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18화 (18/86)

#18. 사랑스러운 껌딱지

2017.07.02.

“선생님한테서 나는 향기 너무 좋아요. 샴푸 뭐 쓰세요?”

그 순간, 모단의 머릿속에 공기 반 소리 반의 노래 한 소절이 흘렀다.

어머님이 누구니. 도대체 너를 어떻게 이렇게 키우셨니…….

‘얘 정말 뭐지?’

귀엽게도 휘어져 있는 무탈이의 눈을 마주한 모단은 몽롱해질 뻔한 정신을 굳게 다잡았다.

‘어쩜 이런 말을 할까? 배워서 하는 건 아닐 테고. 사랑과 스킨십이 넘치는 해빛이네 집처럼 얘네 집도 그런 건가?’

그런 것치고는 무탈이에게서 엄마 아빠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는 것 같았다.

모단은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혹시 TV를 너무 많이 봐서 드라마 대사를 일상회화로 쓰는 경지에 이르렀다거나?’

출처는 모르겠지만 한글 외에 쓸데없는 쪽으로도 조기교육을 받은 건 확실해 보였다. 이래저래 크면 여자들 어지간히 울릴 상이라는 것도.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구먼. 덕분에 심쿵했다, 요 녀석아.’

견의 이마께로 코를 가까이 가져간 모단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고마워. 무탈이한테서 나는 향기도 좋은데?”

순간 뽀뽀라도 해줄 것처럼 가까워지는 통에 견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숨결이 멀어진 자리에는 민망함만 남았다.

맑게 웃은 모단이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멍하니 몸을 내맡기고 있던 견은,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는 손길에 펄쩍 뛰었다.

“으앗! 선생님!”

“너무 세게 털었나? 아팠어? 미안.”

세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딜 만지느냐의 문제인데!

당황한 견이 황급히 모단의 품에서 벗어났다.

“내가 할게요!”

얼굴이 발개져서는 제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가리는 견을 보다가, 모단은 갸웃했다.

전에 화장실 갈 때도 느낀 거지만 이런 쪽으로 꽤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손잡는 거나 친구들하고 놀 때 닿는 건 신경 안 쓰는 걸 보면 신체 접촉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모단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단순히 부끄러움이 많은 건지, 아니면 어떤 심리적인 이유가 있는 건지, 주의 깊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미안해, 무탈아. 혹시 선생님이 무탈이 몸에 손을 대서 기분이 안 좋았어?”

“아뇨.”

의외로 빠른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러고도 모자라 조막만 한 입술을 한 번 더 오물오물했다.

“기분 안 나빠요. 자주 안아주셔도 돼요.”

그래 놓고 냉큼 고개를 숙이고 쭈그리고 앉았다. 지렁이도 달팽이도 떠난 자리에 비로소 씨감자를 묻는 뒷모습에 어쩐지 발그레한 기운이 감도는 것도 같았다.

앙증맞은 뒤태를 지켜보던 모단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크윽.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어쩌면 좋아……!’

***

집에 돌아온 후, 견은 섭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동안 애기들을 본 적이 없어서 아직도 어색하긴 한데 계속 보니까 귀여운 것 같기도 해. 근데 걔네 완전 무서워. 아까 밭에서 달팽이가 나왔는데…….”

표정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섭호 네가 궁금해할까 봐 말해주는 것뿐이야’였지만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왜, 전에 네가 학교 콤플렉스 얘기한 적 있었잖아. 남들이 알면 수군거릴 것 같아서 기를 쓰고 감췄는데, 막상 내놓으니까 생각보다 사람들 반응이 덤덤하더라는 얘기. 그래서 그때부턴 별거 아닌 게 됐다고.”

“지레 겁먹었다가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닌 일들이 많쥬.”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조금 비슷한 것도 같아.”

견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처음으로, 잠깐이지만…… 이 모습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다음 날도, 견은 무탈하게 잘 등원해 어린이집을 반짝반짝 빛냈다.

역할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견에게 무려 아빠 역을 맡기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견은 대본도 맥락도 없는 놀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발연기만 선보이며 소꿉놀이 판을 더럽게 재미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다섯째 동생으로, 운전기사 아저씨로, 심지어 강아지로 역할이 작아지다 끝내 퇴출당했다. 아이들에게 얼굴보다 중요한 기준은 ‘같이 놀면 재미가 있는가’였으므로.

대신 블록놀이를 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올라갔다.

“요즘엔 별 신기한 장난감이 다 나오네.”

