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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19화 (219/220)

219화. 에필로그 (9)

나는 담요에 싸인 채 루시페우스에게 안겨 마법으로 보온된 침낭 속에 누워 있었다. 유일하게 공기에 노출된 부분은 얼굴뿐이었지만, 도대체 몇 겹의 결계를 쳤는지 조금이라도 쌀쌀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없었다.

그리 안락하고도 포근한 연인의 품 안, 눈 한가득 쏟아지는 은하수….

“아, 이런 건 지난 생에도 못 해본 건데.”

“그건 정말로 영광이군요.”

그의 담백한 입맞춤이 코끝에 내려앉았다.

동대륙으로 여행 가자는 말에 흔쾌히 동의한 것과 별개로, 루시페우스는 여정 내내 내가 조금이라도 힘들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면서도 제가 지난 방랑에서 찾았던 아름다운 것들을 내가 마음에 들어 할 때면 대단히도 기뻐하는 것이었다.

지금 역시, 그의 목소리가 나만이 알아챌 수 있는 방식으로 들떠 있었다.

나 또한 그 모든 황홀한 풍경에 내내 설렜고….

“있지.”

“예.”

“내가 전생에는 술도 진짜 잘 마셨거든.”

“갑자기, 술요.”

내가 불쑥 내뱉은 이야기에 루시페우스의 웃음소리가 내 정수리를 간지럽혔다.

“그날도 진탕 마셨지. 이렇게 밤하늘을 보면서. 거기선 별이 하나도 안 보이지만.”

그날.

그게 언제를 말하는 건지 대번에 알아차린 듯, 내 머리칼을 스치는 그의 숨소리엔 웃음 비슷한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나는 슬픈 일이 있어서, 강변에서 혼자 울면서 술을 먹고 있었는데.”

“전생에도 아주 술꾼이셨군요.”

반어법으로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가 제 코끝으로 내 머리를 콩 부딪었다.

실은 지금도 밤이 추울 거라며 마검사들이 들고 다니는 위스키를 한 모금 뺏어 마신 참이었으니까.

덕분에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가볍게 피어올랐다.

“얘기 나눌 사람이 없으니까 심심해서 로맨스 소설을 읽었거든. 산간벽지에서 상경한 분홍 머리 아가씨가 금발의 천사 같은 공자님을 만나 이런저런 역경 끝에 사랑을 쟁취하는.”

“그건….”

“그런데 남주인공의 정적인 냉혈한 남자 하나가 그 여주인공에게 꽂혀서는… 읍.”

“예. 무슨 이야긴지 알겠습니다.”

안 들어도 빤하다는 듯, 루시페우스가 손가락 끝으로 내 입술을 다물리듯 가볍게 집었다.

“얄미우십니다. 제 바보 같은 전생 이야기인 거죠.”

“왜애, 그 소설은 다 엉터리잖아.”

나는 반항하듯 반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데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낯은 평소의 단단함을 잃은 채였다. 마치 곧 울 것도 같고, 웃을 것도 같이….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그의 눈가엔 아무런 물기도 없었지만, 왠지 그의 눈물을 닦아내 줘야 할 것 같아서….

“아뇨, 그런 문제라기보다….”

루시페우스가 그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의 눈을 훑던 손끝에, 손날에, 손바닥에 그의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이내 그는 내 손목 위 맥박이 뛰는 곳에 깊게 입을 묻었다.

“당신께서 안 계신 삶이 엉망인 건, 당연한 일인걸요.”

“…경.”

“어쨌든 오셨고, 제가 곁에 있게 허락해 주셨잖습니까.”

그의 얼굴이 내게로 떨구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그저 부드럽게 맞대는 것에 불과한 입맞춤이었다. 윗입술을, 아랫입술을, 또 양쪽을 한 번에 머금은 뒤에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별빛을 등진 남자의 안경 너머에서 붉은 눈동자가 애처롭게 빛났다.

“그러지 않으셨다면 저는 또 그런 삶이나 살다 죽었을 겁니다.”

“또, 울보 신사님이야.”

어느새 그의 눈가에 별빛이 은은하게도 고여 있었다. 내가 쿡쿡 웃으며 그의 눈시울을 찍어내자 내 손끝에 말간 물방울이 묻어났다.

“당신께서 괴롭히지만 않으시면 울 일도 없는데요.”

