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22화 (22/86)

#22. 내가 포르쉐인데 벤츠가 왜 필요해?

2017.07.16.

“근데 이게 무슨 글자야? 박, 아니, 벅…… 벅겨?”

새윤의 눈이 희번덕 뒤집히고, 은규의 턱이 땅까지 떨어졌다.

“벗겨? 뭘 벗겨?”

“나만 그렇게 들은 거 아니지?”

“정모단, 너 요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그렇게 외로웠어?”

모단이 억울함에 입만 벙긋거렸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한글을 전혀 몰랐던 해빛인데, 요즘 들어 떠듬떠듬 읽게 된 게 화근이었다.

‘이 녀석, 까막눈일 때가 좋았는데!’

누명도 벗을 겸 직업병을 발동시킨 모단이 해빛 쪽으로 바짝 몸을 기울였다.

“해빛아. 다시 봐봐. 박해빛 할 때 박 자에다가 작대기 하나 더 붙으면 뭐야? 벅이 아니라…….”

“으음…… 백?”

“그렇지. 백설공주 할 때 백이지. 그럼 이건? 겨에다가 받침이 붙었잖아. 그럼 겨가 아니라 견이라고 읽어야지.”

“아하. 견! 견우직녀 할 때 견!”

“그렇지! 그러니까 이건 벅겨가 아니라…….”

그제야 누명 벗으려다 무덤을 팠음을 깨달은 모단이 혀를 깨물었다.

이번에는 새윤의 턱이 떨어지고 은규의 눈이 뒤집혔다.

“백견?”

“백겨언?”

사사삭 눈동자를 굴린 모단은 옆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간발의 차로 새윤이 먼저 낚아챘다.

“어딜. 너 나랑 얘기 좀 해. 인질은 의혹이 해소된 후에 돌려주겠어.”

“해빛아, 아빠하고 편의점 갔다 올까? 아이스크림 사줄게.”

“우와아!”

“우리 해빛이 글자도 자알 읽고. 아유, 기특해.”

부부가 손발이 착착 맞았다. 순식간에 커피숍 안에 새윤과 단둘이 남게 된 모단은 마른침을 삼켰다.

‘우이 씨, 오늘따라 손님도 없네!’

지금만큼은 새윤이 엄마 뺨치게 무서웠다. 원래 모단의 남자 문제에 대해서는 혜숙보다 더 깐깐하게 구는 새윤이었다.

“그래서 백견한테 뭐가 온 건데?”

“백견? 웬 백견?”

“네가 방금 한 글자씩 정성껏 알려줬잖아! 백설공주 백견이라고!”

“백설공주는 무슨. 얼굴 하얗고 머리 검으면 다 백설공주냐?”

“얼씨구?”

필사적으로 눈을 안 마주치는데도 새윤의 이글대는 시선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그 백견 맞아? 우리 은규가 있으나마나 한 일개 사원으로 썩느니 전투적으로 능력 발휘를 해보겠다고 큰맘 먹고 부서 옮겼는데 통째로 날아갈 뻔해서 석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게 만든 그 백견?”

“그래. 너도 은규도 마음고생 참 많이 했지.”

“아련한 척 말 돌리지 말고! 뭔데? 백견이랑 사적으로 연락 주고받는 사이야?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그게…….”

그냥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사이라고 하면 누가 들어도 이상하지.

어쩌다 보니 인간 치료약 혹은 인간 부적이 된 것 같다고 하면 더 이상하고.

모단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사실은 전에 회사 앞에서 아주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뭐? 사고? 교통사고?!”

“응. 운전자가 백견이었더라고. 그냥 가면 뺑소니가 되니까 일단 번호를 받았고…… 일 처리하는 과정에서 연락 몇 번 한 거야.”

뭉텅뭉텅 다 잘라낸 대답을 들은 새윤이 벌컥 외쳤다.

“이런 미친! 백견 그 자식이 널 차로 밀어버리려고 했단 말이야?”

“사이코패스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밀어버리게? 그런 거 아니야. 말 그대로 우연이고 사고였어.”

“사이코패스인지 뭔지는 몰라도 사이코는 맞잖아! 맞다, 설마!”

새윤이 한 손으로 테이블을 탕 내려쳤다.

“혹시 전에 피 묻히고 왔던 날, 그날이야?”

“어? 어……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그 지경이 됐는데 병원도 안 데려가고 제대로 합의도 안 해준 거야? 근데 왜 가만있었어! 어린이집에서 자른다고 협박이라도 하디?”

“차에 닿지도 않았다! 그거랑은 상관없고, 받을 거 다 받았어. 지가 먼저 나서서 챙겨주더라.”