어딘가 삼촌 같은 혼잣말을 해가며 아빠 못지않은 솜씨로 자동차, 비행기, 공룡까지 뚝딱 만들어주는 것에 반한 아이들은 대장이라 부르며 따를 기세였다.

그러나 재미가 있든 없든, 견은 그리 길게 놀지 않았다.

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기에.

“선생님!”

칠세미남 무탈이가 담임만 졸졸 따라다닌다는 소문은 이미 어제부터 퍼져 있었다.

아이가 애착을 보이며 따르는 건 교사 입장에선 고맙고 흐뭇한 일이었기에, 모단은 다른 아이들이 섭섭해하지 않을 선에서 기꺼이 받아주었다.

“선생님, 머리 묶었네요. 깜찍해요.”

“깜찍……! 고, 고맙다.”

‘하고많은 수식어 중에 왜 하필 깜찍이냐?’

그때 연경이 들어왔다. 교구를 빌리러 왔던 그녀는 모단의 책상 앞에서 턱을 받치고 있는 견을 보고는 깔깔 웃었다.

“아이고, 모단 쌤. 껌딱지 생겨서 좋겠네. 무탈아, 선생님이 그렇게 좋아?”

“네.”

“왜?”

“살면서 본 여자 중에 제일 예뻐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놓는 대답을 들은 연경과 모단은 멍하다 못해 숙연해졌다.

“모단 쌤, 남자친구 없댔지?”

“한참 됐죠.”

“그럼 전 남친한테라도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어? 난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저도 못 들어봤어요. 갑자기 슬퍼지네요.”

모단이 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다. 무탈이가 예쁜 말을 많이 해줘서 선생님 기분이 이만큼 좋아졌어.”

“별말씀을요. 지나간 남자친구들은 왜 예쁜 말을 안 해줬는지 모르겠지만.”

머리 위에 있던 모단의 손을 슬쩍 잡아 끌어 내린 견이 싱긋 웃었다.

“앞으로 만날 남자는 엄청 많이 해줄 거예요, 분명.”

그 말만 남기고 총총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던 연경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상에. 말하는 것 좀 봐. 모단 쌤, 쟤 나이 속인 것 같지 않아?”

“그러게요. 벌써 민증도 나온 거 아닐까요?”

방금 농담 아니라 진담을 나눴다는 건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탈이는 여러모로 독특한 껌딱지였다.

보통 선생님에게 집착하는 아이들은 손을 잡거나 안기거나 매달리는 등 항상 붙어 있으려 하고, 심하면 화장실에 갈 때도 따라다니곤 했다.

다행히 무탈이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물론 붙기도 하고 별의별 질문을 다 하기도 했으나 바빠 보이면 얼른 물러났다. 은근슬쩍 도와주기까지 했다.

“선생님! 책 읽어주세요!”

“나 선생님 무릎에 앉을래!”

“내가! 내가 앉을래!”

“다 내려와.”

같은 아이인데 왠지 말 잘 들어야 할 것 같은 견의 말투가 단숨에 천방지축 아이들을 압도했다.

“선생님 다리 아파.”

아이들이 슬금슬금 바닥에 내려와 앉았다. 견은 자연스럽게 모단의 옆을 차지했다.

“선생님 옆에서 책 읽어도 돼요?”

“그럼.”

가만히 앉아 책을 펴는 견을 힐끔 본 모단이 다른 아이들에게 몇 권의 책을 읽어주었다.

처음엔 흥미롭게 듣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다른 놀이를 하러 가고, 모단의 옆에는 견만 남았다.

“무탈이 무슨 책 보고 있었어? 글자 없는 그림책이구나?”

“글자만 있는 책은 봤어도 그림만 있는 책은 처음 봤거든요. 요즘 애들 책은 예쁘게도 나오네.”

“응?”

아차차. 말실수를 한 견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가 편해질수록 아이라는 걸 더 잊게 된다.

“그게, 집에 있는 그림책들은 조금 옛날 거라서……. 그럼 이 책은 어떻게 읽어요?”

“그림을 보면서 무탈이 마음대로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 거야.”

천천히 넘어가던 페이지가 어느 한곳에서 멈췄다.

한참을 펼쳐 둔 페이지에는 겨울잠을 자러 가는 곰이 동굴 앞에서 숲 속 동물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모단이 슬쩍 몸을 기울였다.

“아기 곰이 숲 속 친구들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무탈이가 번쩍 들고 있는 아기 곰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너희들 중에서 겨울잠 안 잘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애 있으면 손들어봐.”

