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10화 (10/86)

#10. 꼭꼭 냠냠 꿀꺽

2017.06.04.

휴대폰이 울렸다. 모단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왜 아직도 안 들어와?]

“지금 끝났어.”

[얼른 와서 얼굴에 팩이라도 붙이고 일찍 자. 내일 약속 안 잊어버렸지?]

모단은 입모양으로 툴툴거렸다.

일전에 병원에서 도주했던 날, 혜숙은 다 큰 딸을 손 아프게 두드려 패는 대신 맞선 자리를 들이밀었다.

“팩 하나 붙이고 일찍 잔다고 엄마 딸이 수지가 될 것 같아?”

[너도 참. 그쪽에서도 사진 다 봤는데 설마 수지 나올 거란 기대를 하겠어?]

“같은 편끼리 이러기야?”

[수지는 안 나와도 여자는 나와야 할 거 아니야! 금요일이라고 싸돌아다니지 말고 얼른 들어와!]

“어흐, 진짜…….”

버스가 도착했다. 모단은 자리에 앉아 고민에 잠겼다.

엄마의 지인 중 중매가 취미인 여사님이 한 분 계신데, 이번에 희명 사내어린이집으로 이직했다는 말을 듣고 엄마보다 더 기뻐하셨다고 했다. 조건이 더 좋아졌으니 올해는 꼭 시집보낼 수 있겠다면서.

‘아니, 본인 딸도 아니면서 왜 나를 못 치워서 안달이냐고!’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 댁 딸내미 눈이 더 높나 내 발이 더 넓나 보자고 이를 가셨다 했다.

남자 쪽에서는 마음에 들어 하는데 모단이 딱 잘라서 매번 성사가 안 되니 오기가 발동하신 듯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쁘지 않은 남자들이긴 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결혼적령기를 맞아 선을 보러 나온 괜찮은 남자들 중에 결혼도 출산도 싫다는 여자를 반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창밖을 내다보던 모단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겠다. 아주 학을 떼게 만들어 드려야지.’

***

다음 날, 모단은 느지막이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

“이거 입어, 이거.”

혜숙이 결혼식 갈 때나 겨우 입는 얌전한 원피스를 들이밀었다.

다른 때였다면 청바지에 블라우스 정도면 된다고 우겼을 텐데 선선히 받아 입었다. 화장도 제대로 하고 머리도 청순하게 풀어 내렸다.

“웬만하면 잘 해봐. 무역회사에서 일한다는데 능력도 있고 사람 괜찮다더라.”

“외아들이라며. 난 나 하나쯤 집안의 대를 잇지 않아도 된다, 그런 남자가 좋다니까.”

혜숙이 눈을 부라렸다.

“너는 그렇게 애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유치원 교사를 해?”

“누가 애 싫어한대? 나 애들 엄청 좋아해. 애들도 나 좋아하고. 오죽하면 내 별명이 피리 부는 사나이라니까. 가만있어도 애들이 줄줄 따라서.”

“근데 왜 걸핏하면 애 안 낳는다는 말을 주절대느냔 말이야!”

“굳이 내가 안 낳아도 해마다 뉴페이스 사랑둥이들을 스물 대여섯씩 보는데 뭐 하러!”

“네 애랑 남의 애랑 같아?”

“다를 건 뭐야? 낳기만 하면 대수냐며. 지 새끼처럼 품어 키우는 정은 못 당한다며. 나 우리 애들 그런 마음으로 보고 있어.”

혜숙이 입을 다물었다. 모단이 구두를 신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코끝을 문지르고는 마저 구박했다.

“그래도 그게 아닌 거야. 자궁 뒀다가 생리하는 데만 쓸래?”

“애 낳으면 나보다 애가 먼저가 될 텐데, 그럼 내 인생이 아깝잖아. 자궁이 아까운 게 낫지.”

“엄마는 너 키우는 데 쓴 인생 한 번도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치사하게 감동모드냐. 내가 여기서 말대꾸하면 후레자식이 되잖아.”

“알면 입 꾹 닫고 얼른 나가, 이것아.”

문을 닫기 직전, 모단이 미리 고백했다.

“나 오늘 엄마 체면 못 지켜줄 수도 있어. 그 여사님이 인연 끊자고 할지도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 하고 계셔.”

“너 뭔 짓을 하려고!”

“미안해, 엄마! 나 마지막 맞선 다녀올게!”

“정모단!”

구두 신은 발이 아파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냅다 뛰어 도망친 모단은 곧장 새윤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가게를 보고 있던 은규가 야단을 했다.

“인마! 여장하고 올 거면 미리 예고를 해야 흉한 꼴을 안 보지!”

“여장이라니, 자식이.”

