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19화 (19/86)

#19. 어쩐지 끌리더라

2017.07.05.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할 땐 어떻게 해야 돼요?”

펠트지 왕관에 장식을 붙이던 모단이 손을 멈췄다.

‘그냥 묻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가볍게 대답할 일이 아니라는 촉이 왔다.

모단은 뜨거운 글루건을 견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밀어두고 마주 보았다.

“무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무탈이를 싫어한다고?”

“네. 제가 좀…… 많이 쫓아다녔거든요. 그냥 좋아서 그런 건데…… 저만 보면 막 화를 내요.”

잔뜩 처져 있는 아이의 눈꼬리를 보는 순간, 모단의 가슴도 내려앉았다.

아이의 말 몇 마디만 듣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건 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스치듯 흘린 말들을 떠올려 보면,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줄곧 혼자 있는다고 했던 것, 아이치고는 눈치가 너무 빨라 보이던 것, 별거 아닌 스킨십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그럼에도 거부하지는 않던 것 등등.

‘만약 방금 들은 게 부모 이야기라면?’

무탈이는 부모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 이야기를 할 때가 훨씬 자연스러웠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만이 학대가 아니다. 유기나 방임 같은 정서적 학대도 분명 학대다.

남들 눈에 띄지도 않고 약을 발라줄 수도 없는 상처를 남기는 무서운 학대.

‘무탈아, 혹시 너도 그런 말 듣고 있는 거야?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하느냐고, 저리 가 있으라고, 눈에 띄지 말라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머리카락 아래 식은땀이 배어났다.

모단은 최대한 표정을 온화하게 가라앉히고 물었다.

“혹시 누군지 선생님한테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어른인지, 아니면 친구인지라도.”

가위질을 멈춘 견이 모단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좋아하는 여자요.”

‘와아이씨!’

왕관을 쥔 모단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놀랐잖아, 자식아! 아동학대인 줄 알았다고!’

다행인데, 정말이지 천만다행인데 어쩐지 열이 받았다.

모단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것도 보통 7세가 할 고민은 아니긴 하다.

“무탈이는 너무 좋아서 같이 있고 싶었던 건데 그 여자애가 화를 냈다고?”

“애는 아니구요. 저보다 나이가 많아요.”

‘게다가 연상녀냐…….’

모단의 상식으로는 얘보다 나이가 많아봤자 초등학생이었다. 무탈이 입장에선 애가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커봤자 애는 애니 귀찮아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귀찮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야, 미안해, 하고 솔직하게 얘기해 주면 어떨까?”

“사과는 몇 번 했는데요, 안 받아줘요.”

‘무탈이 하는 거 보면 눈치가 없진 않은데. 여자애가 성질이 유별난가?’

방금 제 입으로 저를 저격한 줄도 모르고, 모단은 진지하게 고민해 주었다.

“말로 하기 힘들면 편지를 써보면 어때? 무탈이는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쓰니까.”

“편지요?”

“응. 정성껏 쓴 편지를 받으면 마음이 풀릴지도 모르거든.”

“여자들은 손편지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나요?”

모단의 눈이 커졌다. 견의 눈은 더 커졌다.

“아니, 그게! 섭호 형이 그랬거든요. 옛날 여자친구한테 손편지 써줬는데 싫어하고 백만 원짜리 가방 사줬더니 좋아했다고.”

커졌던 모단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애한테 뭔 얘기를 한 거냐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섭호야.’

견이 남몰래 사죄하는 사이, 모단은 차분하게 대답을 골랐다.

“손편지보다 가방을 더 좋아하는 여자도 있고 아닌 여자도 있어. 바다반에도 블록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고, 음악보다 체육을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듯이. 그 여자친구도 원래는 둘 다 좋아하는데 그때는 가방이 더 필요했을 수도 있지.”

“선생님은요?”

‘가방 안에 손편지 넣어주면 아주 칭찬할 것 같은데.’

모단은 해서는 안 될 농담을 미소 뒤로 삼켰다.

“가방은 선생님 돈으로도 살 수 있지만 진심은 그럴 수 없으니까 손편지가 좋겠다.”

“진심이 뭔데요?”

일부러 아이처럼 물어보았다. 그녀가 뭐라고 설명해 줄지 궁금해서.

“진짜 마음. 거짓말하지 않는 마음.”

“진짜 마음이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요. 진짜 마음이 너무 무겁거나 안 예쁘면 살짝 꾸미거나 감추고 싶어질 수도 있지 않나요?”

모단은 감탄 어린 눈으로 견을 바라보았다.

쿵, 하고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그러네. 그럴 수도 있겠다.”

