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33화 (33/86)

#33. 콕 짚어 분홍

2017.08.23.

옆에 누가 앉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달밤에 치명적인 입술을 해요?”

“으헉!”

치명적인 입술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뭔가 익숙한 향이 잠깐 난 것 같다 했는데, 착각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같이 앉아서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까지 기울인 견이 속닥거렸다.

“참고로 저는 발색과 지속력은 좋으면서 묻어나지 않는 립 제품을 선호합니다.”

“누가 취향 물어봤어요? 갑자기 뭔데요!”

“진짜 우연인데. 저도 깜짝 놀랐어요.”

힐끔대는 시선들이 얼마간 거두어질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견이 말을 꺼냈다.

“아까 내가 탄 정류장, 전에 만났던 북카페 있는 데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회사와 집의 중간쯤에 있는 동네.

“오늘 아침부터 거기 있었거든요. 근데 퇴근시간쯤 되니까 갑자기 배가 고파서 정모단 씨 동네로 가려고 나온 거예요. 난 내가 먼저 도착할 줄 알았지.”

갑자기 배가 고파서 남의 동네로 쳐들어가는 중이었다는 이상한 흐름인데, 백견의 입을 타고 나오니 자연스럽게 들렸다. 이 남자에겐 그보다 더 이상한 것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차 놔두고 왜 버스를 탔는데요?”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뭐가요?”

“정모단 씨가 아침저녁으로 어떤 것들을 보는지.”

역시 이 남자는 이상하다.

운동화 속 발가락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손끝도 덩달아 간질간질해졌다.

갈 곳을 잃은 모단의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니 나 이런 거 본다고 어필하는 것 같고, 계속 그를 보고 있자니 그것도 이상했다.

견이 그런 내적 고민을 한 번에 없애주었다.

“정모단 씨는 아침저녁으로 자기 얼굴을 보는구나. 옆에 누가 앉아도 모를 만큼 푹 빠져서.”

“그래요. 내 얼굴에 푹 빠져 삽니다. 됐어요?”

“나랑 똑같네요. 나도 TV보다 거울 보는 게 더 재밌던데. 뭐 이렇게까지 잘생겼나 싶어서.”

“예에. 사는 게 아주 꿀잼이시겠습니다.”

견은 씩씩 콧김을 내뿜는 모단을 보며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다 좌석 바깥으로 내려놓고 있던 다른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받아요.”

분홍 카네이션과 흰 안개꽃이 섞인, 크지도 작지도 않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스승의 날인데 꽃 한 송이 못 받았을 것 같아서.”

비로소 갈 곳을 찾은 모단의 시선이 꽃에 머물렀다.

선뜻 받지는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청탁금지법 때문에 말이 많아서 아무것도 보내지 말라고 공문 나갔다면서요.”

“그게 서로 부담 없고 편하긴 하죠. 어차피 선물 주는 애들 더 챙기고 안 주는 애들 구박할 것도 아니니까.”

“나처럼 어린이집하고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 주는 건 마음 편하게 받을 수 있죠?”

“관련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요. 백견 씨가 내 제자예요?”

“혹시 알아요?”

모단의 시선이 꽃 위에 있는 얼굴로 올라왔다.

“……제자였을지.”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데, 마주친 눈길을 홀리듯 붙잡고 씩 웃는다.

“공자 왈, 세 사람이 가면 그 안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모단 씨한테 배운 거 많으니까 그냥 받아요. 난 원래 안 가르쳐 줘도 알아서 잘 배우는 스타일이거든.”

“그래도…….”

견이 모단의 무릎 위에 꽃다발을 내려놓고 짐짓 엄한 눈을 했다.

“스읏. 그냥 잘 받겠습니다, 하세요.”

제가 닭발에 소주 먹고 나오면서 했던 말임을 알아들은 모단은 웃고 말았다.

“알았어요. 잘 받겠습니다.”

견의 눈매도 잠잠히 휘어졌다.

“저녁은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까요?”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안 돼요. 엄마와 선약이 있어서.”

견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오늘은 안 된다고요.”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고?”

분위기가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쏙 빠진 게, 한 대 맞은 것 같다고나 할까.

엄마와 약속 있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나 싶어 다시 말하려는데, 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싶은데’라고 했잖아요.”

“네?”

내가 그랬나?

내가 그랬네.

무의식적으로 한 말이라는 게 더 오싹했다. 아무 생각 없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는 것들이 더 무서운 거 아닌가.

“그건 그냥 한 말이죠. 뭘 일일이 의미 부여하고 그래요?”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견의 입은 이미 헤벌어져 있었다.

“오늘은 그 말 한마디로 됐어요. 밥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오버하지 마요. 그렇게 말하니까 꼭 내가 말 한마디로 다 때우는 사람 같잖아요.”