정말로 남자가 하이힐 신은 것처럼 어기적거리는 모단의 걸음을 본 은규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고등학교 입학해서 너 처음 봤을 때 생각난다. 교실 문 열고 한쪽 어깨에 가방 짊어지고 팔자걸음으로 들어오는데 장군신 빙의한 줄 알았잖아.”

“시끄러.”

“근데 하필이면 내 옆자리야. 자연스럽게 쩍벌로 앉더니 머리 벅벅 긁으면서 하품하는데, 와∼ 남중에서 공학 오면서 품었던 환상이 한 방에 날아가더라.”

“편견과 환상은 조지라고 있는 거다.”

머리카락을 풀썩 넘긴 모단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찌뿌둥한 표정을 본 은규가 픽 웃었다.

“맞선남 앞에서도 그렇게만 하면 다신 선 자리 안 들어올 것 같은데.”

“가벼운 소개팅이면 진작 했지. 어른들이 마련한 자린데 그렇게 깨면 되냐.”

“지가 엄청 깨는 거 알긴 아나 보네.”

“그분 이상형이 청순한 유치원 교사라신다. 그래서 오늘 청순의 끝판왕을 보여줄 작정이야.”

모단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은규가 진저리를 쳤다.

“지옥에서 올라온 유치원 교사야, 뭐야?”

딸랑 하고 문이 열렸다. 새윤과 함께 슈퍼에 다녀온 해빛이 모단을 보자마자 외쳤다.

“우와! 선생님, 아니아니, 이모, 공주님 같다!”

“뭐야, 정모단. 맞선 작살낼 거라더니 뭘 그렇게 차려입었어?”

“언밸런스의 묘미를 노리는 거랄까.”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흘린 모단이 해빛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모가 해빛이한테 부탁이 하나 있어서 들렀어.”

“뭔데?”

“그 머리핀 하루만 빌려줘라.”

모단이 해빛의 머리에 꽂혀 있는 핀을 가리켰다. 새윤이 반짝이펠트지를 ‘깜찍이’ 글자대로 오려 직접 만들어준 거였다.

잠시 망설이던 해빛이가 빼가도 좋다는 듯 자그마한 머리를 들이밀었다.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돼, 이모.”

“알았어. 약속.”

모단은 조심조심 핀을 빼서 주머니에 넣고 씩 웃었다.

“다녀올게.”

***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안에서 모단을 기다리고 있던 맞선남은,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에 늘씬한 맵시를 뽐내며 걸어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정모단 씨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모단이 청순하게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사진보다 더 예쁘시다, 오는 데 차는 안 막혔느냐 등의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맞선남은 친절하게 메뉴판을 밀어주었다.

“식사 먼저 고르세요.”

“그럴까요?”

조금 길다 싶은 시간을 들여 메뉴판을 정독한 모단이 해맑게 말했다.

“저는 마늘을 싫어해서요, 갈릭버섯오일파스타 먹을게요.”

“네? 방금 마늘 싫어하신다고.”

“그러니까 갈릭버섯오일파스타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맞선남이 장난이시죠? 하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모단이 뭐 문제 있느냐는 듯 눈만 껌벅이자 헛기침을 하고는 직원을 불렀다.

뻔한 질문과 식상한 대답이 몇 마디 오갔다. 처음 인사를 할 때만 해도 싱글벙글하던 남자의 기색이 한풀 수그러졌을 때 음식이 나왔다.

파스타 한 가닥 먹고, 다소곳하게 냅킨으로 입 한 번 닦고, 참하게 머리 한 번 넘기고를 반복하던 모단이 중얼거렸다.

“아이, 안 되겠다.”

가방 안에서 핀을 꺼낸 그녀가 자꾸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넘겨 고정시켰다.

수줍게 고개를 드는 그녀의 이마 옆에 떡하니 꽂혀 있는 깜찍이 핀을 본 맞선남은 눈을 의심했다.

“그 핀은 조카 걸 깜박 잊고 가져오신 건지……?”

“아뇨. 제 건데요. 제 취향이 스페셜하고 럭셔리한 핸드메이드 쪽이라.”

“하, 하하. 예쁘, 예쁘네요. 아이들 수준에 잘 맞춰주시는 선생님인가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애들은 저를 참 좋아하는데 어른들은 저보고 말이 잘 안 통한다고 그러더라고요.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나. 호호호.”

억지로 따라 웃는 맞선남의 뺨에 경련이 일었다. 걸리적거리던 머리카락이 사라지자마자 아까와는 180도 다른 전투적인 태도로 파스타를 흡입하는 것마저 보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단이 불쑥 말을 던졌다.

“맞다. 제가 왕 재미있는 얘기 해드릴까요?”

“왕 재밌는 얘기요?”

“수학을 제일 잘하는 왕이 누군지 아세요?”