“내가 뭘 괴롭혔다고 그래?”

내 샐쭉대는 말소리에, 이내 그의 낯에 번진 건 가눌 수 없는 행복이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듯 웃으며 내 어깨를 안은 손을 바투 당겨, 내 어깨가 제 가슴에 온전히 맞닿게 했다.

꼼짝없이 그의 품에 파묻히자 그의 조각 같은 옆얼굴 너머로 아름다운 밤하늘이 빛났다.

“이렇게… 제 기억 속 가장 아름다운 공간에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당신이, 제게 이리 다정한 눈빛을 보내시면서….”

거기까지 말한 그가 고개를 내려 내 관자놀이에 입을 쪽, 맞췄다.

“얄미운 소리를 하시는 것 말이지요.”

“경이 울보 맞네. 고작 그런 걸로 다 울고.”

히히, 나는 그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적당히 빠른 박동이 별의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도 경이랑 함께하게 된 이 삶에서 더 행복해. 이젠 혼자 술 먹을 일도, 외로워서 소설만 들입다 볼 일도 없으니까.”

제 품에서 내가 웅얼대듯 한 말이 다 들렸는지, 나를 끌어안은 그의 팔이 더욱 단단하게 얽혔다.

그러고도 또 한참, 서로의 온기와 품을 느끼며 한가지로 안겨 있다가….

“아.”

타이밍을 재던 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의 품에서 떨어져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웠다.

“작은 달은 떴을 거 아냐.”

큰 달은 그믐이지만, 작은 달은 이제 막 통통한 초승달이 됐을 테니 말이다.

어디 보자아…. 나는 마치 별 무리가 쏟아진 하늘이 내 눈앞의 화면인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여 이곳저곳을 헤집었다.

은하수가 찬란히도 빛나 작은 달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작은 달이라 불릴 만큼 몸집도 작았고, 아직 반달이 되려면 멀었으니까.

“저기, 저쪽 끝에 보이는군요.”

“아, 그러네.”

루시페우스가 내 손을 쥐어 옮긴 쪽에 작디작은 초승달이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다.”

“…그러게요.”

나를 이 세계에 불러준, 그에게 두 번째 삶을 준, 그러니까 우리를 만나게 해준 신이 기거하는 곳.

“소원 빌래?”

아수라마수라의 풍습으로는 1년에 한 번 작은 달의 보름날에 소원을 비는 거긴 했지만.

“달의 신이 약속했거든. 내가 비는 소원은 다 들어준대.”

“…예?”

“심지어 내가 원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줄 수도 있다고 말이야.”

“그러…십니까.”

어째선지 내게 대꾸하는 루시페우스의 말소리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 소원을 비시려고….”

“엥?”

조금 전까지 서로 만나서 행복하다고 해놓고, 참.

이 남자의 습관적인 체념이 남 일 같지 않아, 나는 푸후 웃음을 터뜨렸다.

“안 가, 안 가. 내가 경을 두고 어딜 가?”

“…가고 싶어지시면 꼭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럴 일 없다니깐.”

이거 참, 마음속을 까 보일 수도 없고.

나는 원망스러운 마음에 손끝으로 그의 귓가를 갉작였다.

“아무튼, 소원 빌자. 내 소원 들어준댔으니, 경 소원도 들어주지 않을까?”

“…그러죠.”

내 낯을 흘끗하며 근사하게도 입꼬리를 늘이는 그의 볼에 입을 쪽, 맞춘 뒤 나는 다시 똑바로 누워서 손을 모았다.

“경도. 손 모으고, 눈 감고, 경건하게.”

“…예.”

내가 허리를 쿡쿡 찌르자, 루시페우스는 고분고분 내 말을 따랐다. 한쪽 팔을 내가 베게끔 내어준 탓에, 내 목을 안으며 모아 쥔 그의 손이 내 코앞에 자리했다.

“구체적으로 빌면 꼭 들어줄 거야. 우리 이야기는 다 듣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으니까.”

달의 신에 따르면 한 번도 소원을 빈 적이 없다는 루시페우스를 위해, 나는 대단찮은 말을 엄청 중요한 비밀처럼 주워섬겼다. 그는 그저 기분 좋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꾸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천천히 눈을 뜬 우리의 낯은 장난스레 시작한 것치고 나름 진지해져 있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

“…그걸 서로 밝히는 건가요?”