아이의 말이 맞다. 지나치면 거짓이 되겠지만, 어느 정도 꾸미고 감추는 건 그만큼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일지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스멀스멀 어두운 생각이 번졌다.

하지만, 귀찮고 싫은 게 진심이라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조차 뭉개 버릴 만큼 잔혹한 진심이라면?

‘아무리 애써도 날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선 얼른 벗어나는 게 상책이야. 자칫하면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절망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모단은 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딱 한 번만 더 얘기해 보고, 그래도 누나가 안 받아주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절대로 무탈이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네.”

견은 얌전히 저를 내맡겼다.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는 게 이렇게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인 줄 몰랐다.

철들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제 머리에 손을 얹게 내버려 둔 적이 없었기에 잊고 있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고마워요, 선생님.”

“그래. 그 누나가 무탈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요.”

흘리듯 전한 말을 듣지 못한 모단이 책상 아래 놓아둔 바구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누나에게 편지 쓰기 전에 이거 먼저 쓸까?”

“이게 뭔데요?”

“오늘이 엄마 아빠가 무탈이를 낳아주신 날이잖아.”

예쁜 종이 카네이션이 붙은 카드였다.

“여기다가 고맙습니다, 하고 써서 드리는 거야.”

견은 가만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렇지. 서류상으로 난 엄마 아빠가 있는 아이지.’

짧게 고민한 그가 카드를 받아 들었다.

“할아버지한테 쓸래요.”

“응? 엄마 아빠 말고 할아버지?”

“네. 그냥 그러고 싶어요.”

어린이집에 있으면서 아이들이 부럽다고 느낀 것 중 하나는, 앞뒤 안 맞는 말이며 행동을 해도 넘어가 준다는 거였다.

어른이 되면 ‘그냥 그러고 싶어서’라는 말은 좀처럼 못 하게 된다.

설령 그게 진짜더라도, 남들이 납득할 만한 적당한 이유를 내세우는 쪽이 괜한 오지랖과 구설을 피할 수 있어 더 편하므로.

“집에 가서 쓸게요.”

카드를 챙기는 견을 보며 모단은 내심 아, 했다.

‘친구더러 가끔씩 애기라고 부르는 것부터 요즘 애들, 요즘 장난감, 요즘 책처럼 어른 말투를 썼던 게 할아버지와 가까워서 그런 거였나 보구나.’

남은 장식 몇 개를 마저 붙인 모단이 펠트지 왕관을 짠, 하고 내밀었다.

“자, 다 됐다! 무탈이가 1등으로 써보자.”

“이걸 정말 써야 하나요?”

“왜? 마음에 안 들어? 너무 귀여울 것 같은데.”

모단의 눈매가 슬그머니 처졌다. 갈색 눈동자가 기대로 반짝반짝했다.

이런 눈빛까지 할 줄 아는 건 반칙 아니냐는 말이 혀끝까지 치밀었다. 저절로 손끝 발끝이 흐물흐물해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 마음 약해지게…….’

한숨을 포옥 내쉰 견은 왕관을 받아 머리에 썼다.

환히 웃은 모단은 사탕 목걸이도 가져와 목에 걸어주었다.

“어쩜. 너무 귀엽다.”

견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저 눈빛이라니.

백무탈보다 백견에게 주었으면 몇 배는 고맙게 받고 더한 걸로 돌려주었을 거다.

‘그래. 저렇게 웃는 얼굴 보는 값으로 이 정도는 뭐. 백견이 쓴 것도 아닌데.’

스물아홉의 자아 따위 깔끔하게 내려놓은 견은 조금 더 진심을 담아 웃어주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 모단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져오는 걸 보고는 사색이 되었다.

“사, 사진까지 찍으시게요?”

“왜? 사진 찍는 거 싫어하니?”

‘증거는 남기면 안 되는데! 이거 섭호가 보면 300년은 놀릴 텐데! 그렇다고 실망시킬 수도 없고. 어떡하지?’

이대로 튈까 하는 찰나,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럼 선생님하고 같이 찍으면 안 돼요?”

“그럴까?”

선선히 수긍한 모단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팔로 작은 어깨를 감싸 안고 얼굴을 바짝 붙이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손을 최대한 앞으로 쭉 뻗었다.

“여기 봐봐. 하나 둘 셋.”

찰칵.

다정한 순간을 고스란히 품은 인화지가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왔다.

견은 모단의 손에 들린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선생님, 이 사진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거죠?”

“그렇지.”

“제가 가져도 돼요?”

“그럼.”

사진을 받아 든 견이 미소를 지었다.

“생일선물 고마워요. 선생님하고 같이 있던 것 자체가 선물이었어요.”