“네? 수학을 잘 하는 왕……?”

“연산군.”

“아아! 네, 연산, 어허허…….”

“그럼 리액션이 제일 좋은 왕은 누군지 아세요?”

“리액션이요?”

모단이 두 주먹을 뺨에 올리고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우왕!”

그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려 가며 웃기 시작한 모단이 ‘웃기죠? 웃기죠?’ 하며 리액션을 강요했다.

“이것도 모르시겠다. 왕이 주차하면 파킹, 왕이 담배 피우면 스모킹, 그럼 왕이 넘어지면?”

“……킹콩이요.”

“어머,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부장님께서 회의 시간에 하신 거라…….”

“부장님이 되게 센스 있으신가 보다. 호호호!”

실컷 분위기를 파괴한 후, 모단은 정색을 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푼수 같았죠?”

“아닙니다.”

손등으로 이마의 진땀을 닦아낸 맞선남이 지나가듯 물었다.

“소개팅이나 선 같은 거 많이 안 해보신 것 같은데…….”

“네. 어쩔 수 없이 몇 번 소개받은 게 다예요. 사실 남자친구 한 번도 못 사귀어봤어요.”

“아, 그래요?”

굳었던 남자의 얼굴이 묘하게 풀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 모단은 마저 연기를 펼쳤다.

“맞다, 친구들이 이런 말 하면 하자 있어 보인다고 하지 말랬는데.”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다시 조용해졌다. 대화가 뚝뚝 끊기는 것이 조짐이 좋았다.

이쯤 하면 됐겠지 싶어진 모단은 안심하고 파스타를 삼켰다. 그런데 맞선남이 훅 치고 들어왔다.

“모단 씨, 제가 모단 씨 별명 맞춰볼까요?”

“네?”

“점모단. 맞죠? 퐈하하핫!”

‘확 죽여 버릴까?’

실제로 학창 시절 내내 들었기에 치를 떠는 별명이다. 근데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갑자기 뭐야? 아까까지만 해도 지네 부장님 보는 눈이더니 왜 한술 더 뜨고 난리야?’

원래 아재감성이 풍부한데 감추고 있다가 저와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폭발시킨 건지, 아니면 제게 맞춰주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에 빠진 그녀의 표정을 본 맞선남이 머쓱해했다.

“농담이었습니다. 코에 있는 미인점이 너무 매력 있으셔서. 전지현이나 한가인 같은 미녀들한테만 있는 점이라죠?”

“요새는 돈만 주면 다 찍어요.”

“엇, 그럼 혹시 모단 씨도?”

“아뇨.”

“역시! 점도 그렇고…….”

맞선남의 시선이 눈코입을 지나 슬그머니 내려왔다.

“다 자연산이신 것 같네요.”

‘이런 미친…… 내가 광어냐?’

보려면 티라도 안 나게 보든가. 꼭 붙는 원피스 위로 도드라진 볼륨을 훑는 시선을 눈치챈 모단의 표정이 싸해졌다.

“모단 씨, 볼수록 아주 귀엽고 순수하신 분 같아요.”

정말 순수했다면 못 알아봤을 텐데, 단박에 촉이 왔다.

“천연기념물…… 같달까.”

남자친구 한 번 안 사귀어봤다는 데서 모종의 의도가 생긴 게 분명했다.

나이가 있으니 말도 안 통하고 취향도 안 맞고 모태솔로이기까지 한 여자는 부담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계산 착오였다.

“맛있게 잘 드셔서 저까지 배가 부르네요. 다 드셨으면 자리 옮겨서 가볍게 맥주 한잔 어떻습니까?”

해도 안 졌는데 술을 권하는 속내가 빤히 보였다. 이게 아닌데 싶어진 모단은 급히 태세를 전환했다.

“맥주 별로 안 좋아합니다.”

날마다 마시는 맥주 캔을 모아다 팔면 월급 두 배 받겠다던 혜숙의 구박이 떠올라 좀 찔렸다.

“그럼 소주? 이야, 내 취향이시네.”

“오늘은 소주도 아닌 것 같구요.”

“그럼 와인으로 할까요? 근처에 괜찮은 와인바가 있는데.”

“와인도 별로요. 그냥 술이 별로네요.”

“안주빨만 세우셔도 괜찮습니다. 모단 씨라면 다 용서해 줄 테니까 얼른 일어나세요. 갑시다.”

순진한 척을 했더니 만만하게 본 건지, 처음과는 달리 태도가 은근히 고압적이었다.

결국 모단은 청순에 이어 상냥의 끝까지 보여주기로 했다.

“잠깐만요.”

벌써 몸을 일으켰던 맞선남이 돌아보았다. 모단은 맞선남의 접시를 가리켰다.

“여기 버섯 남았잖아요. 편식하면 못 써요.”

