네. 언제부터 이렇게 헤픈 남자가 됐지? 섭호가 이거 보고도 밤에 잘 자면 언니라고 했던 동영상을 보고도 숙면했던 나인데.’

견은 심호흡을 했다.

‘나는 사람이다. 절대 짐승은 되지 말자. 정모단 씨 얼굴 똑바로 못 볼 일도 하지 말자.’

그러고는 곧바로 수습에 들어갔다.

일단 ‘여아용 뽀로로 수영복’을 검색해 가장 먼저 뜨는 이미지를 캡처해 답장을 보냈다.

―너는 이게 딱이야. 갖다 댈 걸 갖다 대라.

금지가 욕을 하거나 말거나 연락을 딱 끊고, 명상을 시작했다.

‘이건 호르몬 분비에 따른 일시적인 정서 불안일 뿐이다.’

이어서 터닝몬스터 주제가를 속으로 흥얼거렸다.

바다반 아이들에게 배운 이 노래는 후크송 뺨치는 중독적인 멜로디에 꿈과 희망과 동심으로 가득한 가사 덕에 애국가보다 효과가 더 훌륭했다.

아니,

훌륭했었다.

***

“그건 무슨 패션이에요?”

그날 저녁, 지난달 보름처럼 퇴근하고 북카페로 온 모단은 허리에 웬 담요를 칭칭 감고 어깨에도 뒤집어쓰고 있는 견을 보고 황당해했다.

“몸이 갑자기 미쳤…… 아니, 추위를 타서.”

그런 것치고는 뺨이 벌건 데다 식은땀까지 나고 있다. 열이 심해 오한이 온 건가 싶었다.

“어디 봐요.”

성큼 다가선 모단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보기보다는 안 뜨겁네요. 38도는 안 넘는 것 같고.”

직업상 미열인지 고열인지쯤은 굳이 체온계 안 꺼내고 손바닥만으로도 파악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혹시 해열진통제 먹었어요?”

모단이 이마에서 뗀 손을 뒤집어 손등을 견의 목과 귀 사이에 대보았다.

이마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한 부분에 보드라운 살이 닿은 순간, 견의 입에서 윽 소리가 새어 나왔다.

“됐, 그만, 됐어요. 약은 됐고요. 괜찮아요.”

매몰차다 싶을 만큼 세게 고개를 돌린 그가 뒤로 물러났다.

‘미치겠네!’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상상을 안 하려고 해도 멋대로 그려지는 통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장본인이 나타나 코앞에서 알짱거리니 더 힘들었다.

평소였다면 걱정해 주는 눈빛과 손길에 감격해 더 비비적대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은 현기증이 일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너무 싸매고 있으면 열이 더 날 수도 있어요.”

모단이 손짓했다.

“벗어요.”

아주 담백한 말이었으나 약발 제대로 듣고 있는 견의 귀에는 굉장히 요염한 톤으로 각색되어 들어왔다.

“어깨에 걸친 걸 벗든, 허리에 두른 걸 벗든 하나는 벗으라고요.”

“그냥 둬요.”

견은 더 필사적으로 담요를 부여잡고 몸을 뺐다. 영문 모르는 모단은 담요를 가리켰던 손을 거두고 눈만 끔벅거렸다.

멀찌감치 떨어져 서자, 이번에는 시원하게 드러난 모단의 다리가 눈에 띄었다. 디자인도 색도 얌전하긴 한데 길이가 많이 짧은 바지를 입고 있다.

“설마 그렇게 입고 회사를 갔어요?”

생각하기도 전에 말부터 튀어나왔다. 목소리도 말투도 까칠했다.

욱하려던 모단은 오늘은 웬만하면 봐주기로 한 날임을 되새기고 차분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이런 걸 입고 불편해서 어떻게 애들을 보라고. 긴 바지 입고 출근했다가 여기 오면서 급하게 하나 사 입었어요. 반 아이가 케첩 묻은 손으로 엉덩이를 팍 짚는 바람에.”

“어딜 짚었다고요?”

“엉덩이요. 뒤에서 선생님, 하면서 뛰어오는 소리 날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문득, 버스에서 제 허벅지를 점령했던 뭉클한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얼결에 감아 안았던 허리며 놀라 올려다보던 촉촉한 눈동자까지도.

속이 더운 정도가 아니라 끓기 시작했다.

“벌써 긴 옷은 다 들어가고 여름옷이 잔뜩 나왔더라고요. 어차피 금방 더워질 것 같아서…….”

“지금 그렇게 짧은 걸 입으면 한여름에는 뭐 입게요.”

무심한 소리만 하는 그녀가 원망스럽기까지 해서, 더 딱딱하고 싸늘하게 잘랐다.

