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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14화 (214/220)

214화. 에필로그 (4)

에리나의 땅.

‘그러니까, 이건….’

아버지를 향해 뾰족하게 떴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시선을 돌려 레베카를 찾자, 레베카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던 듯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한데….

“이와 더불어 교단과 황실의 이름으로 공표할 것이 있네.”

사람들의 낯에 들어찬 의문에 답하듯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제국력 471년에 일어난 격랑. 당시 성기사단 1대대 3중대장으로서 참전한 성녀의 방계 후손 에리나 알비누스 경의 공훈을 뒤늦게나마 기리며 용사로 추존한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성녀의 방계 후손?

성녀의 동생 쪽 핏줄이 있다더니, 그게 알비누스…?

용사급 공훈을 세웠다고?

연회장을 짓누른 얼떨떨함은 누구도 해소하지 못했다.

“당시 격랑에 참전한 성기사단원들의 증언을 취합한바.”

사람들이 한껏 떠들게 내버려 두었던 아버지가 발표를 이었다.

“예년보다 격랑이 혹독하여 평시의 배는 되는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에리나 알비누스 경이 대오의 선두에서 일당백의 기량을 선보임으로써 성기사단의 궤멸을 모면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꿈에서 봤던 에리나 경의 참혹한 모습이 떠올라, 나는 목이 메어왔다.

‘…그리고 루시페우스는 그때의 기억을 갖고 있다고 했어.’

그의 세상의 전부였던 어머니가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걸 알았기에, 핏덩이 같던 그를 남겨두고서 목숨을 바친 걸 알게 된 마음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지금 그의 낯에 어떤 감정이 스몄는지 또한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에리나 알비누스 경 덕에 성기사단이 간신히 승리했고, 에리나 알비누스 경 덕에 격랑의 피해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장원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그레이스가 성녀의 반지를 들고 참전하여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닫고 승전보를 올렸지만, 그 승전보가 허울뿐임을 모두가 기억했다.

그마저도 에리나 경의 분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에리나 알비누스 경이 그 정도의 재원이라는 것. 그러니까 성녀의 핏줄이란 것이 그간 교단의 비밀이었던바, 당대에 그 공로를 제대로 치하하지 못했다. 너무도 늦게 그 업적을 기리는 황실의 불민함을 그 아들에게 사과하며.”

좌중이 침묵 속에 크게 동요하였다. 공식 석상에서 하는 황제의 사과는 그 의미가 너무도 깊었으니까.

“용사로 추존된 에리나 알비누스 경에게 에리난트 백작 위를 하사하며, 에리난트령과 옛 알비누스의 영지 모두를 에리난트 백작 위에 부속시키는 바다.”

차오른 눈물이 떨구어질세라, 나는 저릿저릿한 손끝으로 드레스 자락을 꾹 쥐었다.

“그러니 루시페우스 경.”

아버지의 손짓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필로우를 내밀었다. 거기서 아버지가 집어 든 건 성은(聖銀)으로 된 반지였다.

황실에서 영지와 함께 하사하는, 귀족 신분을 증명하는 반지.

“에리난트 백작 위의 유일하고도 적법한 상속인인 그대에게 이 반지를 하사하네.”

“…한낮의 태양에 광영을.”

그가 숙인 머리 위로 내뻗은 손에 반지를 끼우는 아버지의 신중한 손놀림을 따라, 루시페우스의 목울대도 천천히 오르내렸다.

그가 거기에 어떤 감격을 담고 있는지 또한,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거였다.

나는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깨물었다.

“경은, 알고 있었어…?”

참석객 모두에게 크나큰 충격을 선사했던 개회식이 끝나고, 무도회의 첫 곡에 맞추어 황제와 황후가 첫 춤을 선보이는 시간.

나는 내 곁에 돌아온 루시페우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내내 심란한 낯으로 검지에 끼인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며칠 전에 귀띔해 주시더군요.”

이내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붉은 눈동자는 어느새 따스함만을 띠고 있었다.