“말로만 때우는 사람 아닌 거 아니까 다음에 진짜로 밥 먹어요.”

“알았어요. 어차피 곧 보름이니까 그때 먹든가.”

모단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얼른 마무리하고 다른 얘기로 넘어갔으면 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거 먹으러 갑시다.”

“맛없는 거요?”

“네. 맛있는 거 먹으면 정모단 씨 정신이 온통 거기로만 쏠려서 안 되겠더라고. 맛없는 걸 먹어야 나를 좀 볼 것 같은데.”

“누가 들으면 내가…… 어휴.”

내가 좀 그렇긴 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마침 내릴 정류장이 다음이라 홱 몸을 돌리고 벨을 눌렀다.

“백견 씨는 내리지 말고 계속 타고 있어요. 몇 정거장 앞에서 돌아서 다시 이리로 나오니까.”

“내려서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사양한다는 거죠?”

“바로 커피숍 들러서 친구 만날 거예요.”

“남자인지 여자인지만 보고 가면 안 되나?”

모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견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꽃 고마워요.”

담담한 한마디만 남긴 모단이 눈짓을 했다. 견은 맞을 줄 알고 쫄았던 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처럼 우아하게 몸을 틀어 비켜주었다.

“조심해서 가요.”

“네.”

막 통로로 나온 모단이 문 앞으로 가려던 때였다.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며 서 있던 승객들이 크게 휘청했다.

한 손에는 가방을, 다른 손에는 꽃을 들고 있던 모단은 손잡이를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다.

“으앗!”

엉덩이가 딱딱한 어딘가에 철퍼덕 안착했다.

“……아.”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TV보다 재밌다는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이거…… 설마 꽃 선물에 대한 보답이에요?”

허락도 없이 제 허벅지를 깔고 앉은 그녀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은 물론, 허리까지 받쳐 준 견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비싼 꽃은 아닌데.”

뺨은 소년처럼 발그스름한데, 눈빛은 진지하다 못해 뜨거웠다.

아찔해진 모단은 견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어떡해. 미안해요!”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끝까지 잡아준 그가 툭 흘렸다.

“여기 너무 뒷자리라 안 들릴 것 같아서 그러는데, 내릴 때 기사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실래요?”

“아으, 이……!”

아까 모단이 견의 품으로 넘어질 때부터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주변 승객들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소리까진 차마 뱉지 못한 모단은 후다닥 버스에서 내렸다.

“선생님!”

정모단 씨라고 했으면 모른 척 계속 도망쳤을 텐데, 귀신같이 직업병을 자극하는 바람에 돌아보고 말았다.

버스 창문을 열고 팔을 걸친 견이 큰 소리로 말했다.

“빨간 카네이션이 아니라 분홍 카네이션이에요.”

“네?”

“그냥 그렇다고요.”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견이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요.”

멍하니 서 있던 모단은 긴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옘병. 몸무게 실시간으로 털렸네. 아까 허리도 잡지 않았나?’

“정모단.”

제 옆구리살을 잡아보다 흠칫 돌아본 모단이 비명을 삼켰다.

가느스름해진 눈을 한 새윤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웬, 웬일이야? 가게는 어떡하고 나왔어? 내가 가는 길에 들르려고 그랬…….”

“너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가라고 친히 마중 나왔다가 좋은 구경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 것 같은데 그거 아니다.”

“버스 창문 사이에 두고 애절해 죽는 걸 내가 봤는데 아니긴 뭐가 아냐?”

모단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눈에 멜로드라마 필터가 씌었나! 애절이 다 나가 죽었대? 네가 이상한 거거든?”

“이러려고 30년을 악착같이 산 줄 아느냐고 큰소리치더니……!”

꽃다발을 훑은 새윤의 눈길이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맞선 볼 때는 칼같이 잘만 자르더니만 이런 건 왜 못 잘라? 어쩐지, 얼굴에 홀랑 넘어갈 것 같더라! 생긴 게 그렇게 중요하냐? 응?”

“중요하긴 하지. 돈이 없으면 내가 먹여 살리면 되지만 못생긴 건 어떻게 안 되잖아.”

“야, 이 넋 빠진 기집애야!”

“안 넘어갔으니까 소리 좀 그만 질러.”

가방 멘 쪽으로 꽃다발을 옮겨 든 모단이 나머지 한 손으로 새윤의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뺏어 들었다. 보기보다 묵직해서 팔이 휘청했다.

“내가 들어줄게. 장 보러 나온 거였어? 가게는 어쩌고?”

“은규한테 맡기고 나왔어. 너 이거 주려고 들르라고 했던 거니까 가져가서 어머니 갖다 드려. 오늘 아버지 기일이잖아.”

“윤새윤…….”

장바구니 안에는 비싸 보이는 과일이 종류별로 들어 있고, 술까지 한 병 있었다.

