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변태를 봤습니다
2017.06.14.
“피 봤으니 이제 만지기만 하면 돼요.”
모단은 주춤 돌아보았다. 소맷자락으로 코를 꾹 누른 견과 눈이 마주쳤다.
“코피 나기 전 말고, 지금.”
‘만지다니, 대체 어딜, 왜!’
기겁해서 주위를 둘러보던 모단이 급한 대로 철제 의자를 집어 들고 앞을 막았다.
“나한테 손대기만 해! 성추행으로 고소…… 해봤자 제대로 처벌받을 리가 없지. 그냥 내 손으로 죽여 버린다!”
“안 잡으면 죽는다고! 아니지, 피가 조금만 나는 거 보니까 이제 죽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살려주세요!”
“뭐라는 거야? 살려주면 또 책임 타령이나 하겠지! 한 번 당했으면 됐지 또 당할 것 같아? 꺼져! 비키라고!”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에 새빨간 피를 묻히고 비틀비틀 다가오는 견의 몰골은 그야말로 강제 광합성을 당한 뱀파이어, 혹은 굶주린 좀비처럼 보였다.
“때려도 괜찮아요. 근데 그걸로 때리면 안 되고 손이나 발로 때려야 돼. 몸이 닿아야 하니까.”
“닿, 닿아…… 몸이, 뭐?”
“딱 한 대만 때려줘요. 제발 부탁입니다.”
모단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곱게 미쳤다더니, 변태 중의 상변태였어어!’
백견의 50가지 그림자 중 50개를 다 본 기분이었다.
모단은 의자도 팽개치고 필사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살려주세요! 악!”
“지금 누구보고 살려달라는 건데! 정모단 씨가 나를 살려줘야 된다니까!”
어깨부터 부딪히며 온몸의 체중을 실어 문을 연 순간, 튀어나온 손잡이가 문 앞에 지키고 있던 섭호의 등을 정확히 가격했다.
섭호는 아까 견이 그랬듯, 너무 아프면 비명도 못 지른다는 것을 실감하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골프채로 가격당한 듯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죄송합, 아니지. 죄송은 무슨. 방조도 범죄야! 너도 똑같은 변태라고!”
“정모단 씨, 그게 아니라!”
견이 열린 문으로 따라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섭호가 벌떡 일어나더니 빛의 속도로 손을 뻗었다. 견의 이마를 팍 쳐서 안으로 다시 밀어 넣고 문을 닫은 후에 그 앞에 버티듯 섰다.
복도 저 끝에서 걸어오던 직원들을 본 거였다.
“뭐지?”
“그러게. 무슨 일 있나?”
“거 봐요. 내가 좀 전에 무슨 비명 소리 같은 거 들었다고 했잖아.”
다 같이 퇴근하던 홍보팀 직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수군거렸다. 일행의 중간쯤에서 남자 직원들과 나란히 걸어오던 지협이 섭호와 모단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척추가 반 접힌 것 같은 고통을 무릅쓰고 자세를 곧게 편 섭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사를 했다.
“네, 위 비서님. 정모단 선생님까지…….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세요?”
누가 봐도 멀쩡해 보이진 않는 표정으로 씩씩대고 있는 모단에게 시선이 쏠렸다.
대체 누구고 왜 여기서 저러고 있는가 하는 시선이 반, 지협이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염려해 주는 것에 대한 놀라움 반이었다.
“그게…….”
머리카락을 넘기고 숨을 고른 모단이 회의실 문을 홱 가리켰다.
“저기서 변태를 봤습니다.”
“네?”
여직원들 사이에서 꺅, 하는 비명이 터졌다. 다들 휘둥그레져서 주춤거리는데 섭호가 얼른 끼어들었다.
“변태가, 있었는데! 저를 보고 도망쳤습니다. 선생님이 많이 놀라신 것 같아서 진정시키는 사이에 사라졌는데,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분히 말을 잇는 동안, 섭호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빠졌다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모단과 지협에게 애원의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경고하듯 회의실 문을 살벌하게 노려본 모단은 입을 닫았고, 지협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큰일이네요. 경비실에 연락해서 잘 처리해 주세요.”
“네, 걱정 마십시오.”
“얼른 퇴근하는 게 좋겠습니다. 특히 여직원 분들은. 주차장까지 다 같이 가죠.”
지협이 자연스럽게 모두를 이끌고 빨리 자리를 비키려 했다. 모단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저도! 저도 같이 가요!”
“선생님께서는 목격자시니까 좀 도와주셔야!”