“네?”

그가 잘못 들었나, 하는 눈을 했다. 모단은 심각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면 안 되죠. 이 버섯을 키우고 요리한 농부님과 요리사님의 정성을 생각해 봐요. 남기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어허허, 장…… 장난이시죠?”

“장난 아닌데요. 알러지가 있어서 먹으면 위험한가요?”

“그건 아니고 원래 버섯을 안 좋아…….”

“그럼 먹어요! 골고루 잘 먹어야 쑥쑥 크고 튼튼해진다니까! 정 힘들면 딱 한 입만!”

“그, 그럼 한 개만…….”

모단의 기세에 눌린 맞선남이 엉거주춤 앉았다.

그가 포크를 잡으려는데 모단이 냉큼 낚아챘다. 접시 위에 남은 버섯을 포크로 싹싹 긁어모아 거대한 한입을 만들고 방긋 웃었다.

“아, 해보세요.”

“그건 한입이 아니라……!”

“따라 해보라고요. 아!”

주변 테이블의 손님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모단은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양 집요하게 포크를 들이밀었고, 황당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진 맞선남은 새빨개진 얼굴로 마지못해 버섯을 받아먹었다.

“잘했어요. 어때요, 맛있지요? 꼭꼭 씹어요, 꼭꼭! 냠냠! 꿀꺽! 그렇지!”

“우읍!”

쪽팔림과 물컹한 식감을 이기지 못한 맞선남이 헛구역질을 했다. 모단은 놀란 눈을 했다.

“어머,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직업병이 도져서.”

“괘, 괘안슴미다…….”

“정말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에, 에에…….”

“스읏, 어딜 뱉으려고. 입에 물고 있지 말고 빨리 삼켜요. 음식 입에 물고 있으면 이 썩는다고. 꼭꼭! 냠냠! 꿀꺽!”

“으어어…….”

아마도 이 남자, 한동안 걸쭉한 ‘꼭꼭 냠냠 꿀꺽’의 환청에 시달리며 괴로워할 듯했다. 은규의 말대로 지옥에서 온 유치원 교사가 따로 없었다.

“거슬리는 걸 보면 어떻게든 고쳐 놔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물론 애들한테는 절대 강압적으로 안 하는데 다 큰 어른들한테는 성질대로 하게 되더라고요. 세상 피곤하고 짜증 나는 스타일이라고 남자한테 수도 없이 차여놓고도 정신을 못 차려요, 제가.”

간신히 버섯을 삼키고 물 한 컵을 원샷한 맞선남이 반쯤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까는 남자친구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다고…….”

“어머, 말실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가 황급히 일어섰다.

“돼, 됐습니다. 얼른 일어나죠.”

“와인바 가나요? 양송이버섯치즈구이가 먹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아뇨! 갑자기 아주 중요한 일이 생각나서요.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맞선남이 도망치듯 카운터로 향했다.

모단은 얼른 가방을 챙겨 뒤따라갔다. 그러고는 강력하게 더치페이를 주장했다. 싫은 사람에겐 몇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조차 얻어먹기 싫은 법이니까.

제 몫의 식사를 제 카드로 긁고, 맞선남이 나머지 계산을 하는 사이 조금 떨어져 서 있던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어느 한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우와아.’

한 여자가 입구에 서서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화려한 차림이 기막히게 잘 어울렸다. 맑은 피부와 또렷하고 동글동글한 이목구비, 특히나 도톰한 연다홍빛 입술에서 사랑스러운 생기가 감돌았다.

반쯤 넋을 놓고 그녀를 보고 있던 모단은 나가자는 맞선남의 말에 시선을 떼어냈다.

“어떻게 댁까지…….”

레스토랑 앞, 데려다줄 것처럼 운을 뗐던 맞선남이 흠칫 요상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바꿨다.

“댁까지 혼자 가실 수 있으시죠? 제가 좀 바빠서.”

어떻게 해보려다 영 아닌 것 같으니 태도가 싹 바뀌는 건가. 속으로 혀를 찬 모단은 마찬가지로 태도를 바꿔주었다.

“신경 끄고 알아서 가쇼.”

맞선남은 기다렸다는 듯 사라져 버렸다.

모단은 그대로 서서 식당 앞 길가에 무심히 시선을 던졌다. 작정하고 차인 건데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아까운 내 주말.’

더 비참해 보이라고 바람까지 불었다. 어깨를 부르르 떤 모단은 그제야 식당 안에 코트를 놓고 나왔음을 깨닫고 몸을 돌렸다.

“헉!”

짧은 비명을 내지른 모단이 저도 모르게 삿대질을 했다.

“뭐, 뭐, 뭐, 뭐야!”

제 코트를 한 팔에 걸친 견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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