모단의 입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네가 뭔데’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더 짧은 거 입으면 되죠. 민소매도 있고 미니스커트도 있고 수영복도 있고 많잖아요?”

‘왜 하필 수영복이야…….’

견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갖은 노력을 말 한마디로 날려 버리다니, 울고 싶었다.

“왜 그래요?”

손을 내저은 견이 어깨에 걸쳤던 담요를 끌어 내려 툭 건넸다.

“다리 덮어요.”

“난 더워요.”

“나도 더워요. 그러니까 좀, 제발.”

“아까는 춥다더니…….”

얼마든지 더 구시렁거릴 수 있었으나 견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였다. 모단은 잠자코 담요를 받아 들었다.

“정모단 씨 할 일 해요. 나도 일할게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돌아선 견은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았다.

애꿎은 냉수만 잔뜩 들이켜고 서류에 집중해 보려 했으나 될 리가 없다.

눈이 저절로 모단을 찾았다. 그녀는 전에 앉았던 창가 자리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는 중이다.

곧고 단정한 앉음새, 가지런히 내려앉은 머리카락, 한곳만 향해 있는 시선.

고요한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자니 얼마간 몸이 식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단이 팔을 올렸다.

머리카락을 대강 그러모아 손목에 끼고 있던 고무줄로 묶는 장면이 슬로모션처럼 눈을 찔렀다.

희게 드러난 뒷목에 몇 가닥 흘러내린 잔머리를 살며시 걷어내 주고, 그대로 코를 묻고 싶은 충동에 심장이 미친 듯 쿵쿵거렸다.

몇 번인가 스친 적 있는 샴푸 향도 날 거고, 부드러운 살 냄새도 나겠지.

마시고, 맛보고, 그다음에는…….

견은 테이블 위로 맥없이 무너졌다.

불덩이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뜨거움을 못 견디고 끄집어내는 순간 모단도 데이고 만다. 숯이 되더라도 혼자 꺼뜨려야 했다.

나쁜 상상과 이성 사이를 오가다 지쳐 버린 의식이 차츰 몽롱해졌다.

얼마쯤 그대로 있었을까, 옆에서 기척이 났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어깨를 짚었다.

“백견 씨, 괜찮아요?”

벌떡 몸을 일으킨 견이 모단의 손을 탁 쳐냈다.

“손대지 마요.”

안색이 희다 못해 새파랗다. 얼음처럼 차가워 보였다.

“가까이 오지도 말고.”

모단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무심코 돌아봤는데 엎드려 있는 게 너무 불편해 보였다. 게다가 꼼짝도 하질 않아서, 혹시 의식을 잃은 게 아닌가 싶어 더럭 겁이 났던 건데.

“……미안해요.”

견이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느릿한 움직임과 찡그린 눈매가 어쩐지 위험해 보여, 모단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차라리 눕지 그래요?”

모단이 안쪽을 가리켰다.

가벽으로 침대보다 조금 큰 공간을 몇 개 만들고 커튼으로 가려둔 1인용 벙커룸이 있었다.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으며 편하게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손님들이 찾는 곳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누워서 쉬다가 필요하면 나 불러요. 그럼 되잖아요.”

견은 미동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눈길이 너무 진득해서 순간 등줄기가 쭈뼛해졌다.

“가서 자요.”

견의 눈썹이 꿈틀했다.

착각인지 실제인지, 숨이 가빠졌다. 둘 사이를 메운 공기 속에서 산소가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견은 허리춤의 담요를 꼭 쥐고 몸을 일으켰다.

“좀 쉴게요.”

벙커룸 안으로 몸을 낮추고 들어간 견은 바로 드러누워 몸을 웅크렸다. 그대로 눈을 꼭 감았다.

‘아무리 정모단 씨라고 해도 그렇지, 이 정도로 반응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분명히 부작용이야. 고모한테 또 당했어!’

이를 악물고 온갖 슬프고 경건한 생각만 하려 애쓰던 견은 까무룩 잠에 빠졌다.

‘오늘따라 더 안 좋아 보이네.’

견이 사라진 벙커룸 쪽을 쳐다보다가 자리로 돌아간 모단은 싱숭생숭한 기분도 털어낼 겸 보던 영화에 집중하려 애썼다.

<뷰티 인사이드>라는 제목의 영화.

자고 일어나면 매일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남자가 있다. 외모도, 나이도, 성별도, 국적까지도 매번 다르다.

어느 날 그는 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어렵게 다가간다. 믿기 어려운 비밀에 혼란스러워하던 여자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비현실적인 소재임에도 지금껏 본 어떤 영화보다 실제처럼 다가왔다. 모단은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그들의 연애에 몰입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화면 위로 견이 했던 말이 겹쳐들었다.