“으, 으응? 뭐라고?”

이번에는 다섯 손가락을 쫙 펴고 있는 아기 곰의 왼손을 가리켰다.

“5억 줄게.”

친구들아, 겨울잠 자고 또 만나자, 같은 순수한 말을 기대했던 모단은 뒷목 잡고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워낙에 상상 초월이기에 이제 웬만해선 놀라지도 않는데, 얘는 정말 너무 강력했다.

‘5억이 뉘 집 개 이름이냐? 5억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 박해빛처럼 천 원짜리 두 장 주면서 만 원짜리랑 바꾸자고 하면 하나 주고 두 개 받았다고 좋아해야 애다운 거 아니냐고!’

너무 골똘해진 견은 제가 지금 모단에게 어떤 멘붕을 선사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래서 곰이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철근처럼 씹어 먹은 거로군. 호랑이는 겨울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곰만큼 절박하지 않았던 거야.”

“어, 음…… 단군설화도 아는구나.”

“사람이 돼야 겨울잠을 안 잘 수 있으니까. 나는 안 자고 싶은데 종족의 특성이라 강제로 자야 한다니 얼마나 억울했겠어. 1년의 4분의 1이 날아가는 건데. 내가 안 잤으면 사냥할 수 있었을 동물들을 다른 놈들이 다 잡고 있다고 생각하면 억울해서 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던 견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모단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생각만 한 줄 알았던 것이 입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책이 참 슬프네요.”

견은 책을 팽개치고 후다닥 도망쳤다.

수습한답시고 저만치서 그림 못 그리는 척하고 있는 견을 지켜보던 모단은 앞치마에서 스윽 수첩을 꺼내 들었다.

―관찰일지. 백무탈.

막상 관찰일지를 작성하려고 하면 어떤 아이가 뭘 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그때그때 수첩에 간단히 적어두곤 했다.

근데 막상 쓰려니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억 단위를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걸 보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게 확실하다’고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논문도 아닌데 ‘그림책 속 곰과 단군설화 속 곰을 비교분석하여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고 쓸 수도 없고.

사실인데 사실대로 썼다간 원장님이 관찰일지에 소설 쓴 사람 사직서도 멋들어지게 써보라고 하실 것 같았다.

그대로 수첩을 덮어버린 모단은 무탈이가 던져 둔 책을 책꽂이에 꽂으려다가 눈을 꽉 감았다.

‘망했다. 이제 이 책 보면 곰이 5억 부르는 것밖에 생각 안 날 것 같아!’

***

다음 날 아침, 잠이 덜 깨 비틀대며 내려온 견은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한상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일어나서 다 차렸어?”

“별거 없슈. 밥하고 멸국(미역국)만 끓였슈.”

“이러지 말라고 했잖아. 자꾸 이러면 너랑 결혼하고 싶어진다고.”

“귀 빠진 날 아침부터 뭔 좋은 말을 듣겄다구 흰소리를 해대신댜.”

오늘이 견의 생일이었다. 김이 오르는 미역국을 견 앞에 놓아준 섭호가 자리에 앉았다.

“태어나서 나이 먹느라 겁나게 욕봤슈.”

“그냥 생일 축하한다고 하면 안 돼?”

비죽 나왔던 견의 입은 간이 딱 맞는 국물 한 수저에 쏘옥 들어갔다.

맛있다 못해 뭉클했다. 이 생일상을 올해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나 이제 요절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류. 말 나온 김에 다음 생일에는 지 말구 다른 분이 끓인 멸국을 드시믄 더 좋겄구먼유.”

“정모단 선생님 요리 잘하나?”

“먹구 뒤질 맛이어두 꾸역꾸역 먹어야쥬. 따질 처지유?”

“하긴 그래.”

먹고 안 먹고를 고민할 일이 생기기만 해도 바랄 게 없겠다.

견이 수저를 입에 문 채로 중얼거렸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 갑작스레 몸이 쇠하더니, 결국 석 달 만에 온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고 요절하였다.”

얼마 전까지, 자려고 눈 감는 것마저도 두렵게 만들었던 <예지미인> 속의 한 구절.

“그게 지난번이었던 거야. 만으로 아직 스물여덟인데요! 하고 우겨볼 틈도 없이 저승사자한테 멱살 잡혔는데 기적처럼 정모단 씨가 나타나 준 덕에 다행히 거기서 멈춘 거지.”