“알비누스령을 경에게 주는 것 정도는 나도 짐작했어. 하지만 무작정 주면 멸문시킨 게 유명무실해 보일 텐데 어떤 핑계를 대시려나 싶었지.”

“…역시, 저의 작은 빛께서는 모르는 게 없으셔서.”

나는 능청스레 말하는 남자의 낯에 얄밉다는 듯 눈을 흘겼다.

“이번 일로 귀족파의 세가 너무 심하게 꺾였으니까. 벌할 가문들이 대부분 주류 가문이다 보니 부유한 그들에게서 징벌조로 뜯어낼 게 너무 많고…. 와중에 알비누스의 재산까지 환수하면 황실을 배 불리는 거 아니냐며 반발하는 자들이 심심찮게 있겠지.”

“예, 그렇죠.”

내가 부채로 입을 톡톡 치며 이야기하는 걸 루시페우스는 미소 띤 낯으로 지켜보았다.

“아마 상단 쪽도 조만간 민간에 입찰 부치실 것 같습니다.”

“그냥 폐쇄하는 게 아니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글렌치아 다음으로 가장 큰 유통망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까지 제게 주신다면 정말로 알비누스를 이름만 바꾼 채 존속시키는 셈이니….”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나는 불현듯 떠오른 즐거운 생각을 머릿속에 콕콕 새겼다.

“하지만, 어머니 쪽은…. 정말 몰랐습니다.”

난처한 듯 웃는 루시페우스의 눈동자엔 미미한 설렘 같은 게 깃들어 있었다. 20년 전 유품 하나 남기지 못하고 스러진 어머니의 흔적을 이리 만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나도 교단에서 나설 줄은 몰랐어.”

“레베카 전하께서 힘써주셨을 테니 감사한 일이군요.”

“아버지께서 덕분에 작위 명 짓는 데 골머리 썩일 필요가 없으셨겠네.”

나는 아버지 쪽을 흘끗하며 킥킥거렸다.

마침 홀 한가운데서 어머니와 빙그르르 한 바퀴 돌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낯에 떠오른 건 의뭉스러운 미소였다.

‘내가 황실 안 떠날 거라고 노래할 때마다 두고 보자던 그 표정이네….’

그땐 정말 진심이었는데.

그 결연한 다짐을 못 지키고 말았지만, 뭐…. 다 괜찮았다.

평생 눌어붙어 살고 싶을 정도였던 황실 또한, 이 남자 덕분에 만나게 된 거니까.

내가 넘치는 애정을 한가득 담아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에리난트 백작, 축하하네!”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와 보니, 테오도르와 글렌치아 공작이 와 있었다. 여느 때처럼 부모님에 이어 그레이스의 가족에게 인사한 뒤 나를 찾은 거였다.

테오도르가 불쑥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루시페우스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젠 공이라고 불러야겠군.”

“축하해요, 공.”

“감사드립니다. 이런저런 행정 절차가 아직 남았으니, 뭐….”

“그거야 폐하께서 어련히 잘 마무리하실까요. 이게 평범한 포상도 아니고.”

글렌치아 공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부채 너머에서 기민하게 빛났다.

“맞소, 맞아. 봉토 분할이야 아로카트 변경백과 대강 이야기를 끝내두셨을 테고, 그대의 모친에 대한 사후 승작 건만 원로원에서 승인하면 되니…. 그나저나.”

신나서 한참 떠들던 테오도르가, 갑자기 말꼬리를 늘였다. 내 오빠의 낯이 순식간에 진중함으로 가라앉았다.

“모친의 일에 대해 유감을 표하네.”

“…별말씀을요. 저야 기억도 못 하는 일입니다.”

“그래도 말일세. 나는 당시 황궁 분위기를 똑똑히 기억해. 말이야 승전 연회고 태양의 승리였지, 소소한 영웅담이라도 절실할 만큼 분위기가 침체해 있었지. 한데 단신으로 마물과 대적한 기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

“…그랬습니까.”

루시페우스는 말을 아꼈다. 아무래도 황실과 교단의 허물이다 보니, 그는 에리나 경의 공적이 은폐된 데 대해 큰 감정을 노출하지 않았다.