그날의 날씨, 휘날리던 꽃잎, 뭉근한 바람까지도.

“오늘의 내가 진짜 나라는 거 믿어줄 수 있어요?”

“곧 보름이잖아요.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몰라요.”

아프고, 못되게 굴고, 볼품없이 작은 나는 진짜가 아니라고 했었다.

이렇게 지금처럼 옆에 있어주면, 계속 진짜로 있을 수 있다고.

―사랑해. 오늘의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영화 포스터에도 적혀 있는 대사를 곱씹어보던 모단은 견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쾅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게 캄캄해졌다. 모단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소스라쳤다.

정전이다.

저만치 내려앉았던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유독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한 거였다. 영화관도 잘 가지 않을 정도로.

“……백견 씨?”

부스럭대며 나오는 소리가 들리길 바랐는데 아무 기척도 없다. 깊게 잠들어서 모르는 걸까.

휴대폰을 손에 쥔 모단은 액정 불빛에 의지해 견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넘어질 것 같아서,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 같아서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백견 씨, 정전됐어요. 지금 너무 어두운데.”

가까스로 벙커룸 앞까지 온 모단은 커튼을 걷고 안을 향해 말했다.

“미안한데 일어나 봐요.”

종일 긴장의 연속이었다가 가까스로 잠든 견은, 며칠 동안 쌓인 피로에 짓눌려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긴 한데 몸이 너무 무거웠다.

“백견 씨…….”

견은 간신히 눈을 떴다. 눈을 떴는데도 어두웠다.

바로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며 조심조심 어깨를 흔드는 게 모단임을 알아차리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꿈인가?’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폰 액정이 꺼지며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모단이 또 화면을 누르자, 다시금 그녀의 얼굴이 아른아른 얼비쳤다.

“왜 이런 거예요? 여기만 이런 건지, 아니면 건물이 다 정전인 건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정신이 돌아올수록 견은 아찔해졌다.

애초에 1인실인 곳이다 보니 너무 가까웠다. 아직도 약기운이 다 빠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가요.”

더없이 쌀쌀맞은 한마디가 흘러나온 순간, 모단은 얼어붙었다.

막 잠에서 깬 탓에 낮고 허스키하게 잠긴 목소리가 정말 견의 것이 맞는지, 오싹하기까지 했다.

“지금 밖에 정전이라니까요?”

“나가라고.”

모단은 떨리는 손으로 자꾸만 꺼지는 액정을 눌렀다. 가뜩이나 겁먹고 있는데, 견마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굴자 더 무서웠다.

“내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앞이 안 보일 만큼 깜깜한 거는 좀…… 그러니까…….”

덜덜 떨리는 말 끝에 미처 감추지 못한 두려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이게 아닌데. 미안해진 견은 얼른 일어나 앉았다.

“진정해요. 금방 불 들어오겠죠.”

손을 뻗은 견이 모단의 어깨인지 팔인지를 두어 번 다독이고는 빠르게 뗐다.

“좁은 데서 이러고 있으니까 숨 막혀서 그래요. 나가요.”

낮은 천장에 머리가 닿을세라 무릎걸음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덜커덕.

밖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것 같은 큰 소리가 났다.

“으아악! 악!”

비명을 내지른 모단은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던 견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격하게 파고들기까지 했다.

놀람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에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모단은 눈도 뜨지 못하고 간신히 물었다.

“부, 불 들어왔어요?”

“……아직.”

“일단 나가요. 백견 씨 잡고 따라갈 테니까 나가 봐요. 나가서 뭐라도 좀 켜보게…….”

“지금.”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뭐가 더 무서운지 모르겠어요?”

모단의 몸이 뻣뻣해졌다. 누군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막혔다.

이마가 닿아 있는 곳에서 거센 박동이 울렸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대지 말라고, 나가라고…… 분명 말했어요, 나는.”

어둠보다 더 짙은 목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얼결에 안은 거였다고 손 놓고 멀어질 타이밍은 이미 놓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정모단 씨 때문이라는 건 아니에요.”

어느새 견의 팔이 등을 감고 있었다. 그다지 힘이 들어간 것 같지 않은데도 꽁꽁 묶인 양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약 때문도 아니고 정전도 아니고, 그냥 내가…….”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렸다. 겹쳐진 심장 소리가 너무 컸다.

견의 손이 어둠 속에서 모단의 팔을 더듬어 찾았다. 어깨까지 타고 올라와 목과 뺨을 감쌌다.

“끝까지 못 참아서 그래.”

입술 위로 뜨거운 속삭임이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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