혜숙이 쓸쓸히 제사상을 차리는 걸 보다 못한 모단의 강력한 주장으로, 몇 년 전부터 아버지의 기일에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함께 저녁을 먹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너밖에 없다. 박은규 주지 말고 내가 데리고 살 걸 그랬어, 너.”

“입 발린 소리 집어치우셔. 너희 아버지가 방금 전 그 꼴을 보셨으면 하늘에서 땅을 치실 거다.”

“하늘에서 땅을 왜 쳐. 그리고 내 꼴이 뭐 어때서? 나는 죽었지만 우리 딸은 아직 안 죽었구나, 하시겠지.”

모단이 앞장서서 걸음을 뗐다.

“은규 오늘은 일찍 왔나 보네.”

“응. 요새 무슨 공모전이 있다고 또 바빠서 한동안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익명으로 기획안만 보고 뽑는 건데 사원도 심사에 어느 정도 참여를 해야 한다나.”

“구색 맞추기 아냐? 이미 뽑을 사람 다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나도 똑같은 소릴 했더니 아니라던데? 엄청 투명하고 공정하게 한대. 이번에 공모전 뽑힌 사람은 바로 입사라서 누가 들어오든 말 덜 나오게 하려고 그런다더라.”

커피숍과 모단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갈라지는 길에서 둘은 잠시 멈춰 섰다.

“너, 그러다 정말 백견이랑 잘된대도 나한테 말 안 하겠다? 잔소리 듣기 싫어서.”

고함을 칠 때보다 시무룩하니 잔뜩 섭섭해 보이는 지금의 새윤이 더 맘에 걸렸다.

양손에 짐을 든 모단은 어깨로 새윤을 툭 쳤다.

“잘되기는. 너는 네 남편이 다니는 회사가 어떤 덴지 몰라?”

그런 회사의 상속자야, 라는 말을 생략하고 턱을 치켜들었다.

“밥 몇 번 먹는다고 연애 되고 결혼 되는 거 아니잖아. 돈 많고 잘생긴 남자들만 이 여자 저 여자 즐기라는 법 있어?”

“그래서 지금 백견을 갖고 놀다 처절하게 버려주겠다는 거야? 그렇게 살신성인적인 복수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드라마 너무 보셨어요, 해빛이 어머님.”

둘은 동시에 웃었다.

“그래.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즐기고 내 몫까지 누려. 재벌 3세한테 꽃도 받고 백도 받고 다이아도 받고 다 받아 챙겨라.”

“꽃뱀이냐? 그리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여자가 꼭 받기만 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 내가 그 남자한테 돈으로도 못 사는 걸 줄 수도 있는 거잖아.”

“돈으로도 못 사는 거 뭐? 사랑 같은 거? 사랑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야?”

“야이 씨……!”

“아우 씨……!”

온몸에 오소소 닭살이 돋은 모단이 몸을 뒤틀었다.

“미쳤냐고. 꽃뱀 되기 전에 닭 될 뻔했잖아.”

자기가 말해놓고 소름 끼친 새윤도 팔을 벅벅 긁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내가 지나쳤어. 근데 분홍 카네이션인 건 맞잖아!”

“그게 뭐? 클래식한 레드보다는 러블리한 핑크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보지.”

“미쳤냐고. 얘 왜 이러니.”

“진심으로 미안하다. 나도 지나쳤다. 그러게 왜 분홍을 들먹여.”

“백견이 콕 짚어 분홍이라잖아, 멍청아. 존경과 감사의 의미가 담긴 건 빨간 카네이션이고, 분홍 카네이션 꽃말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합니다’거든?”

“커헉, 뭐? 어우!”

턱을 목 쪽으로 바짝 당긴 새윤이 남자만큼 목소리를 낮게 깔고는 부러 느끼하게 말했다.

“그냥 그렇다고요.”

“야, 윤새윤!”

“다음에 봐요, 선생님.”

“너 죽는다, 진짜!”

***

“욕 나오려고 그래.”

“이게 어디 고모 앞에서.”

“그러니까. 그래서 참고 있어.”

지미와 마주 앉은 견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모단과 버스에서 마주친 날, 밤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버스를 타서 가벼운 멀미를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증상은 순식간에 강도를 높였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웬만하면 참겠는데, 이번 달은 미치겠어.”

다른 때보다 더 독하게 온몸을 괴롭히는 월경전증후군 증상들을 견디다 못해 지미의 연구소까지 온 참이었다.

“요새 심하게 스트레스받는 일 있었어?”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도 있어? 원인 모르면 무조건 스트레스야? 의사들은 스트레스랑 신경성이라는 말 없으면 진단서 못 쓰지?”

“이 자식 나불대는 거 보게. 눈에 뵈는 게 없구만?”

