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에필로그 (5)
용사의 아들, 에리난트 백작.
그리고 옵티무스 3세의 귀애하는 늦둥이의 연인.
루시페우스가 아수라마수라 귀족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사가 되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이게 뭐야? 다 선물이야?>
<말도 마세요. 과장 조금 보태서 그간 백 명은 다녀간 것 같아요.>
며칠 뒤, 내가 옛 알비누스 후작가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현관 한쪽에 잔뜩 쌓인 선물 상자 더미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루비가 이렇게 커? 여기 귀족들이 사치스럽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걸 다 만져보게 될 줄은 몰랐네.>
<우리나라에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 때문에 제국이 별로 풍요롭지 못할 거라는 편견이 있잖아? 이걸 보면 다들 깜짝 놀라겠는걸?>
하디를 비롯한 서대륙의 마검사들은 그 선물 상자 더미를 정리하며 수선을 부렸다.
오갈 데가 없어진 그들은 루시페우스의 하수인으로 행세하며 당분간이라도 저들을 거둬달라 청한 참이었다. 그의 마법에 관해 더 연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침 옛 알비누스의 영지와 함께 이 저택까지 넘겨받은 루시페우스에게도 인력이 필요했으니 잘된 일이었다.
후작저의 옛 사용인들이 후작의 범죄에 연루되어 처벌받았거나 후작가의 멸문과 동시에 죄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루시페우스에게 좋은 기억은 아닌 자들이니 남아 있었어도 다 내쫓았겠지만.’
하지만 태생이 무사인 그들이 딱히 체계적인 일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잖았다면 선물 상자가 이렇게 아무렇게나 쌓여 있진 않았으리라.
“저자들은 서대륙으로 안 돌아가나요?”
오늘의 호위로 따라온 케인이 물었다. 근 10년간 감시하던 저택을 정식으로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운지, 그는 연신 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도미닉 알비누스가 죽어서 약속한 돈을 못 받게 됐으니까. 서대륙까지 돌아갈 돈도 없대.”
“아아, 그런데 그 거래가 파기된 지 한참 아닙니까? 받기로 한 돈이 없어도 돌아갈 수 있어서 우리 쪽으로 돌아선 줄 알았건만.”
“돈도 돈이지만, 마법사로서 더 연구하고 싶은 것도 있는 것 같고.”
여기 사용인도 다 나갔으니 잘 됐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분 본인께서 강하시니 호위가 필요하지야 않겠습니다만, 저들이 무사니 일종의 호위 용병으로 계약하신 셈 치면 되려나요.”
“안 그래도 내가 체류 허가를 알아봐 주려던 참이야.”
며칠을 동고동락하며 정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루시페우스를 따른다는 점에서 그의 곁에 좀 더 머물러줬으면 싶은 것이었다.
오래간 외로웠던 그에게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소대장님, 여기에 정문으로 들어온 건 처음인 거지?”
“그러게나 말이다. 이렇게 사람 없는 것도 다 보고, 느낌이 이상하네.”
그사이 뒤따라온 1소대의 기사들이 저택 곳곳을 살피며 속 편히 떠들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가면 손님 방 구역이고, 1층은 다 사용인들 공간이라고?”
“응. 뭐, 공사 들어가고 나면 배치야 바뀔 수 있겠지만. 어쨌든 안채는 저기 2층에서 이어져.”
“안채로 이어지는 계단이 외부에 노출돼 있는 거야?”
“그럼 주방은 어디야? 외부인들 드나드는 곁문도 그쪽에 있을 거 아냐.”
“이따 가서 직접 봐.”
“아니, 왜 이렇게 두리번거려들?”
한데, 소란스레 떠드는 기사들의 대화 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처음에는 알비누스의 부를 증명하듯 화려하고도 웅장한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건가 싶었는데, 대화의 방향이 사뭇 달랐다.
“아, 동선을 좀 확인해 보려고요.”
“동선?”
예상치 못한 말소리에 내가 미간을 좁혔다.
“여기가 전하께서 하가(下嫁)하시면 지내실 곳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경비 설 저택인데, 미리 알아보면 좋겠어서 말이죠.”
“국혼을 당장 치르진 않을 거라고 하셨지만….”
그리 말하는 기사들의 낯에는 능글맞은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하가며 국혼이며….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 버리고 말았다.
“뭐, 뭐래? 그만 좀 놀려!”
