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31화 (31/86)

#31. 나는 당신이 있어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

2017.08.16.

“어, 코피 멎었네요?”

견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손 씻고 온 거…… 으헙!”

그러고는 허리가 휘청할 만큼 세게 모단을 끌어안았다.

숨이 턱 막혔다. 딱딱한 가슴에 코를 부딪히자마자 머리가 핑 돌며 눈앞에 반짝반짝 별까지 보였다.

너무 당황해서 밀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참았던 숨을 터뜨리자, 특유의 체향이 코를 타고 들어왔다.

“이것 봐요. 내가 그랬잖아요.”

뜨거운 숨과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

“나는 당신이 있어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

빈틈없이 맞닿은 몸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가 얼마나 벅차게 기뻐하고 있는지.

모든 게 너무 잘 느껴져서, 그만큼 가까워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고마워요, 정모단 씨.”

맥없이 풀어지려는 몸에 간신히 힘을 준 모단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놔요.”

“정말이었어요. 정말 안 아파. 아무렇지도 않다고!”

“놓으라고! 숨 막혀요!”

모단이 손 닿는 대로 견의 등을 팍팍 쳤다. 후다닥 팔이 풀어졌다.

“미안, 미안해요. 너무 좋아서.”

견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모단의 어깨가 크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두 뺨에서 벌컥벌컥 맥이 뛰놀았다. 제발 안 그랬으면 하지만, 분명 얼굴이 새빨개졌을 거다.

모단은 머리를 매만지는 척 고개를 숙였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네. 저 진짜 괜찮아요. 완전.”

흘깃 눈을 들자, 정말로 잠깐 사이에 몇 배는 환해진 게 보였다.

창백하고 까칠할 때도 잘생겼던 얼굴인데 안색까지 좋아지자 새삼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기껏 멀쩡해져서 한다는 말이,

“처음 치킨 먹었을 때 기억나요?”

“예?”

느닷없이 치킨이라니.

“예전에 스마트폰 없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억나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지금 와서 치킨 못 먹게 하고 스마트폰 못 쓰게 하면 아무 불편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뜩이나 몽롱한 머릿속이 더 뒤엉키려고 했다.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섬광처럼 새하얘졌다.

“삶을 달콤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맛보고 누려보면 절대 잊을 수 없죠. 그게 없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진다고요.”

견의 눈동자가 터질 듯 모단을 담았다.

“나, 이제 정모단 씨 없으면 못 살게 됐어요.”

간신히 가라앉나 싶던 심장박동이 또 치솟으며 속이 확 달아올랐다. 이러다 한 개비 성냥이 되어 장렬히 타오르고 말 것 같다.

황급히 몸을 돌린 모단은 가방을 챙겨 들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 아프다니 됐어요. 이만 가볼게요.”

“갑자기 벌써…… 그럼 같이 가요. 데려다줄게요.”

“필요 없어요. 아직 버스 안 끊겼을 거예요. 정류장도 바로 앞이고.”

“지금이 몇 신데 혼자 가려고 해요? 절대 안 돼요.”

“싫다니까요? 혼자 가고 싶어요. 따라오지 마요.”

겁이 났다.

혹시나 익숙해질까 봐.

이 달콤하고 천진한 호의를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질까 봐.

모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쫓기는 사람처럼 계단을 뛰어 내려와 걸음을 옮겼다.

혼자 서 있는데도 여전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간간이 눈앞을 어지럽히는 꽃잎이 거슬렸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버스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발을 올리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깨가 확 당겨졌다.

“기사님!”

언제 왔는지, 저를 등 뒤로 돌려세운 견이 빠끔 목을 내밀고 버스기사에게 물었다.

“이거 막차인가요?”

“예.”

“그럼 안 탈게요. 죄송합니다.”

저건 또 무슨 미친놈이야, 하는 눈으로 본 버스기사가 문을 닫았다.

모단은 멀어지는 버스 뒤꽁무니를 보며 열없이 입을 벌렸다.

“어떡해요? 막차 끊겼네.”

견의 눈매가 장난스레 휘었다.

같이 웃을 기분도, 그렇다고 화낼 기분도 아니었다.

모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한데 뒤에서 견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가지 마요.”

입술 끄트머리를 깨물며 돌아보자,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축 처진 눈망울이 기다렸다는 듯 마주쳐 왔다.

“왜 이래요?”

“왠지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이거 놔요.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내 차로 얼른 데려다준다니까요.”

굳어 있는 모단의 표정을 살피던 견이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아까 말도 없이 안아서 화난 거죠?”

“…….”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큰 덩치를 움츠리고 낑낑대며 눈치를 보는 대형견이 절로 떠올랐다. 아까 서류 보며 일하던 남자 어디 갔느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다음부터는 꼭 물어보고 안을게요.”

