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에필로그 (7)
“그럼 나는 이제 경을 뭐라고 부르지? 공이라고 하자니 너무 거리감 느껴지고.”
“경이라고 부르시는 건 거리감 안 느껴지시고요?”
“그건 입에 붙어서.”
내가 배시시 웃는 낯을 바라보며, 루시페우스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내가 아무런 기미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고개만 갸웃거리자, 그는 이내 한숨만 뱉고 말았다.
“저야 뭐라고 하시든 따를 수밖에 없잖습니까. 부디 레이디 작은 별께서 편하신 대로.”
“그래, 경.”
계속 그렇게 부를게, 나는 그의 볼에 짧게 입 맞췄다.
루시페우스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좁아졌으나, 곧 포기한 듯 짧게 웃고 마는 것이었다.
‘사실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지 짐작은 가는데….’
흠흠,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화제를 바꿨다.
“겔프 영식을 집사로 채용하는 건 어때?”
“율리안을요?”
나는 어른 루시페우스가 더 이상 관심 없다고 한 빵에 미트볼을 얹어 그의 입에 넣어주면서 말을 이었다.
“저택 공사 마무리되면 사용인들도 새로 뽑고 교육해야 할 텐데…. 사람 부려본 적 없는 내 남자라면 믿을 만한 이를 들이는 게 낫지 않겠어?”
루시페우스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는지 미간을 좁혔다.
그처럼 루시페우스에게 뭘 바라고 접근하는 자들은 앞으로 넘쳐날 거였다.
‘율리안 겔프는 그나마 친구에다, 사정을 서로 잘 알기라도 하지.’
그러니 그 전에, 루시페우스의 곁을 한 사람이라도 더 믿을 만한 이로 채워둬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사용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고….”
“으응, 나한테 필요하지.”
“당신께요…?”
“나는 원래 남들이 다 해주는 거만 받고 살아서, 사용인이 넉넉하지 않으면 곤란하단 말이야.”
물론 그 풍족함을 내 남자가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큰 거였지만.
암조 기사들이 저택의 경호를 두고 농담할 때는 못 할 소리를 한다는 양 굴었지만, 기실 나라고 해서 이 저택에 와서 사는 미래를 상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정작 집주인이 그에 대해 생각지 않았던 듯했다.
“아, 그러니까….”
당혹스러운 낯으로 입가를 가린 채 생각에 잠긴 걸 보니 말이다.
“그게, 그…렇군요.”
…또 나만 앞서 나갔지?
나는 서운해진 마음에 샐쭉거리며 그의 손을 걷어냈다.
“됐고, 대신전 다녀온 얘기나 해봐.”
지난주 수확제의 개회연 이후로 둘 다 일이 많았던지라, 이렇게 평온히 대화하는 게 실로 간만이었다.
특히 루시페우스가 바빴다. 이 저택을 인수하여 공사할 준비를 하느라, 옛 알비누스령의 밀린 공무를 보느라.
아직 원로원의 행정 절차가 남아 정식으로 백작 위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수확철인 만큼 어쩔 수 없었다.
“촌장 용건은 뭐였대? 진짜로 감사 인사 전하려고?”
그 수많은 일 중에 가장 중요했던 건 빨간 눈의 마을 주민들과 만난 것.
“백부님께로부터 제 얘기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고마웠던 것도 고마웠던 거지만요.”
“아하. 다른 데서 나고 자란 빨간 눈이라니 궁금했나 보구나.”
“예. 저를 좀 불쌍해하는 것도 같았고요….”
루시페우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빨간 눈의 마을 사람들로서야 어린 시절부터 밖에서 저 홀로 빨간 눈인 줄 알고 자란 그를 안쓰럽게 여기는 게 당연할 거였다.
그에겐 이런 관심이 다 낯설 테지만.
“언제까지 대신전에서 지낼 거래?”
“다들 외상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이 문제였는데, 얼추 다 회복했다고 합니다. 마기가 사라졌다니 얼른 돌아가서 마을을 돌보고 싶어 하더군요.”
“흐응, 역시 내 집이 최고다, 이건가….”
“백부님께서도 이번 일로 아예 환속하시고 마을로 돌아가실 거라고 하고요.”
킬리온을 언급할 때면 루시페우스는 조금 더 따스한 낯을 지었다.