“앞으로 더 잘 부탁해요. 몰랐겠지만, 사실 공과 내가 친척이 될 뻔하기도 했는데….”

“예?”

“뭐?”

글렌치아 공작의 의미심장한 말소리에 나와 루시페우스 둘 다 깜짝 놀랐다.

“일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공을 부마로 맞이하려면 필히 알비누스의 그늘에서 빼내야 한다며, 글렌치아의 방계 쪽 가문을 상속시키길 바라셨거든요.”

“그런 구체적인 얘길 다 했다고?”

아니, 그레이스가 일전에 루시페우스가 알비누스에서 나올 경우를 대비해, 글렌치아와 동업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떠보기야 했지만….

언니들에게 우리 관계를 이야기한 게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나는 눈동자만 떨며 루시페우스의 낯을 살폈다.

우, 우리 집이 좀 유난이긴 한데, 부담 갖진 말고…. 응?

분위기를 파악한 글렌치아 공작이 호호 웃었다.

“막둥이라면 껌뻑 죽으시는 팔불출 손위 형제들께서 막내 매제감에 관해 논의해온 세월이 두 자릿수인데. 이런 경우의 수쯤 없었겠어요?”

내게 눈을 찡긋해 보인 글렌치아 공작이 루시페우스에게로 몸을 빙글 돌렸다.

“각오하세요. 아마 앞으로 가족 같은 게 없던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번잡해질 거랍니다?”

“어, 어흠, 당신도 참.”

나는 글렌치아 공작의 말소리가 황당하여 헛헛한 웃음만 지었다.

“하하, 뭐, 아무튼 그땐 가족이 되는 김에 다른 쪽으로도 가족이 되면 더 끈끈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던 거지.”

테오도르가 사태를 수습하겠답시고 변명을 주워섬겼지만 뾰족해진 내 눈초리는 풀어지지 않았다.

정말, 이 사람들을 못 말린다.

‘내가 평생 황실에 붙어 있겠다고 노래 부를 땐 알겠다고 하더니, 뒤에서들 아주….’

스무 해 넘게 겪어온 내 형제들의 팔불출을 새삼 되새기자니, 자꾸만 입가에 헛웃음이 배었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루시페우스의 손을 꼭 잡았을 때.

마침 첫 춤곡이 끝났는지 연회장 곳곳에서 황제와 황후의 금슬을 찬양하는 환호성이 높아졌다.

“어머, 여보.”

“으흠, 햇병아리들에게 질 순 없지. 우리가 먼저 나갑시다.”

과장된 몸짓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은 테오도르와 글렌치아 공작이 홀 가운데로 나아갔다.

정말, 이쪽도 금슬 좋다니까.

나는 비죽 웃으며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타이밍을 재고 있던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진하게 빛났다.

“그럼….”

그는 내 앞으로 옮겨 서더니, 우아한 몸짓으로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손을 내밀었다.

“제게 당신과 첫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작은 별.”

“응, 당연하지.”

나는 그의 손에 내 손을 살포시 올렸다.

“평생의 영광입니다.”

그가 내 손을 당겨 제 입술을 누긋이 내리눌렀다. 그 깊이로도, 머무른 시간으로도, 누가 봐도 눅진한 열기가 밴 입맞춤이었다.

모두의 눈길을 받으며 우리는 홀 한가운데로 나갔다.

곡은 낭만적인 분위기의 왈츠.

먼저 앞장선 내 오빠 부부를 비롯해 그레이스 부부와 로젤리아 부부, 레오폴트와 아멜리, 스칼렛과 오늘 처음으로 공개된 그녀의 연인 헥터 경….

내 사람들이, 이번 생에 양껏 받은 내 인연들이 더없이 행복한 낯으로 아름다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사람들이 다 우리만 보고 있어.”

“제 눈엔 당신만 보입니다.”

내 연인의 붉은 눈동자가 따스하게 빛났다. 거기에 한가득 들어찬 내 낯 또한 그러할 거였다.

“응, 나도 알아.”

그 모든 것으로 인한 행복을 터뜨리듯 나는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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