“왜 그러십니까, 새삼스럽게?”
“설마 글렌치아 공작 각하께서 노래하시던 자유로운 연애 쪽이 전하 취향이셨습니까?”
“아니, 그럼 진작 말씀하시지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저흰 에리난트 백작님께 깍듯하게만 굴었는데….”
“일개 후보에 불과하시다면, 뭐, 우리도 마음 좀 편히 먹어도 되겠네.”
“아, 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의 일 이후로 내가 더 애틋해진 건지, 안 그래도 격의 없이 굴던 암조 기사들이 더더욱 허물없이 굴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만간 전략실 편제 바꾸면서 경들 다 해직시키는 수가 있어?”
“아, 너어무 무섭습니다.”
“에리난트 백작님께 안주인 호위로 자원하면 기꺼이 고용해 주실 것 같긴 한데….”
“어어, 경력직이니까 봉급 더 쳐주실지도 몰라.”
“10년 채우면 우리 전역할 수 있는 거지?”
이렇게, 한 치의 양보 없이 나를 더 열심히 놀리는 쪽으로 말이다….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는지, 마검사들도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늘 많이들 따라온다 했다.’
나 혼자만 심통이 나 입술을 빼죽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갑작스레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 쳐다보니, 홀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는 계단 중 하나를 타고 한 남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갈색 고수머리와 콧잔등을 덮은 주근깨.
“아, 저는….”
“겔프 자작 영식이지?”
“아이쿠, 저를 아시는군요. 그게….”
“내 연인의 친우인데 당연한 일 아니겠어?”
그리 말하며 내가 생긋 웃어 보이자, 율리안 겔프가 감동받은 낯으로 가슴에 손을 올리고 꾸벅여 인사했다.
제 허물을 덮어주는 거였으니까.
기실 율리안 겔프와의 공식적인 인연은 아카데미에 놀러 갔을 때 마주친 게 전부였다.
소년 율리안은 윌로우 게이블스에게 겁박당해서는, 레오폴트와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마멧돼지 우리를 부쉈더랬다.
그게 본인 의지가 아니었음이 알려지며 처벌을 면했지만, 죄책감이 남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겔프 자작의 둘째, 율리안 겔프입니다. 저, 루시페우스 군과는….”
“아카데미 때부터 교류한 사이라고 들었어.”
“예, 맞습니다…!”
율리안 겔프는 어느새 내 곁에 와서 선 루시페우스와 나에게 번갈아 감격의 눈빛을 쏘아댔다.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앞으로…. 예, 그럼요…!”
율리안 겔프는 마치 이마에 ‘루시페우스 에리난트의 친구’라고 써 붙이고 싶은 사람처럼 연신 들뜬 낯을 가누지 못했다.
“전하께서 오신 줄 알았으면, 제가 좀 부지런히 움직이는 건데요. 이 친구를 너무 오래 붙들어 두었군요.”
“친우끼리 오랜만에 만나면 그럴 수 있지.”
“그, 요즘 이 친구에게 일어난 일들을 제가 꼼짝없이 몰랐지 뭡니까. 후작저에서 나왔단 소문은 들리는데, 저희 가문도 상황이 안 좋아서 도울 수도 없고. 마지막으로 본 게 정무 회의 만찬연 때인데, 그땐 아직 얘기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만 하고….”
율리안 겔프는 굉장히 민망해하는 낯으로 주절거렸다.
겔프 자작은 귀족파의 주류는 아니었지만, 게이블스 후작의 사업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인 인물이었다.
그랬으니 율리안이 아카데미 시절 윌로우 놈의 협박에 고분고분 따랐을 테고.
하지만 게이블스 후작은 조만간 가주 자리에서 영영 물러나게 생겼고, 겔프 자작은 몇 가지 위법 행위에 가담한 데 대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래도 겔프 정도 가문이면, 경이 애쓰면 차차 다시 자리 잡지 않겠어?”
“하핫, 가문이야 제 형님께서 알아서 하실 테고, 제가 문제죠.”
그리 말하며 율리안은 루시페우스의 어깨를 느릿하게 쓸었다.
“아무튼, 이 친구가 그렇게 큰 공훈을 세워서 작위도 받고, 잘되었다 싶어 축하할 겸 다녀가는 겁니다.”
“으응, 그래.”