다른 때 같았으면 바로 눈을 깔았을 견이었으나, 지금은 누군가와 눈만 마주쳐도 심기가 불편할 지경이다.

“스트레스 안 받게 생겼어? 몸이 이따위인데? 할 일은 많은데 좀만 집중하려고 하면 바로 뒷목부터 뻐근해지면서 바늘로 머리를 쑤시는 것처럼 아파.”

본인이 판을 짜놓은 공모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파격적인 조건에 대대적인 홍보까지 들어가면서 반응은 뜨겁다 못해 후끈 끓어올랐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진 건 말할 나위도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뽑을 수밖에 없는, 완벽하고도 묵직한 한 방을 준비하느라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여자들 월경도 스트레스 심하면 주기가 틀어지거나 아예 건너뛰기도 해. 원인을 몰라서 스트레스 들먹이는 게 아니라 대부분 가장 큰 원인이란 얘기야. 다른 증상은?”

“열 오르면서 식은땀 나고 힘이 쫙 빠져. 계속 체한 것처럼 메슥거리고. 아랫배엔 돌덩이가 들어 있는 것 같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아.”

“약은 먹었어?”

“칼슘, 마그네슘, 비타민, 철분제까지 다 챙겨 먹었어. 두통약도 소화제도 먹었는데 효과는 전혀 없고.”

“식단은?”

“밀가루 빼고 설탕 줄이고 알코올하고 카페인도 딱 끊었어. 근데 아프다고!”

“기록은?”

“…….”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던 견이 입을 다물었다.

“주기에 따라 증상을 꼼꼼히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했잖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만 해도 어느 정도 이완이 된다고.”

견이 팔짱을 끼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염불 읊듯 외었다.

“이건 호르몬 분비에 따른 일시적인 정서 불안일 뿐이다. 며칠, 이제 몇 시간만 참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지.”

좀 차분해지나 싶던 그가 번쩍 눈을 뜨더니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누가 그걸 몰라? 그럼 뭐 해! 지금 기분이 더럽고 딱 죽겠는데!”

“아휴, 저걸 그냥. 남 일 같지 않아서 때릴 수도 없고.”

“끔찍하게 싫어. 내 몸 하나 내 마음대로 못 하는 게.”

견이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나도 모르겠어. 뭐가 진짜인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지금 저 사이코 같은 모습이 진짜구나. 평소엔 멀쩡한 척했던 거구나. 나도 헷갈리는데 오죽하겠어.”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던 손이 머리까지 헝클어뜨렸다.

“오늘 저녁에 정모단 씨 만나야 하는데 이대로는 못 봐. 내가 무슨 소릴 할지, 무슨 짓을 할지 겁난단 말이야.”

가뜩이나 잠이 부족해 충혈된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졌다.

“어떻게 좀 해줘, 고모. 최소한 제정신은 유지할 정도만. 약이든 뭐든.”

한동안 말이 없던 지미가 안경 콧대를 밀어 올렸다.

“마침 오늘 받아놓은 약이 있긴 해. 전에 먹었다가 부작용 났던 거 개선한 건데, 아직 검증이 다 안 돼서…….”

“진짜? 뭐, 어떤 거? 머리카락 이만큼 빠졌던 거?”

“아니.”

“그것만 아니면 돼. 줘, 빨리!”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견이 재촉을 했다. 한참을 머뭇대던 지미가 약을 꺼내왔다.

“전에 졸음 증상 나타났던 거야. 그거 빼고 다른 이상은 없었으니까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약을 입에 넣은 견이 책상 위에 있던 생수병을 따서 반쯤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고마워, 고모. 혹시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얘기할게. 운전도 안 할 테니까 안심해.”

의자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챙긴 그가 바람같이 나가 버렸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은 지미는 눈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 여자 한 번 보고 싶네. 대체 같이 있기만 해도 호르몬이 억제되는 이유가 뭐지?”

능숙하게 돌본다는 의미를 담아 ‘Hormone-sitter’라는 호칭을 직접 붙이기까지 했지만, 실제로 견이 멀쩡하게 월경을 넘기는 것도 보았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연구실로 불러다 검사해 볼 방법이 없나? 희명그룹 직원 신체검사가 언제지? 그때 혈액검사 샘플을 얻어다가…….”

학문적 호기심과 핏줄에 대한 염려가 범죄로 이어지려는데 연구실 전화가 울렸다.

[화이트 박사님, 오전에 연구소로 보내 드린 신약 샘플 말입니다.]

“응.”

[정말 죄송합니다. 중간에 착오가 있어서 바뀌었다네요.]

“뭐?”

견이 털어먹고 간 약이 담겨 있던 상자를 돌아본 지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PMS가 아니라 HSDD(성욕감퇴장애) 치료제 샘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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