워워, 손짓한 모단이 심호흡을 유도했다. 그녀를 따라 들숨날숨을 반복한 새윤이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뭘 얼마나 챙겨줬는데?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인간일 텐데 걸린 김에 한몫 단단히 잡지.”

“한몫은 무슨. 안 받고 안 보는 게 더 낫겠더라. 어휴…….”

“잠깐, 방금 그 한숨에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설마 사고 핑계로 뻔한 수작이라도 부리디?”

새윤의 촉이 파박 꽂혔다.

“그 자식, 미인점 페티쉬 있는 변태라고 하지 않았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뻔한 수작을 부린 것도 맞는 데다, 제가 나서서 변태 아니라고 변호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은 코에 점 있는 여자에게 집착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더라고 말해줄 수도 없고, 만에 하나……

진짜 변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어쩌다 보니 묵비권을 행사하게 됐다. 단단히 오해한 새윤이 모단의 코를 확 꼬집었다.

“아야!”

“이놈의 점, 빼버려.”

눈물까지 글썽해진 모단이 코를 문질렀다. 수술한 코였으면 점이 아니라 실리콘까지 빠질 뻔했다.

“백견은 안 돼.”

새윤은 더없이 진지했다.

“내 꿈이 너 결혼해도 지금처럼 지내는 거란 말이야. 남편 생기고 애들 생기고 시댁 생겼다고 멀어지는 거 싫어. 애들 데리고 가족여행도 가고, 애들 다 크면 부부끼리 해외도 갈 건데 그걸 백견이랑 어떻게 하니?”

“설레발이 삼팔선 뚫고 평양까지 가셨거든요? 내가 누구랑 결혼을 해? 내가 그런 남자 만나려고 30년을 악착같이 산 줄 알아?”

그제야 새윤의 눈에 신뢰의 빛이 슬그머니 되돌아왔다.

“그치. 우리 정모단이 고작 그런 놈에게 놀아나려고 똥차 몇 대 떠나보낸 건 아니지.”

“똥차고 벤츠고 다 필요 없어. 내가 포르쉐인데 벤츠가 왜 필요해?”

“멋있다, 내 친구.”

빨개진 코끝을 두어 번 문지른 포르쉐 정이 정색을 했다.

“너 하나 결혼 잘했으면 됐지 뭐 하러 나까지 가? 언니가 돈 많이 벌어놓을 테니까 너는 해빛이나 잘 키워놔. 나중에 은규한테 애 맡기고 둘이서 크루즈 여행 가게.”

“그거 괜찮다.”

은근슬쩍 훈훈한 결론을 낸 모단은 새윤이 방심한 틈을 타 얼른 가방을 되찾고 일어섰다.

“그럼 나 이만 간다.”

“어, 잠깐만! 그래서 조금 전에 온 문자는 뭔데!”

“나도 몰라!”

잽싸게 탈출한 모단은 긴 숨을 내쉬고는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어쩌자고 그 타이밍에 문자를 보내서는! 별거 아니면 가만 안 두……!’

가만 안 두겠다고 이를 갈려는 찰나에 떠올라 버렸다. 가만 놔두는 것보다 가만 안 놔두는 걸 더 좋아한다던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고 가만두기로 맘을 바꿔 먹었다.

그가 보낸 문자는 웬 뉴스기사 링크였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클럽에서 만난 여성에게 약을 탄 술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뒤 모텔에 데려가 성폭행을 하고 금품을 훔친 혐의로 김모(24) 씨 등 4명을 구속하고 공범을 조사 중…….

그 아래 짤막한 내용이 덧붙었다.

―늦게까지 술 마시고 놀지 마요. 다른 남자 절대 만나지 말구요. 세상은 위험하니까.

모단이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

“이 자식은 평양을 넘어 몽골까지 앞서 가네. 이 문자 걸렸으면 꼼짝없이 뭐라도 되는 사이인 줄 알았을 거 아니야!”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은 그녀가 손마디를 두둑 꺾었다.

“조만간 내가 더 위험하다는 걸 똑똑히 알려주고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들어줘야겠어.”

***

다음 날, 모단은 효림의 차를 얻어 타고 서울을 벗어났다.

차로 30분쯤 달리자 신기할 만큼 한가한 농촌 풍경이 펼쳐졌다. 날씨까지 화창해 오랜만에 보는 초록빛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잠시나마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여야 한다는 긴장도 잊었다.

“걱정 마요, 모단 쌤. 다들 성격 좋아서 금방 편해질 거예요.”

오늘 자원봉사 동호회에서 하는 일은, 희명그룹 계열사와 1사1촌을 맺은 동네의 마을회관 벽과 골목을 벽화로 꾸며주는 거였다.

“안녕하세요!”

