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에필로그 (8)
“이번 일이 잘 풀려서 은근슬쩍 넘어가긴 했지만, 전략실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언젠가 귀족들이 반발할 거예요.”
“그렇지. 뒤가 구린 자들은 다 처벌했는데 아직도 감시하느냐며 황실에 반감을 가질 테니.”
“필요하다면 아직 첩보망을 설치하지 않은 서대륙이나 남대륙에서 활동하게 할 수도 있고요, 지방 영지들을 돌아다니며 감찰하는 것도 괜찮겠어요. 이번 일로 새 영주를 맞이한 곳이 많으니까요.”
“…하긴. 에리난트 백작이 함께 있으면 네가 그만큼의 호위를 몰고 다닐 이유도 없으니 네 기사들의 가동 범위가 넓어지겠구나.”
그레이스가 일리 있다는 듯 주억이며 포도주로 입을 축였다.
“언니께서 안배하시는 일이면 뭐든 받아들일 테니, 신년 첫 정무 회의 때 알려주셔요.”
“정무 회의에서 알려달라고? 그렇다면….”
그레이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남편인 에델 공을 쳐다보았다. 20년 차 부부는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알아챘다.
짧게 묶은 연갈색 머리칼이 푸근한 인상을 주는 내 첫 형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무 회의 때 알려 달라시면, 새해가 될 때까지 외유하실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첫 달 첫날이 그 사람 생일이어서요.”
나는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으리만치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내 언니 부부는 내게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황실을 안 떠나겠다고 노래하던 애가 마음을 바꾸니 무섭네요, 여보….”
“예, 저도 꽤 낯섭니다….”
그저,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을 뿐.
“너는 이번이 처음이구나?”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노파는 내가 무릎을 대고 앉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했다.
“재밌네, 재밌어.”
노파의 새까만 눈동자가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영혼까지 간파하는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황성을 떠나고 한 달.
기차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동쪽의 오테스트항으로, 거기서 배를 열흘간 타고 동대륙으로, 또다시 말과 마차를 바꿔 타며 동대륙의 남쪽에 자리한 노파의 집까지.
몇 달 전의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여정이었다.
순간 이동 마법으로 안 되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루시페우스는 저 혼자서라면 몰라도 나를 데리고는 절대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겠다며 일축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의 일이 그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던지라, 그의 과보호가 한층 엄중해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여정에도, 제 마법은 내 안위를 위해서만 쓸 테니 추가 경호 인력이 필요하다며 마검사들을 데려온 참이었다.
“그런 세계가 있구나. 신기한 풍경이네.”
“헤헤, 풍속도 많이 다르죠?”
루시페우스는 내가 깍듯한 노인 공경을 선보이는 모습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그래. 하지만 제대로 된 나무 하나 보이질 않으니, 나는 거기 가서 살라 하면 억만금을 준대도 사양이다.”
아하하, 나는 노파의 말에 허물없이 웃었다.
“그렇게 멀리서 오면 영혼이 부서지는 건데…. 달의 신이 네 영혼을 다시 빚었구나?”
“달의 신을 아세요?”
“나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아무튼 알기야 알지.”
하긴, 달의 신은 우리에게 이런 기적을 일으킨 만큼 정말로 존재하는 신. 그러니 다른 문화권에서도 신으로 추앙될 법했다.
“그리고… 응, 그래.”
나를 들여다보던 노파의 바둑알 같은 눈동자가 떼구르르 굴러 루시페우스를 향했다.
“신기한 일을 했네.”
“네?”
“네가 여기에 온 게 저 애와 연관이 있냐?”
“네에?”
그, 그런 것도 보이나요…? 나는 깜짝 놀라 눈동자를 떨었다.
루시페우스의 신성력을 처리할 방도를 맞게 알려준 데서도 영험하다 싶더라니, 정말 족집게가 따로 없었다.
“네, 이 사람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저를 불러왔다고 했어요.”
“그렇구먼.”
“왜요?”
“으응, 네 영혼이 부서졌던 걸 저 애를 써서 붙여놨구나.”
그 말이 썩 와닿지 않아, 나는 다시금 루시페우스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니 너희의 연결 고리가 한둘이 아니고….”