같은 알비누스 후작의 피해자여서일까, 빨간 눈을 숨긴 채 살아가는 삶을 서로 이해해서일까.
킬리온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임에도 꼬박꼬박 그를 백부라 칭하는 것이었다.
루시페우스가 그를 일종의 가족으로 대하는 셈이라, 나는 킬리온을 용서한 지 오래였다.
“마을이 새로운 영지로 편입되고 그 영주가 경이라는 것도 말했어?”
“아뇨, 그건 아직….”
루시페우스의 낯에 미세한 쑥스러움이 깃들었다.
“왜, 촌장하고는 직접 연락하고 지내야 할 텐데. 그 사람들이 마음 놓고 대륙 안쪽에서도 지낼 수 있도록 눈 색깔 드러내고 다닐 용기도 냈으면서.”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영 멋쩍어서 말이죠…. 자연히 알게 될 일 아니겠습니까.”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꿈에서 보던 그 아이의 것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그의 안경을 살짝 들어 올려 그의 눈꺼풀에 가볍게 입 맞췄다. 마법으로 그 색을 가리건 가리지 않건, 남자의 눈동자는 나를 눈에 담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난다.
“그럼, 내년 봄까지 그 멋쩍은 마음 좀 극복해봐.”
“봄까지요?”
“에스메르 명의로 알비누스 상단 입찰에 참가할까 해.”
“에스메르를 계속 운영하시려는군요.”
“기왕 만든 건데, 뭐.”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겠다, 이번 일로 전략실의 정체가 탄로 났겠다. 암조 업무도 슬슬 전환할 때가 됐지만, 상단은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많은 법이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 당연히 낙찰받을 거고. 사세를 확장하자면 직원이 많이 필요할 테고. 그래서 지역 균형 채용이라는 걸 실시해볼까 하는데.”
“그 말씀은….”
“경의 영지 살림 좀 펼 수 있게끔, 그 동네 인적 자원에 투자해 보겠다는 거지.”
에리난트령은 정말로 상징적인 영지였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500년간 열렸다 닫혔다 했으니 있어 봐야 마기에 잠식된 생명체뿐, 자연에서 얻어 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사람이 사는 곳이라곤 막 존재가 밝혀진 빨간 눈의 마을밖에 없기까지.
영지 수입이 전혀 없으니, 옛 알비누스령까지 에리난트 백작 위에 부속시킨 데 아무도 반발하지 않은 거였다.
‘그쪽 생태계가 복원될 때까지 주민들을 상단 직원으로 채용해서 영지 수입을 챙겨 주겠다는 거지.’
나는 에헴, 으쓱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빵 조각에 미트볼을 올려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께선 어쩜….”
빵을 넘겨받는 내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제가 아닌 다른 이들 생각만 하시는지.”
“뭐어?”
예상했던 감동 대신 온 황당함에 나는 입을 떠억 벌리고 말았다.
저기요, 이제 그 사람들 당신 영지민이거든요?
“오늘 내내 마검사들에, 율리안에, 사용인들에….”
“경 따르는 사람들, 경 친구, 경 수발들 인력, 경 영지민이지?”
“그래도 말입니다.”
루시페우스의 낯이 자못 어둑했다.
‘진짜 기분 상했나?’
그게 왜 마음 상할 거리인진 모르겠지만… 풀어줄 방법은 확실했다.
“그럼 이런 건 어때?”
내가 눈앞의 크라바트를 슬며시 쥐자, 큰 힘 들이지 않았음에도 그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자 그는 너무도 쉽게 더 깊은 침범을 허했다.
부드럽고도 광포한 열기가 순식간에 우리를 감쌌다.
결계를 치지 않아도 누가 볼 일 없는 골방에서인지라 그 은밀함이 우리를 더욱 들뜨게 했다.
그가 밀어붙이는 양에 내 머리가 벽에 닿으려던 순간,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도 감쌌다. 그의 손에 들렸던 빵 조각은 이미 상자 위로 옮겨간 지 오래였다.
찰나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숨이 모자라진 나는 입술을 슬며시 떼어냈다.
“이런 건…. 경이랑밖에 못 하는데.”
애써 태연한 척, 여유로운 척 치켜뜬 눈으로 그를 살폈다. 조용히 숨을 몰아쉬는 남자의 눈동자 너머에 해갈되지 못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안 그래?”