“물어보기만 하면 안아도 된다는 결론은 어디서 나온 거죠?”

“안 넘어가네.”

잠깐 본색을 드러냈던 견이 다시 꼬리를 내렸다.

“화내도 좋으니까 데려다주게만 해줘요.”

“몇 정류장 안 되는 데다 큰길이니까 걸어가도 돼요.”

“그래도 불안…….”

“나 화 안 났어요. 아까 안은 거,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4강 올라갔을 때 처음 보는 옆사람하고도 막 껴안고 그랬던 거랑 비슷한 거잖아요.”

“그렇죠! 격한 감격과 환희가 담긴…… 그런…….”

냉큼 동의했던 견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자백했다.

“솔직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

“시끄러워요. 아무튼 지금은 화 안 났는데, 계속 말 시키거나 따라오면 화낼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모단은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더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한 정류장쯤 걸었을까, 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말 안 시킬게요. 귀에 대고만 있어요. 통화하는 줄 알면 그나마 안전할 것 같으니까.]

모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이어져 있는 수화기 너머에서 아까 가게 안을 채우던 음악 소리가 넘어왔다. 치직대는 소음과 주변의 소리가 얼마간 섞였음에도 가사가 또렷이 귀에 박혔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이제는 많이 달라질 거야

밤하늘에 별이 이렇게 많았었나 하면서 말야

I won’t stop cause you’re my paradise

담백한 기타 반주 때문일까, 꼭 직접 불러주는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간지러운 귓가를 몇 번 긁은 모단이 견디다 못해 입을 열었다.

“저기요, 백견 씨.”

[네!]

말을 걸기만 기다리고 있었는지 쏜살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출석 부른 줄 알았다.

“노래 좀 신나는 걸로 바꿔봐요.”

특유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아…… 내가 정말.]

혼잣말과 부스럭대는 소리가 얼마간 들리나 싶더니 다른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까보다 볼륨도 커졌다.

[맘에 들어요?]

모단은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달라니까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달라니까요

허리가 끊어지도록 쇄골이 부서지도록

뒷목이 뻐근하도록 온몸이 빨개지도록

노래도 꼭 저 같은 걸 고른다고 생각한 모단은 픽 웃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귀에 익은 것 같다 했더니 전에 들어본 적 있는 노래다. 안아준다는 것도 아니고 무려 안아달라고 징징 보채다니, 듣는 것만으로도 귀찮다면서 질색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대꾸했다.

“격하게 맘에 드네요.”

***

토요일 오후, 모단은 새윤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커피숍 정기휴무인데 은규는 출근하고 해빛이랑 둘이 심심해하고 있다는 말에 놀러 온 거였다.

“이모는 여기 칠해줘. 핑크색으로. 알았지?”

해빛이와 나란히 엎드려 색칠을 도와주던 모단은 웃음을 삼켰다.

“이거 무탈이 주려고 그리는 거야?”

“응.”

눈이 무지개가 되도록 웃고 있는 왕자님과 공주님 주위에 하트가 수없이 떠 있다. 서툰 글씨로 제 이름과 무탈이 이름, 그리고 ‘사랑해’까지 써놓았다.

모단의 휴대폰이 울렸다. 무탈이 보호자로 저장해 둔 섭호의 번호였다.

“네, 위 비서님. 아…… 정말요? 어쩔 수 없죠. 너무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 뵐게요.”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해빛이를 살핀 모단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저기, 해빛아.”

“응?”

“방금 전화가 왔는데, 무탈이가 이번 달에는 어린이집에 못 올 것 같대.”

“으응?”

커다란 눈동자 가득 믿고 싶지 않다는 빛이 출렁거렸다.

“편지는 다음 달에 줘야겠다.”

“다음 달이 언젠데? 몇 밤인데?”

“음…… 서른 밤 정도?”

“서른 밤이면 이십 밤이야?”

“아니, 삼십 밤.”

들고 있던 색연필을 내려놓고 일어나 앉은 해빛이가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입을 비죽이기 시작했다.

미처 달래기도 전, 울음이 터졌다.

“싫어! 싫어어! 무탈이 보고 싶단 말이야! 오라고 해애!”

“이모도 무탈이 보고 싶긴 한데…….”

“나도 안 갈 거야! 어린이집 안 갈 거야아!”

주방에서 오렌지를 까고 있던 새윤이 빼애액 소리에 놀라 뛰어나왔다.

“해빛아. 엄마도 네가 무탈이 많이 보고 싶어 한 거 아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

“몰라! 나도 안 갈래! 으아앙!”

“아휴, 얘가 정말. 네가 울고불고 떼를 쓴다고 무탈이가 와?”

새윤이 달래보았지만 대성통곡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땀으로 축축해질 정도로 울어젖히는 통에 결국 새윤도 폭발했다.