노파가 말하는 연결 고리가 단순한 인연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직감이 들어, 나는 재빨리 물었다.
“저, 제가 어렸을 때 꿈에서 이 사람을 보았어요. 그게 이 사람의 꿈이 아니라 현실하고 연결돼 있었다 하고요.”
“오호라.”
“그리고….”
영험한 분을 만나서일까, 달의 신에게 미처 묻지 못했던 궁금증들이 입 안에서 넘실거렸다.
‘하지만 이 이야길 하는 건 정말 처음인데…. 괜찮을까?’
나는 흘끗 루시페우스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의 무릎 위에 말아 쥔 주먹을 감싸 쥐며 조심스레 말했다.
“이 사람이 굉장히 불안정해질 때가 있었는데…. 그,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성력을 버리기 전에 말이에요.”
“으응, 그래. 저 애한테 뭐가 너무 많았지.”
“그런데 이 사람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괴로워하게 되면, 이 사람이 보는 게 제게도 보였어요.”
나는 노파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야기했지만, 놀란 루시페우스가 나를 쳐다보는 게 선명히도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시야가 저와 공유됐달까요….”
“으음.”
노파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루시페우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 당연한 일이지.”
“당연…요?”
“달의 신이 네 영혼을 복구하면서 이 애의 걸 아교풀처럼 갖다 쓴 셈이야. 그렇게 너희들이 엮여 있으니, 이 애의 영혼이 날뛰면 너한테 영향이 갈 수밖에.”
아하…. 나는 노파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달의 신이 나와 루시페우스의 무의식을 연결해 줬다더니, 이 역시 같은 맥락인 모양이었다.
“저, 이게 무슨….”
루시페우스가 내 손을 작게 흔들었다. 내가 혼자서 수긍하는 사이 그에게는 더없는 의문과 혼란이 가득 찬 듯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듯 손을 토닥였다.
“있지, 어렸을 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있잖아.”
꿈에서 말고, 직접 처음 만난 날 말이야.
그때를 떠올리는지 루시페우스의 낯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내가 그 후미진 골목 구석에 쓰러진 아이를 발견한 게 신기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예….”
“그때 그 아이가 너무도 괴로워해서, 그 골목까지 비틀대며 숨어 들어가는 동안 본 것들이 나한테도 보였나 봐.”
아…. 소리 없이 탄성을 낸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생각에 빠져 얼마간 말을 빚지 못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너덜너덜했던 차림새로 보아 어린 루시페우스는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험한 꼴을 당했던 게 분명했다.
내가 그를 달래려고 토닥였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뜨거웠었고.
“세르니타에서도 그랬고,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내가 달의 신을 만나러 갔을 때도 그랬어.”
번번이 크게 충격받은 그의 내면에서 신성력과 마력이 뒤엉켰고, 그래서 그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와 연결돼왔던 거였다.
우리가 어린 시절 내 꿈을 통해 서로 이어졌던 것처럼.
“하지만, 이젠 다 괜찮으니까.”
루시페우스가 감정적으로 동요할 일이 생긴대도 전처럼 불안정해질 일도 없고, 무엇보다 이제 우리가 함께 있으니까.
무의식의 연결 고리에 의지하지 않아도 서로를 찾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
내가 생긋 웃자, 그의 입가에도 그제야 은은한 호선이 깃들었다.
우리는 이튿날 노파의 집을 떠났다.
루시페우스가 여기 올 때마다 며칠씩 머물렀다 하니 더 머무를 법도 했지만, 우리에게 딸린 식구가 너무도 많았다.
<전하, 이 향신료 이름이 뭐랍니까? 빼면 안 되나요?>
<전하, 여기는 포크를 안 쓰나요? 이 막대기처럼 생긴 것, 쓰기가 너무 어려운데.>
<전하, 여기 이상해요…. 뭐가 문제인지, 마도 기계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서대륙과 동대륙은 본대륙을 사이에 끼고 있는 만큼 교류가 없는지라, 이곳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한 마검사들의 민원이 빗발쳐 나를 괴롭게 한 것이었다.