섭호가 다급히 잡아보았으나, 모단은 처음 보는 여직원의 팔짱까지 껴가며 홍보팀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뇨! 저 너무너무너무 끔찍하고 무서워서 얼른 퇴근할 생각입니다! 절대 혼자서 안 갈 거구요, 혹시나 수상한 사람이 따라오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팔을 내준 여직원은 물론이고 다른 직원들도 당혹스런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색하게 웃은 지협이 섭호에게 손짓을 했다.
“나머지 일 처리를 부탁드릴게요.”
뻘쭘한 분위기 속에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어린이집이 있는 2층에서 내린 모단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인사를 한 후에 전속력으로 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침 딱 하원 시각이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아이들을 봐준 연경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모단은 화장실로 들어가 손부터 씻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살다 살다 별 환장할 꼴을 다 보네! 와, 어떡하지? 진짜 진단서 떼고 고소하는 거 아니야? 여기 그만두고 밀항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지, 내가 왜!’
모단이 고개를 세게 내저었다.
“17년 전 이맘때, 희명리조트 오션에서 나랑 부딪혔었잖아요. 내가 코피가 나니까 미안하다면서 손을 잡아서 일으켜 줬잖아. 그러곤 가버렸어.”
그게 백견이었다니.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꿈에서 볼 만큼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으니까.
“생일파티…….”
그 화려하던 곳이 어린애 생일파티였다는 것에 쓴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한눈에 보아도 상류층을 넘어 최상류층들만 모여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가 더욱 초라해 보였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을 만큼.
‘근데 그 말은 뭐지? 그날 와서 부딪힌 여자 때문에 17년을 괴물로 살았다고?’
코피 말고 다른 상처는 없어 보였었다.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부딪혀서 다쳐 봤자 얼마나 다쳤겠는가. 나가떨어져서 모서리에 찧거나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도 아닌데.
‘잠깐. 코피……?’
그러고 보니 벌써 세 번째다. 그가 피를 쏟는 걸 본 게.
‘그거랑 뭔가 연관이 있는 건가? 코피하고 내가?’
그때, 밖에서 화장실 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니임!”
모단은 얼른 손의 물기를 닦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새를 못 참고 바깥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얘들아, 선생님이 안 나와!”
“응가하나 봐!”
“우리 엄마도 응가하러 가면 엄청 안 나오는데.”
“아니야아! 선생님은 응가 안 해!”
“요것들이…….”
모단이 짐짓 눈을 부릅뜨고 문을 열자 아이들이 꺄르륵거리며 도망쳤다.
그 자리에 서서 헤헤 웃고 있던 동후가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아까 어디 갔다 왔어요?”
“으응. 저기 위에 사무실에.”
“그렇구나아.”
쭈뼛대던 동후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뭔데?”
“오늘은 수요일이라서 우리가 다 일찍 가니까요, 선생님이 심심할까 봐서요.”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만화 캐릭터가 얼추 비슷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거 보면서 조금만 놀다가 일찍 코 자세요. 자고 일어나면 우리가 다시 어린이집에 올게요.”
너희들 가면 나도 갈 건데. 나도 집 있다고. 여기서 사는 사람 아니라고.
모단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다. 이렇게나 깜찍한 오해와 배려라니, 조금 전의 불쾌한 일들이 싹 날아가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마워, 동후야. 이거 두티랑 잔뜰이지? 완전 똑같이 그렸다! 선생님도 엄청 좋아하는데.”
“정말요?”
“그럼. 선생님 이거 보면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동후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기분 좋게 어린이집 와. 알았지?”
“네!”
방실거리는 동후의 뺨을 두 손으로 조물조물해 주는데, 밖에서 하원 지도를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후 어머니 오셨어요∼”
“네!”
부모들이 한두 명씩 오더니 금세 몰렸다.
정신없이 아이들을 귀가시키고, 모단은 다른 선생님들과 꼭 붙어 회사 바로 앞까지 나온 후에 바로 택시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줄곧 경계하느라 바짝 곤두섰던 긴장이 풀어졌다.
가방을 팽개친 그녀가 스르륵 주저앉았다.
“젠장. 쇼핑은 무슨. 택시비로 다 썼네. 아흐…….”
***
“도련님.”
한 손에 쟁반을 들고 방문을 두드린 섭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이불이 동그마니 솟아 있었다.
“저녁은 드셔야쥬.”
침대 옆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은 섭호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미동도 없는 이불 더미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워디 한 군데 절단 나지도 않구 죽지도 않았음 된 거 아뉴?”
“위로라고 하냐, 그걸?”
견이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느새 일곱 살 아이의 몸이 되어 있었다. 열이 받아서인지 아까 섭호에게 한 방 맞아서인지 동그란 이마가 발그스름했다.
모단을 쫓아가기는커녕, 퇴근하는 직원들 눈을 피해 주차장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차에 올라 문을 닫자마자 현기증이 일며 몸이 작아졌다. 반걸음만 늦었어도 아찔할 뻔했다.