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인사한 견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5시 59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 곧, 헤어질 시간.

‘당신 잡을 거니까. 그래서 월경 같은 거 다신 안 할 거니까, 이제 오지 않을 거니까.’

견이 왕관과 사탕 목걸이를 조심스레 벗어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 순간, 모단은 이상하게도 눈앞의 아이가 까마득하게 커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또 봐요, 선생님.”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견은 눈앞으로 손을 올려보았다.

크고 길쭉한 어른의 손.

익숙한 안도감과 낯선 아쉬움이 한데 들었다.

긴 손가락을 몇 번 오므렸다 편 후에 그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어제 잠들기 전까지 보았던 사진을 집어 들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모단과, 뺨이 닿을 듯 말 듯 붙어 조금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작은 꼬마.

견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모단 쪽이 살짝 잘린 게 영 아쉬웠다. 차라리 제가 덜 나오고 모단이 다 나왔으면 좋았을 것을.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해 넘어갈 때까지 잘 셈이유?”

“그냥 일어나라고 해.”

일어나 앉은 견이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넘겼다. 섭호가 마저 말을 전했다.

“회장님께서 생일도 못 챙긴 게 맴에 걸리신다구, 월경 끝나는 대루 밥 한 끼 먹자구 하셔서 오늘 점심 약속을 잡았구먼유.”

“알았어.”

“알았으믄 씻구 준비하셔유.”

섭호가 나가고, 견은 바로 욕실로 향했다.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거울 앞에 서서 얼굴부터 찬찬히 살폈다.

이마 한가운데에 솟았던 왕뾰루지를 비롯, 자잘한 트러블들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여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얼마간 커졌던 가슴도 다시 판판해졌다. 살찐 것도 근육이 올라온 것도 아닌 애매한 느낌으로 커지는 데다 잘못 건드리면 아프기까지 해서 매번 짜증스러웠다.

평소에는 안 하는 군것질을 하는 바람에 볼록 나와 말랑말랑하니 잡히던 배도 쏙 들어갔다.

비로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탄탄한 몸매로 되돌아온 것을 확인한 견의 입에서 누가 들을까 겁나는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아아, 내 몸 너무 좋아……!”

대체 눈에 보이지도 않는 호르몬이라는 게 뭐기에, 사람을 순식간에 망가뜨렸다가 되돌려놓았다가 하는 걸까.

몸도 마음도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하고 홀가분했다.

월경 직전에는 폭파시켜 버리고 싶던 세상이 마냥 아름다워 보였다. 물론 다음 달에 또 겪겠지만, 지금만큼은 너그러운 기분이었다.

정성껏 샤워하고 나온 견은 고모에게 전화를 했다.

“고모, 나 월경 끝났어. 그래서 오늘…….”

[그래, 좋겠다. 난 할 때 돼서 기분 더러우니까 끊어.]

그 말만 남기고 뚝 끊어졌다. 할아버지와 식사하는 자리에 고모도 나오느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상태를 보아하니 안 나올 것 같았다.

비로소 제 옷다운 옷을 꺼내 입은 견은 카네이션 카드와 웬 봉투 하나, 그리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한옥 처마와 마루, 단아한 정원이 내다보이는 고풍스러운 한식당 안에 앉아 있던 백희명 회장이 견을 맞았다.

“어린이집에 갔었다면서? 뭐 힘든 건 없었고?”

“나쁘지 않았어요.”

맞은편에 섭호와 나란히 앉은 견이 재킷 단추를 풀며 대답했다.

“원장님도 선생님들도 나무랄 데 없고, 프로그램도 잘 운영되고 있고요. 시설이나 식단을 봐도 지원금이나 원비가 제대로 잘 쓰이고 있는 걸로 보였어요.”

“그거 다행이구나.”

“아 참. 이거 받으세요, 할아버지.”

견이 카네이션 카드를 공손히 내밀었다.

“이게 뭐냐?”

견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백 회장이 카드를 열어보았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이드 인 어린이집스러운 겉모양과는 달리, 안에는 정갈한 어른의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받았어요. 생일이니까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거라고. 이런 거 보면 확실히 어릴 때 배운 대로만 살면 인간이 기본은 하겠구나 싶어요. 좀만 커도 지 생일날 친구랑 놀 생각밖에 안 하는데. 그쵸?”

백 회장이 허허 웃었다.

“그래, 그렇지. 고맙다, 견아.”

눈가가 촉촉해진 그는, 20여 년쯤 전에도 이처럼 아기자기한 종이 카네이션을 건네던 어린 손주를 떠올렸다.

할아버지 것도 만들려고 선생님한테 색종이 세 개 달라고 했다며 환히 웃던 얼굴이.