“박해빛! 그만 뚝 하랬지! 너 정말 요새 왜 이래?”

“새윤아.”

눈짓을 한 모단이 해빛이를 번쩍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시켜주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얼마간 안아주니 훌쩍대다 잠이 들었다.

거실로 나오자 새윤이 식탁 앞에 맥주 캔을 따놓고 앉아 있었다.

“미치겠다. 이래서 미운 세 살, 미친 일곱 살이라는 말이 나온 건가 싶어. 걸핏하면 어처구니없는 걸로 떼를 쓰는데 참다 참다 결국엔 폭발한다니까. 소리 질러놓고 나서 후회하고.”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면 그게 애냐?”

“일곱 살들 다 저러니? 아니면 우리 해빛이가 유별난 거야?”

“해빛이 정도면 유별난 축에도 못 끼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진짜 대단한 거야. 저런 애들을 스무 명 넘게 어떻게 봐?”

“애들이 24시간 저러진 않잖아. 나야 그게 직업이고 퇴근하면 안 봐도 되지만 엄마는 죽을 때까지 퇴근이란 게 없으니 한 명을 봐도 엄마가 더 힘들지.”

“그치. 한 번 낳으면 죽을 때까지 퇴근이고 휴직이고 없지. 휴……. 이뻐 죽겠는데 힘들어 죽겠다. 이게 뭐니.”

새윤이 깡맥주를 들이부었다.

“요새 제대로 독박육아야. 은규는 맨날 야근에 외근에.”

모단은 새윤이 까다 만 오렌지를 마저 까서 내밀었다.

“막상 지쳐서 들어오는 거 보면 화도 못 내겠어. 과장이란 인간이 틈만 나면 쪼아대고 실적은 실적대로 다 채가나 봐. 토요일 특근이라더니 대표 딸내미 이사하는 집 청소해 주고 온다는데 속이 터져, 안 터져?”

“이런 미친. 요즘도 그런 쓰레기 같은 종자들이 있어? 주말에 사적인 일로 사원 불러다 쓰는 게 제정신이야? 그 집 식구들은 손이 없대, 발이 없대? 손발이 없으면 돈을 쓰던가. 아, 뇌가 없나?”

“누가 아니래니?”

실컷 욕을 하고 나니 새윤도 얼마간 기분이 풀어진 듯했다.

모단이 해빛이 잠든 방 쪽을 힐끔 보고는 말을 꺼냈다.

“내일 내가 해빛이 데리고 어디 놀러 갔다 올 테니까 은규랑 집에서 푹 쉬어.”

“됐어. 너도 날마다 애들 보느라 힘든데 주말까지 애 봐야겠니?”

“희명그룹 사원증 있으면 에버월드 자유이용권 반값이래서 가보고 싶었는데 혼자 갈 순 없잖아.”

지금 이 순간, 새윤의 눈에는 모단이 천사처럼 보였다.

“이번 기회에 가보지, 뭐.”

***

―내일 뭐 해요? 일요일인데.

―데이트요.

밤에 견에게 문자가 왔기에 답해줬다.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연락이 뚝 끊겼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싶었다가, 심하면 좀 어떤가 싶어 내버려 뒀는데……

“같이 가요, 나도.”

아침에 나오니 집 앞에 떡하니 서 있다.

모단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혜숙이 등산 간다며 새벽에 나갔기에 망정이지, 엄마에게 걸리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단 말인가.

“누구랑 어디 가는 줄 알고 같이 가재요?”

“그거야 가서 보면 되죠.”

모단은 부러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알아서 하세요. 대신 절대 방해하지 마시고요.”

“가서 보고 결정할 거예요. 날씨도 화창한 게 남의 데이트 훼방 놓기 딱 좋은 날씨네.”

오지 말란다고 안 오고, 하지 말란다고 안 하면 백견이 아니겠지.

등 뒤에 장신의 껌딱지를 매단 모단은 얼마 멀지 않은 새윤네 집으로 향했다.

새윤의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 선 순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뚜벅뚜벅 따라오던 걸음이 빨라지나 싶더니 어깨가 덥석 붙들렸다.

“잠깐! 집은 아니지! 집에서 데이트하는 건 끝판왕이잖아요! 여기 누구네 집인데요? 이거 실화에요?”

“끝판왕은 또 뭐래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무슨 생각 하기는! 뻔한 생각 하죠! 주말에 집에서 뒹굴뒹굴하면서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낮잠도…… 아, 이거 내 거라고! 절대 안 돼요!”

“내 거는 무슨. 망상은 일기장에 쓰시고 헛소리는 덜 정성껏 하세요.”

세상 한심하다는 눈으로 본 모단이 새윤의 집 호수를 누르고 인터폰을 눌렀다.

“나야. 해빛이 준비 다 됐으면 내려와.”