“굶는다구 뭣이 나오간디? 배나 채워유.”
섭호가 직접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집어 내밀었다.
브런치 카페에서 사온 것처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월경을 하는 동안에는 가사도우미도 집에 들이지 않기에 섭호가 간단한 살림까지 하다 보니 수준급 솜씨가 되었다.
앙증맞은 한입 크기의 샌드위치를 본 견이 괜히 폭발했다.
“누가 이렇게 작게 만들어서 가져오래! 내가 애냐? 커도 먹을 수 있다고!”
“영락없이 애구먼유. 꼭 그맘때 얼라들이 쓰잘데기없는 걸루 떼거지를 쓰다가 엄니한테 싸리비로 쳐 맞구 질질 짜구 그러잖유.”
섭호가 구사하는 충청도 사투리에는 말하는 사람은 느긋한데 듣는 사람은 복장이 터지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견은 씩씩대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됐어. 위스키나 한 잔 마시고 잘 거야.”
“대그빡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워디서 술 타령이랴. 깨구락지 빤스만 한 것이.”
“전에는 고망쥐 난닝구라더니……. 충청도에서는 생쥐도 런닝을 입고 개구리도 팬티를 입냐?”
“달리 양반의 고장이겄슈?”
샌드위치를 잠시 내려놓은 섭호가 파스를 건넸다.
“담주꺼정 냅두면 위스키가 워디 간대유? 개시키 풀 뜯어 묵는 소리 허덜 말고, 인난 김에 이거나 붙여봐유.”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셔츠를 벗은 섭호가 등을 돌렸다. 너른 등짝 한가운데에 회의실 문 손잡이 모양의 멍이 들어 있었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푸스스 흘려낸 견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파스를 붙여주었다.
“아프냐?”
“야.”
“나도 아프다.”
“말로 때울 생각 말어유. 이거 엄연히 산재 아뉴?”
“그래. 내가 개인적으로 산재 처리해 줄게.”
섭호가 다시 셔츠를 걸쳐 입으며 불퉁하니 대꾸했다.
“됐슈. 도련님 허벅다리보담은 나을 것 같네유.”
“이왕 맞을 거 코피 터진 다음에 맞았으면 월경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견이 욱신대는 허벅지 안쪽을 한 손으로 문지르다 인상을 구겼다. 몸이 바뀌면서 상처도 나으면 좋으련만, 사이즈만 줄어들 뿐 다른 건 다 그대로였다.
“그래도 잘 차셨네유. 쪼깨만 빗나갔음 큰일 날 뻔했슈.”
단추를 다 잠근 섭호가 갸웃했다.
“근디…… 원래 노리던 데가 거기가 아닌데 천만다행으루다가 빗나간 거 아녀……?”
오싹해진 견의 손이 본능적으로 다른 곳을 보호했다. 섭호의 얼굴에 예의 ‘이건 너한테 하는 말이 아녀’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몇 번 찍어 안 되믄 전기톱으로 끝내겄다더니, 기껏 꺼낸 게 ‘얼마면 되냐’여? 나 원 참. 언제적 원빈이랴? 전기톱으로 지 몸땡이를 썰어서 절단 내겠다는 말인 줄 꿈에도 몰렀구먼.”
“알잖아. 나 보름날에 어떤지……. 반 이상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말 아니야…….”
시무룩해진 견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박력 있게 고백할 걸 그랬나? 나 월경한다고. 여자니까 비슷한 일을 겪을 거 아니야. 그럼 동질감을 느끼면서 이해해 주지 않았을까?”
“여태 톱질 덜 했슈?”
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모단 씨, 진짜로 나 안 볼 것 같지?”
“다시 태어나믄 모를까, 영 글렀슈.”
팩트리어트에 얻어맞은 견이 주섬주섬 이불자락을 당기며 다시 드러누우려다 멈칫했다.
“잠깐, 나 지금 다시 태어난 거 아닌가?”
섭호가 뭔 소리냐는 듯 눈만 끔벅거렸다.
덩달아 눈을 깜박이며, 견은 옥상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던 모단을 떠올렸다.
“정모단 씨, 애들한텐 잘해줬지?”
“그야 어린이집 선상님이시니께 당연히…….”
어린이집.
입안에서 몇 번 되뇌어본 견이 다시 이불을 걷고 앉았다.
“섭호야.”
눈치가 워낙 빠른 섭호인지라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은 했으나 설마 했다. 근데 정말로 그 말이 견에게서 튀어나왔다.
“나 어린이집 다닐까?”
“이맘때는 제집 마당에도 안 나가시는 양반이 워딜 간다구유?”
그건 그랬다. 작아진 모습을 가족과 섭호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아무도 이 아이가 백견인 줄 모른다 해도.