손주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며 맘을 흐뭇하게 해주었던 아들과 며느리의 단란한 웃음도.

“나이를 먹어 그런가, 걸핏하면 옛날 생각이 나.”

두텁게 주름진 손이 몇 번이고 카드를 쓸었다. 눈을 떼지 못하는 백 회장을 바라보던 견이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옛날 생각 한 번 더 나게 해드릴까요?”

이번에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 무탈이를 본 백 회장의 눈이 커졌다.

“이게…….”

알고는 있었고, 예전에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견이 월경 때마다 꼭꼭 숨어버리는 탓에 10년이 넘도록 어려진 견을 볼 일이 없었다.

사진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백 회장의 눈에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켰다.

‘정말로 어렸을 적 모습 그대로로구나. 보는 사람들마다 지 애비를 꼭 빼다 박았다고 했었지.’

백 회장의 잇새에서 먹먹한 침음이 새어 나왔다.

눈 사이의 콧대를 꾸욱 쥐었다 놓은 그가 말을 돌렸다.

“옆에 있는 여자는 어린이집 선생님인 모양이구나.”

“네. 어떠세요?”

“어떠냐니? 뭐가?”

“첫인상 같은 거요. 할아버지 사람 잘 보시잖아요.”

“사진만 봐서 아나. 직접 눈을 보고 말하는 걸 들어봐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백 회장은 미간에 힘을 주고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나쁘지 않아. 선하지만 순해 보이지는 않고, 상냥하면서도 강단 있어 보이는 게…….”

백 회장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내려왔다.

“꼭 너희 엄마를 처음 봤을 때 같구나.”

앙다물고 있던 견의 턱에서 얼마간 힘이 빠졌다.

“……어쩐지 끌리더라.”

“음?”

견이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리고는 몸을 기울였다.

“할아버지, 제가 혹시나 해서 청심환을 챙겨왔는데 드시고 들으실래요, 아니면 듣고 나서 드실래요?”

“그게 무슨 소리야? 뭘 듣는단 말이냐?”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드릴 거거든요. 나쁜 일은 아니구요. 그래도 많이 놀라실까 봐.”

백 회장이 흐음, 하고는 손짓을 했다.

“나쁜 일은 아니라니까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할아버지. 나…….”

견의 손가락이 사진 속 모단의 코를 지그시 눌렀다.

“이 여자랑 결혼할 건데, 괜찮으시죠?”

***

퇴근 후, 모단은 회사 앞 커피숍에서 효림과 소소한 수다를 나누고 있었다.

“모단 쌤은 결혼 생각 없으세요?”

“에이, 남자가 있어야 하죠. 효림 쌤은요?”

“지금은 모르겠어요.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랑 상견례 직전까지 갔다가 이것저것 안 맞아서 헤어졌거든요.”

“그러셨구나.”

“모단 쌤은 그런 남자 없었어요? 결혼까지 생각해 본 남자.”

스치는 얼굴이 하나 있긴 했다.

이젠 정말로 덤덤히 떠올릴 수 있게 된 전 남자친구.

“저도 비슷한 일을 겪어서요. 가뜩이나 없던 환상마저 다 깨지는 바람에 지금은 결혼 생각 없네요.”

“그래도 미리 단정 짓지 말자구요. 연경 쌤 얘기 모르시죠? 서른 넘도록 독신주의였는데 지금 남편분 만나고 3개월 만에 식장 들어가셨다잖아요.”

“정말요? 아하하.”

대화의 시작은 자원봉사 동호회 이야기였는데 자연스럽게 화제가 다른 쪽으로 흘렀다.

“맞다, 오늘 무탈이 안 나왔죠?”

“네. 이제 다음 달에 온다나 봐요.”

“껌딱지 없어서 허전하셨겠네. 그래도 좀 편했죠?”

“아뇨, 엄청 서운해요.”

모단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눈에 밟혔다.

고작 며칠 사이에 제법 정이 들었는지 아이들도 ‘선생님, 무탈이는요?’ 하고 몇 번이나 찾았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모단 쌤, 이번 주말부터 동호회 나오시는 거죠?”

“네, 그럴게요.”

커피숍을 나온 둘은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모단은 곧장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동그스름한 헤어스타일을 보자 절로 무탈이가 떠올랐다.

함함한 머리카락을 나풋대며 뛰어와 손을 잡거나 안기던 것이.

‘껌딱지 보고 싶네. 친구들하고 놀다가 혼자 있으려면 더 심심할 텐데.’

괜스레 맘이 짠해졌다. 짧은 한숨을 흘린 모단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 순간, 드러난 귓가로 낯익은 부름이 파고들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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