“널리 널리 말하고 다녀야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도와주지.”

나는 한 번도 소원을 빌어본 적 없는 연인에게 사기를 쳤다.

끄응, 루시페우스는 곤란하다는 듯 침음하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당신께….”

그는 어떻게든 말을 늦추려는 듯 코끝을 잠시간 긁적거렸다.

“좀 다른 식으로 불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요….”

“다른 식?”

“실은 당신께 성을 받고 싶었습니다만, 폐하께서 주셨잖습니까….”

“성이 아니면, 이름? 경 이름 바꾸려고?”

나는 그대로 몸을 뒤집어 그의 가슴팍에 기대며 천진하게 물었다.

실은 그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내 입가에 자꾸만 웃음기가 배었지만, 멋쩍어하기 바쁜 루시페우스의 눈동자는 계속 다른 곳만 배회하느라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꾸는 게 아니라, 제 이름이 너무 기니 급할 때 힘들지 않습니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도 그랬고….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쑥스러워하는 것이 정말로 보기 드문 일이라, 나는 알아듣지 못한 척 계속 능청만 떨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길어서 멋있는데?”

“그러는 당신께서는요.”

“응, 나는 경 소원 들어달라고.”

그제야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내가 내내 생글대고 있던 걸 알아챈 그의 귀 끝이 붉어졌다.

“또 저를 괴롭히시고….”

“사실은 다른 거 빌었어.”

내가 냉큼 덧붙인 말에 그의 콧가에 짧은 웃음이 스쳤다.

“경에게서 아주 예쁜 다이아몬드 반지 받고 싶다고.”

“…….”

“그래 줄 거지?”

“그 말씀은….”

루시페우스의 붉은 눈동자 아래로 다시금 엷은 빛무리가 어렸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의 눈초리를 타고 반짝임이 흘러내릴 때쯤, 그의 손이 제가 아침에 꼼꼼히 땋아 주었던 내 머리칼을 풀어 내렸다.

“…당신은, 당신은 정말….”

그러고도 한참 말을 잇지 못한 채, 제 손에 내 머리칼을 얽어 몇 번이고 쓰다듬어 내렸다.

“정말이지….”

“내 생일 선물이야.”

생일 축하해, 마지막 말소리는 그가 내 얼굴을 제게로 당기면서 사그라들고 말았다.

동대륙에서 귀환한 나를 반긴 건 새해부터는 전략실에 지방 영지 감찰 임무를 맡기겠다는 황태자 보좌관실 명의의 공문과,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약혼식 초대장이었다.

「아멜리 로즈버리 힐베르크와 레오폴트 아우렌바흐가 후일 하나가 되기를 약속하는 자리에 초대합니다.」

‘맙소사, 웬일이야, 약혼이라니…!’

내 친구 레오가 십몇 년을 기다린 운명과 백년가약을 맺는다니…!

물론 십몇 년 동안 종소리를 기다리게 한 건 나였지만….

‘공제눈’이 소설이 아님을 알아도, 그들의 결혼이 이 세계의 해피 엔딩은 아니어도, 여하간 내가 평생을 기다려온 순간이 아니던가.

‘당장 결혼 못 한다고 섭섭해하더니, 약혼식이라도 먼저 치르는구나.’

힐베르크의 비극의 전말이 드러난 데다 그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영지가 늘어나면서, 후작 부녀가 바빠진 탓에 당분간 혼인은 언감생심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아멜리 본인이 소후작으로서의 업무에 적응해야 했으니까.

‘아무튼, 잘된 일이야.’

나는 기쁜 마음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기꺼이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썼다.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약혼식은 황성을 품은 생장크트산에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할 무렵에 열렸다.

장소는 황성 외곽의 아우렌바흐 공작저.

황실파의 수장인 아우렌바흐의 후계자의 약혼식임에도, 친지들 위주의 정찬회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힐베르크의 권세가 아직 안정되지 못한 것을 배려하는 차원이었다.

“전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저희 누옥을 전하께서 찾아주신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마지막으로 오셨을 때가 이 늙은이 눈에 선명한데, 이렇게 장성하셔서 부마 삼으실 분까지 함께 오시고.”

내가 루시페우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려서자, 레오폴트를 비롯한 아우렌바흐들이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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