“어, 왔어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수성페인트며 아크릴물감, 붓 등을 내려두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모단도 효림을 따라 연신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신입이네. 반가워요.”

“잘 부탁드립니다.”

회사 안에서는 정장 입은 사람들만 봤는데 오늘은 다들 편안한 사복을 입고 있어 더욱 어색했다.

그중 가장 낯설어 보이는 이가 지협이었다.

‘저렇게 입으니까 사람이 덜 딱딱해 보이네.’

깔끔한 티셔츠 하나를 걸쳤을 뿐인데도 눈에 확 띄는 건 슈트를 갖춰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긴 했다. 그래도 확실히 힘이 덜 들어가 보였다.

여직원들이 그를 보기 위해 자원봉사 동호회에 들었다는 말이 나올 법도 했다.

마침 눈이 마주쳤다. 모단은 고개를 숙였고, 지협은 묵례로 답했다.

효림의 말처럼, 동호회 사람들은 다들 싹싹하고 밝아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림 그리는 건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최소한 방해가 되진 않은 것 같았다.

“사내어린이집에 새로 오신 선생님이시죠?”

“네.”

아까부터 이것저것 챙겨주던 남자 직원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옥상으로 아이들 데리고 산책 가실 때 몇 번 뵀거든요.”

“그래요?”

“재무팀 한성진이라고 합니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앞으로 친하게…….”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성진 씨! 이것 좀 같이 들까요?”

어르신들을 위해 사온 과일과 음료수 박스를 차에서 꺼내던 지협이었다.

“네, 이사님!”

쏜살같이 대답한 남자가 얼른 뛰어갔다.

모단은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벽화는 처음인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물감 냄새도, 오랜만에 제대로 잡은 붓의 느낌도 좋았다.

“와, 멋있네요. 역시 어린이집 선생님이시라 손재주가 좋으신가 봐요.”

다른 남자 직원이 말을 걸었다. 모단은 머쓱하게 웃었다.

“저 선생님 가까이서 뵌 적 있는데. 얼마 전에 회사에서 변태 사건 있어서 홍보팀이랑 같이 엘리베이터 타신 적 있으시죠? 그때 저도 있었어요.”

“아! 홍보팀이세요?”

“네. 유영훈이라고 합니다.”

그날 백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나와 별 난리를 다 쳤던 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주사를 들킨 듯한 민망함에 얼굴이 홧홧했다.

“제가 그때 너무 경황이 없어서.”

“당연히 놀라셨겠죠. 그 이후로는 별일 없으셨죠? 출퇴근은 혼자 하세요?”

“정모단 씨.”

언제 왔는지, 옆에 지협이 서 있었다.

“저쪽에 커피 사다 뒀으니까 가서 좀 쉬시죠. 영훈 씨도요.”

영훈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지협은 모단이 붓을 내려놓을 때까지 얼마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사님은 안 쉬세요?”

“네.”

쉬겠다는 건지 안 쉬겠다는 건지,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모단은 지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봐버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수려한 미간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치는 것을.

모단은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클럽패션 아니고 누가 봐도 자원봉사 하러 온 사람인데. 뭐가 또 거슬리나?’

뭐 문제 있느냐고 물으려는데, 지협이 먼저 말했다.

“머리카락에 물감이 묻었네요.”

“엇, 정말요?”

그 말만 던져 놓고 지협은 몸을 돌렸다.

급히 머리를 매만진 모단이 머리카락 끝에 살짝 묻은 물감을 손으로 대강 닦고 앞치마에 쓱 문질렀다.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는 뒷모습을 힐끗 본 그녀는 입을 비죽했다.

‘이상하게 신경 쓰이게 하는 인간이네.’

마을회관에서 푸짐한 점심까지 얻어먹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일이 끝났다.

“저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같은 방향으로 가는 차 알아봐 드릴게요.”

효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진이 다가왔다.

“저희 집이 그쪽 근처예요. 제 차 같이…….”

그러자 영훈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성진 씨 집은 정반대잖아요. 저 딱 그쪽으로 가니까 제 차 타십시오.”

“영훈 씨도 중간에 빠지잖아요. 거기까지 가면 한참 돌아가는 건데요?”

팽팽한 두 남자를 지켜보던 효림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괜스레 민망해진 모단이 손을 내저었다.

“두 분 다 괜찮아요. 효림 쌤, 저 그냥 같이 가다가 적당한 데서 내려주면…….”

옆을 지나가던 지협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오늘 그 근처에서 볼일이 있습니다. 제 차 타시면 되겠네요.”

“어머.”