더 난동을 부릴 기세이던 견이 멈칫했다.

“해빛이? 오늘 데이트한다는 게 해빛이었어요?”

“백견 씨가 해빛이를 어떻게 알아요?”

견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야…… 박은규 씨 딸 아니에요? 예전에 같이 일해서 이름 많이 들었거든요. 특이하고 예쁜 이름이라 기억에 남아서.”

다행히 모단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은규가 우연히 견을 만나 저와 친구라는 말을 했다는 것도 들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빨리 도망치세요.”

“도망치라고요?”

“지금 박은규 씨 아내 되시는 분이 해빛이 데리고 내려올 건데, 걔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백견 씨거든요.”

“나를요? 대체 왜, 아…….”

금방 이유를 파악해 낸 견이 입을 다물었다.

내심 미안해진 모단이 어깨를 슬쩍 밀었다.

“그러니까 얼른 가세요. 더 끼어들면 데이트 방해가 아니라 동심 파괴예요. 그건 가만 안 둬요.”

“알았어요.”

견이 순순히 자리를 뜨자마자 새윤과 해빛이 내려왔다.

“이모!”

“일요일이라 에버월드 사람 많을 텐데. 괜찮겠어?”

“괜찮아. 걱정 말고 푹 쉬어. 거기서 출발할 때 전화할게.”

“이모, 나 에버월드 가면 이만한 리본 머리띠 사고 싶어. 전에 초은이가 어린이집에 하고 왔던 거 말이야.”

“알았어. 그것도 사고 풍선도 사고 다 사자.”

“와아! 이모 최고!”

모단은 잔뜩 신난 해빛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힐끔 둘러보았으나 더 이상 따라오는 것 같지 않았다.

‘데이트 아닌 거 알자마자 갔구만. 이럴 때 보면 또 의외로 순순하다니까.’

표를 끊고 에버월드에 입장하자마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모단은 아까 백견이 순순하다고 생각했던 스스로를 매우 치고 싶어졌다.

“어, 정모단 씨. 어떻게 여기서 만나죠?”

자유이용권 팔찌를 찬 손으로 턱을 받치고 서 있던 견이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옆에는 섭호와 금지까지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모단을 대신해 해빛이 방방 뛰었다.

“키 큰 아저씨! 무탈이네 형! 안녕하세요!”

금지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견을 쿡 찔렀다.

“무탈이네 형이라니, 무탈이가 누군데?”

“할아버지 아시는 분 아들. 희명사내어린이집에 들어갔는데 사정이 있어서 섭호가 며칠 데려다줬어.”

“아.”

견이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둘러대는 사이, 섭호가 몸을 낮추고 해빛이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해빛아. 오랜만에 보네. 잘 지냈어?”

“네. 무탈이도 잘 있나요?”

“그럼. 해빛이 보고 싶다고 하던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섭호의 뒷모습을 넋 놓고 보던 금지가 휘청했다.

“애한테 다정한 남자 완전, 완전, 완전 취향이야! 오빠, 섭호 오빠 나중에 좋은 아빠 될 것 같지? 자기 애한테도 저렇게 다정할 거야, 분명.”

“그 애가 네 애이기도 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

부푼 꿈을 냉정하게 박살 낸 견이 눈을 흘겼다.

“왜 하필 오늘 한국에 와 가지고 여기까지 따라와?”

“내 맘이지. 그다음 비행기 탔으면 늦을 뻔했지 뭐야. 공항에서 바로 택시 타고 오빠네 집 앞으로 가니까 마침 오빠 혼자서 딱 외출하고 있잖아. 어찌나 뿌듯하던지.”

“그래서 집에 혼자 있는 섭호 어떻게 해보려고 그 난리를 쳤냐?”

“전화도 안 받고 문도 안 열어주니까 그랬지.”

섭호가 해빛이와 인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린 모단이 어금니 꽉 깨물고 목소리를 깔았다.

“위 비서님.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죄송하지만 저도 당했습니다. 도련님이 급하게 갈 데가 있다고 부르셔서 나왔는데…….”

“황금지 씨는 또 뭐고요?”

“저도 해외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아까 도련님이 외출하시자마자 저희 집 대문 걷어차서 경보장치 작동시키기 전까지는요.”

진심 극한직업이다. 이 정도 근무환경이면 대체 연봉을 얼마나 받아야 하는 건가.

금지가 냉큼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언니! 예정에도 없던 더블데이트를 다 하게 되네요.”

생긋 웃은 금지가 섭호의 팔짱을 꼈다. 섭호가 빛의 속도로 팔을 뺐다.

대강 알겠다는 표정을 한 모단이 고개를 까닥했다.

“더블데이트 좋죠.”

데이트라는 말에 이미 두근두근해하고 있던 견은, 모단이 순순히 수긍까지 하자 얼굴을 확 붉혔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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