말조차 안 통하는 그들이 노파 모녀에게 민폐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날짜를 맞춰 루시페우스와 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잘 지내다 갑니다. 어르신도, 리타 씨도 감사했어요. 건강하시고요.”
노파의 집을 떠나며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저, 그리고….”
루시페우스가 품을 뒤적이더니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거기서 툭, 떨어져 나온 건 얼마 전까지 그가 요긴하게 쓴 나침반이었다.
“잘 썼습니다.”
“쓸모가 있었다니 다행이구나.”
“처음 받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처음 받았을 땐 뭐,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끝나지 않았니?”
루시페우스에게서 건네받은 나침반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노파가 낄낄 웃었다.
“와줘서 고마웠다. 너희들 덕에 내가 재밌는 구경도 다 했구나.”
동대륙의 배꼽은 노파의 집에서 걸으면 꼬박 보름이 걸린다고 했다.
정처 없이 떠돌던 그때의 루시페우스와 달리 우리에겐 확실한 일정이 있어서, 우리는 다시금 말과 마차를 번갈아 타며 이동했지만.
그리고 마침내 분지를 둘러싼 산맥의 깊디깊은 골짜기를 통과했을 때.
동쪽 끝에 밤이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아래로 끝을 알 수 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겨울의 마른 억새풀이 넓디넓은 분지를 가득 메운 그 장관….
<와, 여기서도 마도 기계 다 먹통이야.>
<동대륙이 신비의 땅이라더니, 그게 진짜인가?>
<어제 샤먼 댁이랑 여기에만 뭔가 수상한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아….>
루시페우스가 전생을 기억하게 됐다는 동대륙의 배꼽은 그의 말마따나 초자연적인 공간인 모양이었다.
마력에 대해 간섭 작용이 일어나는지, 마도 기계에 의존하는 하디 일행은 마법을 쓸 수 없어 잔뜩 투덜대었다.
<요즘 루시페우스 경한테서 마법 배우잖아. 그거 연습이나 해.>
<으, 매정하셔라.>
<마스터의 고매한 가르침을 따라가기에 저희의 그릇이 너무 부족한걸요…. 흑흑.>
<연습, 예, 해보긴 하겠습니다만….>
내가 에둘러서 조용히 하고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한 말에 마검사들은 부러 엄살을 떨었다.
우리의 여행을 경호하는 대가로 그들은 루시페우스에게서 그의 마법 술식을 배우고 있었다.
마탑에서 어렵게 공부하지 않아도 쓸 수 있게끔 만들어진 술식은 그 원리가 간단했지만 그만큼 마력을 정교하게 제어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마검사들은 루시페우스의 불친절한 설명에 늘 애를 먹었고, 덕분에 마법 연습이나 하라고 하면 한동안 조용히 있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루시페우스가 억새풀이 듬성듬성 난 곳을 정리해서 하룻밤 지낼 곳을 만들었다.
“아무리 이 지역이 태양의 길에 가깝다지만, 고산지대라서 밤에는 추우실 텐데…. 정말 이런 데서 야숙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경이 마법도 써줄 거고, 꼭 안아주기도 할 건데 뭐 어때?”
그리 말하며 허리를 껴안자,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참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쪽, 이마에 내려앉는 짤막한 입맞춤과 함께 내 머리에 씌워져 있던 사냥 모자가 떨어져 나갔다. 하나로 땋아 내린 내 머리칼이 순식간에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머물 곳을 마저 정비한 뒤 마지막 마을에서 사 온 것들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마검사들이 이곳의 신비를 연구하겠다며 눈치껏 멀리 떨어졌을 때.
어느새 완연한 밤을 맞이한 하늘에는 그믐이 된 큰 달이 자취를 감추어, 오로지 이리저리 무리 지은 별들만이 밤하늘을 빼곡히 물들이고 있었다.
“정말 경이 말한 대로네.”
“제가 무슨 말을 했었죠?”
“우리 불꽃놀이 보러 갔을 때, 동대륙에는 은하수가 보이는 곳들이 많다고 했었잖아.”
“아, 그런 걸 다 기억하시는군요….”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나를 담요째 끌어안은 남자의 가슴팍이 기분 좋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