효림의 두 눈 가득 부럽다는 빛이 번졌다. 내가 왜 차를 가지고 왔을까, 어째서 약속 따위를 잡았을까, 땅을 치고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협이 태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 분은 더 탈 수 있는데. 그쪽 방향이신 분들 다 같이 가죠.”

순식간에 일행이 꾸려졌다.

나이도 직책도 가장 높은 홍보팀 과장이 조수석에 앉고 나머지 셋은 뒤에 앉았다. 맨 마지막에 내리는 모단이 가장 안쪽에 자리했다.

분명 같은 거리인데, 올 때보다 갈 때가 훨씬 더 시간이 빨리 가는 듯했다.

다들 차에서 내리고 어느새 뒷좌석에 모단만 남았다.

‘은근히 이 차 자주 타네.’

시트는 참 편한데, 공기는 불편했다.

딱히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 창밖만 보고 있는데, 지협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 보니까 그림 솜씨가 좋으시던데. 혹시 미술 하셨나요?”

“어렸을 때 조금요. 집안 형편 때문에 전공은 못 했고요. 흔한 얘기죠.”

“어쩐지, 취미보다는 훨씬 더 수준급으로 보였습니다.”

“에이, 지금은 취미로도 자주 못 그리는데요. 근데 그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어쩌다 보니 많이 보게 돼서요. 그리지는 못하지만 보는 건 좋아합니다.”

대화가 오가자 조금씩 분위기가 풀어졌다.

“견이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셨다고. 감사합니다.”

“별거 아닌 거 가지고 감사까지 받기엔…… 아, 병이 별거 아니라는 게 아니라, 제가 그렇게 큰 도움을 주는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도움이에요. 그 병 때문에 견이가 잃어버린 것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거니까요.”

‘그렇게 말하면 너무 부담스러운데…….’

모단은 울상이 되었다.

역시나 얽히는 게 아니었는데. 급작스런 후회가 밀려왔다.

“저희 가족과 견이 비서인 섭호까지만 아는 병입니다. 물론 그러실 분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노파심에 한 번 더 당부드립니다.”

모단이 먼저 답했다.

“제 입에서 다른 데로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차피 말해봤자 아무나 쉽게 믿을 만한 얘기도 아닌 것 같구요.”

“진실 여부나 신뢰도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좋아하니까요.”

사촌인데도 참 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백견과는 달리, 지협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냉소적이었다.

“말씀하셨듯 아무나 쉽게 믿을 만한 얘기는 아닌데. 정모단 씨는 원래 사람을 쉽게 믿는 편입니까?”

‘이 인간, 백견하고는 다른 스타일로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는데?’

왠지 얄미워진 모단이 톡 쏘았다.

“아니요. 저 사람 잘 안 믿어요. 특히 눈 밑에 점이 있는 사람은.”

지협은 웃지도 않고 되물었다.

“징크스나 트라우마 같은 건가 보죠?”

“네. 살면서 눈 밑에 점이 있는 사람을 몇 명 만났는데, 꼭 제 눈에서 눈물을 짜게 만들더라고요.”

뱉어놓고 바로 후회했다. 욱해서 괜한 얘기까지 해버렸다 싶다.

얼마간의 침묵 후, 덤덤한 대꾸가 넘어왔다.

“비논리적이네요.”

‘역시 얄미워!’

“근데 비논리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게 잘 안 고쳐지더군요.”

또다시 운전석 뒤를 걷어차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던 모단이 멈칫했다.

“저도 한동안 물감 냄새를 싫어했던 적이 있어서 이해합니다.”

모단은 얌전히 입을 닫았다. 척 하면 딱인 거다.

‘미술 하는 여자랑 만났던 적이 있나 보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직접 그림을 그리진 않았던 것 같아. 뒤에서 열심히 도와주기만 했지.’

“견이는 믿으셔도 좋습니다.”

아까 물감이 묻었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던 모단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요즘 세상에 드물잖아요. 그렇게 계산 없이 자기 카드 다 내보이는 사람.”

“그 카드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죠. 잘하면 사람 하나 살리는 거겠지만 아닐 경우 호구가 될 각오쯤은 하고 있어요.”

“하하하.”

낮은 웃음소리 뒤로 씁쓸한 한마디가 따라붙었다.

“저도 다 가짜였으면 좋겠네요.”

다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지협은 모단의 집을 정확히 기억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깍듯이 인사한 모단이 문을 열고 내리는데, 지협이 따라 내렸다.

“바로 가시면 되는데 왜 내리시기까지……?”

지협은 대답 대신 불쑥 다가들었다. 당황한 모단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대로 그녀를 지나친 그가 바로 뒤에 세워져 있는 차로 향했다.

“지금 뭐 하시는…….”

지협의 손이 운전석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차 문이 열리고, 어디서 많이 본 긴 다리가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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