“…당신은.”
그가 다시 내 머리를 당겨 입술이 맞물린 순간, 그의 입가에서 앓는 듯한 한숨이 떨려 나왔다.
“정말, 저를 번뇌에 빠뜨리려고 오신 건지….”
입맞춤을 포기한 듯 내 머리를 당겨 품에 묻는 남자의 침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그가 목구멍 너머로 뭔가를 눌러 참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나는 부러 느물대었다.
“글쎄? 달의 신이 경을 행복하게 해주라던 건데. 안 행복한가아?”
“그게 행복해서, 너무 행복해서요….”
행복도 도가 지나치면 고통이군요…. 그리 중얼거리며 그는 나를 안은 채 한참 숨을 골랐다.
“있지.”
나는 속으로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허벅지를 천천히 갉작였다.
“고통은, 참으니까 고통인 건데.”
나를 안은 남자의 품이 얼어붙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알아, 알아.”
아, 너무 놀렸다. 나는 입가에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그의 허리를 토닥였다.
“경이 뭘 걱정하는지 다 알아. 작위 승계부터 완료돼야 하고.”
“예. 제가 당신께 조금의 누도 되지 않는 때가 오면 말이죠.”
“누라니, 자꾸….”
내가 불퉁거리며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자, 루시페우스가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쓸었다.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낯은 어느새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 누리시던 것. 프리지어궁의 안락함, 황실의 부와 명예, 은사를 진 당신의 권력…. 그 무엇 하나 따라갈 순 없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당신께 모든 걸 비슷하게라도 해드리고 싶습니다.”
루시페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두 눈에, 두 뺨에, 코끝에….
조금 전 눈동자 한가득 정염이 일었던 사람이라곤 믿기 어려우리만치 경건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심스럽고도 진지한 입맞춤이 내 입술을 스친 뒤.
“그때까진 기꺼이 고통을 감내해야지요.”
맹세하듯 읊조린 남자가 다시금 입술을 부딪어 오려던 순간. 나는 재빨리 손을 끼워 그의 턱을 멈추었다.
“대신.”
갑작스러운 멈춤에 그의 애타는 마음이 붉은 눈동자에 일렁였다.
“대신, 다른 약속 지켜.”
“다른… 약속요?”
“동대륙 가기로 했잖아.”
“아.”
그의 지난 생에 일어났던 비극이 확실히 없어진 걸 확인하고 나면, 함께 다녀오자고 했던 그 약속.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전에 없이 깊은 호선을 그리며 짙은 미소를 이뤘다.
“기꺼이요.”
“아, 그 경은 제가 반대라고…!”
“유시.”
“…그 공은 제가 반대라고 누누이…!”
“유스티안. 호칭이 문제가 아니지 않니.”
제 아들의 반항에 그레이스가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요, 어머니…!”
“도대체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막내 이모님의 혼사에 입을 대?”
옆에서 지켜보던 헤르미아나가 제 동생에게 핀잔을 주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앞두고, 그간의 일을 정리할 겸 그레이스의 가족과 함께한 만찬 자리.
“아무튼 잘 생각했구나, 세실.”
그레이스가 입을 삐죽대는 제 아들의 낯을 슬쩍 살피고는 내게 대꾸를 이었다.
“네 상단이 에리난트령 경제를 활성화해 준다면 에리난트 백작도 한숨 놓을 테고, 황실은 황실대로 그간 마을의 존재조차 몰랐던 걸 만회할 수 있겠지. 네 덕에 황실 체면이 살겠어.”
그레이스의 낯에 근사한 미소가 깃들었다.
일전에 나와 독대했을 때와 루시페우스의 처지가 달라진 만큼, 우리의 관계에 대한 그레이스의 지지도 또한 차원이 달라졌다.
그때는 그저 내 연애 상대로서 그를 궁금해한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가 근래 최고의 공신이 됐으니 차기 황제로서 그를 깍듯이 예우하려는 듯했다.
“그래서, 네가 그와 외유를 다녀올 동안 전략실 기사들도 모두 휴가를 보낼 테니 그동안 업무 분장을 정리해 달라는 거지?”
“네, 맞아요.”
나는 내 언니의 화끈한 요약에 생긋 웃어 보였다.
루시페우스가 그리 예우받는 덕에,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애인과 여행을 가겠다는 이야기도 이리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