“하긴 그래.”
맥없이 대꾸한 견이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입에 물었다.
작다고 시비를 걸 때는 언제고, 오물오물 잘만 먹는 견의 입을 바라보던 섭호의 입매가 가만히 늘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견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말해놓고 나니 자꾸만 생각났다. 모단과 함께 뛰어 놀던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 그날의 눈부신 햇살, 따뜻했던 공기 같은 것들이.
그만한 꼬맹이가 뭘 부럽기까지 하느냐고 했지만, 사실은 부러웠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자는 말에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렇게 신나게만 보낼 수 있다면 하루가 무척이나 짧겠구나 싶어서.
일주일이 참 빨리 지나가겠구나 싶어서.
“혹시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거유?”
너무 골똘해지는 바람에 빵을 씹어 삼키는 것조차 깜박하고 줄곧 밀어 넣기만 하던 견이 터질 것 같은 볼을 하고서 섭호를 돌아보았다.
“워차피 말로 혀서는 믿지도 않을 거구, 당췌 말할 기회도 없을 것 같으니께 얼라 된 거를 먼저 뵈주겠다는 거 아뉴? 월경이 끝나고 나서 실은 그게 나여유, 함서 어린이집서 있던 일들을 술술 늘어놓으면은 안 믿을 도리가 없으니께.”
‘아, 그러면 되겠구나!’
한 방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던 견이 입안에 든 것들을 황급히 삼켰다.
“역시 넌 유능한 비서야. 내가 말하지 않아도 척척 다 알아듣고.”
섭호가 그려준 큰 그림에 몽당연필 하나 얹고, 뻔뻔하게 손짓했다.
“최대한 빨리 다닐 수 있게 진행해 줘.”
***
다음 날 저녁, 모단은 퇴근하자마자 새윤에게 붙들려 백화점으로 향했다.
“깜박하고 있었는데 사은품 교환권이 오늘까지인 거 있지. 너도 살 거 있으면 사고 영수증 나 줘.”
“그럴까? 요새 스트레스 대박인데 카드나 죽죽 긁어버릴까?”
“좋은 생각이야. 다음 달과 다다음 달의 내가 힘을 합치면 못 갚을 카드값이 없는 법이지.”
모단과 새윤의 손을 하나씩 잡고 있던 해빛이 눈을 빛냈다.
“엄마랑 이모랑 오늘 폭풍쇼핑 하는 거야?”
“폭풍쇼핑이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엄마한테. 엄마가 마트에서 그랬잖아. 근데 오늘도 엄마 것만 이만큼 사고 내 건 안 사줄 거야?”
“얘는. 엄마 거가 어딨어? 다 우리 식구 먹고 쓰는 거지. 그리고 너, 옷도 장난감도 많으면서 맨날 사달라고 하면 어떻게 다 사줘?”
“엄마 미워. 택배 아저씨가 최고야.”
“박해빛, 네 옷이랑 장난감 택배 아저씨가 주신 거 아니라고 했지? 엄마가 산 걸 갖다 주시는 거라니까?”
문 닫을 시각이 한 시간 남짓밖에 남지 않아서인지 백화점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모단이 새윤의 팔을 툭 쳤다.
“웬일로 남성복 매장을 그냥 지나쳐?”
“은규가 오늘은 자기 거랑 해빛이 거 절대 사지 말고 내 것만 사래.”
“아, 그러셔.”
매일 보면서도 가끔씩 낯설었다.
새윤과 은규, 온갖 흑역사를 공유한 두 친구에게서 문득문득 다정한 연인이자 부부, 따뜻한 부모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게.
제 눈엔 전혀 보이지 않던 박은규의 섹시함이나, 윤새윤의 청순함이 서로의 눈에는 용케 띄었다는 게.
“모단아, 잠깐만. 저기 유아복 행사한다!”
새윤이 한 층 더 올라가려다 말고 멈춰 섰다.
“네 것만 사겠다며?”
“너도 애 낳아봐라, 그게 되나. 나 잠깐 저기 갔다 올게.”
“같이 가.”
“좀 있으면 문 닫을 시간이잖아. 너 쇼핑할 것도 해야지. 전화해.”
“엄마, 나 이모랑 있을래!”
“그래. 너 혼자 가서 편하게 봐라. 내가 해빛이 데리고 있을게.”
“그럴래?”
고마워, 하며 씩 웃은 새윤이 총총 사라졌다. 모단은 해빛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돌렸다.
“우리 핀 보러 갈까? 전에 해빛이가 핀 빌려준 거 고마워서 이모가 하나 사주고 싶은데.”
“정말? 우와! 이모 최고!”
유아복 매장 사이를 지나 다른 쪽으로 가보려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모단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