율리안 겔프는 멋쩍은 표정으로 마무리 대사를 뱉었다. 아무래도 내 시간을 뺏고 있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루시페우스를 찾아온 게 근래의 일들로 자리를 잡아가는 그에게서 콩고물을 바라는 걸로 비칠까 민망해서일 수도….
‘아니, 정말로 그런 걸 수도 있어. 영지가 하나뿐인 가문의 둘째니 생각이 많겠지.’
내 남자의 학창 시절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줬다면 내겐 은인인 셈인데, 으음….
내가 갑작스레 든 생각에 빠져들 무렵, 율리안이 넉살 좋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러면 이 친구, 감히 잘 부탁드리고, 부디 다음에 또 뵙는 영광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응, 그럴 거야. 잘 가.”
나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그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심히 가게.”
“그래, 자네. 또 봅세.”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밖으로 나간 율리안 겔프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어느덧 땅거미가 내린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쿵,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둔중한 울림과 함께 닫힌 순간.
“아주 인기인 다 됐어?”
나는 곧바로 루시페우스에게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
“선물이 이렇게까지 쏟아져 들어오다니…. 내가 봄마다 받던 것보다 많은 것 같은데.”
“봄마다요?”
“사교 시즌 시작하면 나한테 그렇게들 선물을 보내더라고. 게다가 올핸 처음으로 사저 연회에까지 갔었으니….”
“전하께 그렇게 많이들 잘 보이려 애썼군요.”
“으응, 누구도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는지 나한테 수상한 손거울을 보냈으니까.”
“아, 그게….”
루시페우스가 난처한 듯 웃었다.
반년 전 글렌치아 연회에서 마주친 이후, 그가 델피니움을 채워 넣은 상자에 손거울을 담아 보냈던 일.
그때는 원작 흑막의 음흉한 수작이라고 생각했던 건데….
“다들 보내는 거였으면, 전 좀 더 특별하게 보낼 걸 그랬습니다.”
“충분히 특별했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고.”
무서워서 말이지. 그때를 생각하니 우리의 관계가 바뀌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서 나는 쿡쿡 웃었다.
“예, 어찌나 특별했는지 바로 소각하라고 지시하셨죠.”
“아니, 이제 와서 말인데 어떻게 알았던 거야? 위치 추적 기능 같은 거 없다며.”
“지니고 다니셨으면 했던 만큼, 위험에 처하면 제가 감지할 수 있게 해 두었으니까요. 하지만 프리지어궁에 불이 났다는 이야기는 없었고….”
루시페우스의 낯에는 어느새 장난스러운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손거울이 화염에 휩싸였는데 화재 난 곳은 없었으니 손거울 혼자 탄 거란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뭐, 그때야 그게….”
내가 우물쭈물하자, 그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재미있는 걸 보여 드릴까요.”
“재밌는 거?”
루시페우스가 선물 상자 중 하나를 열었다. 커다란 루비가 장식된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으응, 예쁘네.”
“그런가요.”
뒤이어 그는 감흥 없는 손짓으로 다른 상자들도 무작위로 열기 시작했다.
루비가 장식된 커프스단추, 붉은 가닛이 빼곡히 박힌 넥타이핀, 붉은색 실크로 된 크라바트, 붉은 비즈가 꿰여 뜨개질된 머리끈, 붉은 실에 금사를 섞어 엮은 안경 줄 등등….
“사람들 생각하는 게 어쩜 이리 다 똑같은지.”
그의 콧가에 짧은 웃음이 스쳤다.
그에 대해 잘 모르면서 선물을 보내려니, 의미를 담는답시고 담은 게 그런 거였다. 그에 관해 단시간에 가장 잘 알려진 정보가 바로 눈 색깔이니까.
지금까지 빨간 눈을 가진 이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단 한 번도 관심 가진 적 없는 자들이 말이다.
‘게다가 결국 다들 나한테 잘 보이려는 거고….’
나는 지레 마음이 씁쓸해졌다.
“케인.”
“네.”
“그, 아우렌바흐 소공작이 준 거.”
케인이 다른 기사가 맡아두고 있던 상자를 받아 내게 건넸다. 며칠 전 레오폴트가 찾아와서 주고 간 거였다.
“자, 이거 받고 마음 풀어.”
“아우렌바흐 소공작이, 제게… 말입니까?”
또 그걸로 마음을 풀라고요…? 루시페우스는 영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