섭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에 모단이 없었다면 이렇게 평화로운 아침도 없었을 터였다.

17년 전에도, 지금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참 많은 것을 바꿔놓은 그녀다.

“참, 내일 어린이집에서 생일잔치한대. 3월에 생일인 친구들 선물 준비해 오라던데?”

“잔칫날 한번 기똥차게 잡았구먼. 내일부터는 못 가잖유.”

“어? 벌써 일주일 됐나?”

제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음을 깨달은 견이 얼른 말을 바꿨다.

“아아, 다행이다. 나도 해야 하나 걱정했거든. 어떻게 애기들하고 같이 고깔모자 쓰고 사진 찍고 그러나 해서. 잘됐네.”

“지두 참말로 다행시럽다구 생각혀유. 도련님이 얼굴 믿고 탤런트 헌다구 안 혀서. 발연기 작렬이구먼.”

“내가 뭘!”

오늘은 유난히 시간이 더 빨리 갔다.

다른 때였다면 지금이 제일 시간이 안 갈 때였다. 보름으로부터 일주일 되는 날.

오늘만 참으면 되는데. 한 번의 달만 더 지면 되는데. 그 하루가 지겹도록 길었더랬다.

물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다. 한데 막상 되돌아가면 이렇게 매일매일 가까이서 모단을 볼 수가 없지 않은가.

“무탈아.”

“네?”

“선생님 이제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아이들의 가방을 정리하는 모단의 등 뒤에 코알라처럼 매달려 백허그를 하고 있던 견이 마지못해 팔을 풀었다.

“미안해요, 선생님.”

“아니야. 벌써 집에 갈 준비를 할 시간이 됐네. 오늘은 수요일이라 한 시간 일찍…… 어머!”

모단이 잔뜩 당황해서는 허둥거렸다.

“어떡하지? 선생님이 깜박했어. 수요일은 한 시간 일찍 간다고 형한테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얼른 연락드려야겠다.”

몰랐던 건 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면 변변히 인사도 못 하고 어영부영 집에 가야 했다.

마음이 급해진 견은 얼결에 모단의 앞치마 자락을 붙들었다.

“저, 우리 형은 갑자기 얘기하면 못 와요! 그러니까…… 여섯 시가 되어야 올 수 있는데.”

“그래?”

모단의 퇴근시간을 빼앗은 건 미안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럼 다른 날처럼 여섯 시에 가도 괜찮을까? 선생님하고 같이 형 기다리자.”

“네.”

“미안해서 어쩌지? 다른 친구들 다 가고 혼자 남아서.”

“괜찮아요. 선생님 있잖아요.”

나야말로 일찍 퇴근 못 하게 해서 미안해요, 하고 싶었다. 지금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하지 못했다.

“어휴, 선생님이 이렇게 깜박깜박한다니까. 미안해.”

제 엄마가 친구 엄마보다 조금만 늦게 와도 아이들이 시무룩해진다는 걸 잘 아는 모단은 거듭 사과를 했다.

“맞다. 무탈이 오늘 생일이지?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

“뭘요?”

“안 그래도 내일부터 못 온대서 아쉬웠는데. 선생님하고 둘이서만 먼저 생일잔치할까?”

이렇게까지 큰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는데.

동그란 두 뺨 가득 달뜬 홍조가 돌았다.

“네!”

아이들이 모두 가고, 빈 교실에 모단과 견 둘만 남았다.

모단은 내일 생일잔치 때 쓸 펠트지 왕관을 만들며 견에게도 작은 일을 맡겼다.

“무탈이는 이것 좀 잘라줄래?”

고개를 끄덕인 견은 가위를 받아 들었다. 일부러 서툴게 느릿느릿 자르며, 일에 열중한 모단을 눈에 담았다.

‘밖에서 봤을 땐 애들한테도 그렇게 시크한가 했는데 완전 다르단 말이지.’

원에서의 모습이 그녀의 본래 성격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CCTV가 있다지만 부모나 원장이 종일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일일이 일러바칠 것도 아닌데 한결같이 다정하다는 건 웬만한 연기력으로는 힘든 거 아닌가.

견은 새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여자가 호르몬시터였어도 곁에 두려고 노력은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처럼 진심으로 원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랬다면 오히려 더 깔끔한 비즈니스 관계가 성립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천만다행인 거다.

다른 여자가 호르몬시터라 해도, 모단을 갖고 싶어졌을 게 분명하니까.

“선생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할 땐 어떻게 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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