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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13화 (213/220)

213화. 에필로그 (3)

그러고 보니 루시페우스는 평소보다 훨씬 신경 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크라바트야 내 드레스와 색을 맞춘 것이지만 화려한 넥타이핀에 값비싼 실크를 덧댄 라펠, 은은하게 수놓인 행커치프에 그에 맞춘 머리 끈, 윙팁 장식이 화려한 구두까지….

검정 일색인 평소 옷차림을 생각하면 오늘의 매무새에는 크게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떨리겠지.’

나 또한, 몇 번이고 맞잡은 손인데 새삼 떨렸다. 나는 그의 손에 내 손을 척 올려놓으며 부러 장난스레 말했다.

“포상받는다고 너무 힘줘서 차려입은 거 아냐?”

루시페우스는 여전히 끼고 다니는 제 장갑에 맞춰 검은색 벨벳 장갑을 낀 내 손을 잠시 감격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말아 쥐었다.

그의 손이 예전처럼 뜨거웠다. 에리나 경으로부터 받은 신성력을 버렸음에도 여전히 평균치를 웃도는 신성력을 지닌 그가 심히 긴장한 거였다.

“내 연인이 공명심 많은 사람인 줄 이제 알았네.”

“그게 아니라, 공식 석상에서 전하와 함께 입장하는 첫날이어서입니다.”

우리의 말소리는 내내 농담하듯 울렸지만, 그 무엇도 정답이 아님을 둘 다 잘 알았다.

‘루시페우스가 최초로 황실 행사에 참석한 빨간 눈이 될 거니까….’

그 긴장감을 내색하지 않은 채 우리는 프리지어궁을 나섰다.

“세실리아 4황녀 전하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연회장 안의 이목이 대번에 이쪽으로 쏠렸다.

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속도가 유독 빨랐다.

내가 더 이상 내숭 떨지 않기 시작한 지난 정무 회의 이후 첫 공식 행사였으며, 그날 루시페우스와 가까운 사이임을 과시한 참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그 소문이 정말이었어.

진짜 빨간 눈이야….

그럼 그동안 마법으로…?

막내 전하께선 알고 계셨던 건가…?

‘다 들려, 인간들아.’

나는 기분 나쁜 걸 꾹꾹 참으며 미소 띤 입매를 고정한 채 연회장의 상석으로 이어지는 카펫을 천천히 밟았다.

그러니까, 모두들 루시페우스가 정말로 빨간 눈인지 확인하고 싶어 안달 난 거였다.

가까운 쪽에 자리한 이들은 입을 함부로 놀리지야 않았지만, 경악 어린 눈빛만은 숨기지 못했다.

안경에 건 마법을 해제한 탓에 그의 눈동자가 채도 높은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멀리서도 선명히 보이리만치….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흘끗,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늘 그렇듯 단단한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멀리 붙박아둔 시선이나 간신히 오르내리는 목울대 같은 것이, 그가 잔뜩 긴장했음을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그가 못 들었을 리 없으니까.

붉은 눈동자의 비밀이 풀린 데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혐오감이나 적대감이 튀어나오지는 않았지만….

‘그건 피차 귀족이라고 체면 차리고 있어서지.’

무엇보다 다들 그가 갖게 될 지위를 두려워했고.

나는 십여 년 전 저잣거리에서 우리가 처음 마주쳤을 때, 메리제인과 란셀의 반사적인 반응에 소년의 눈빛이 가라앉던 걸 떠올렸다.

볼품없이 마른 몸에 아무 옷가지나 꿰입은 소년에게 얼마나 많은 적의가 쏟아졌던 건지, 다시금 제게 쏟아질 박대를 잠자코 기다리던 그 표정.

“있지.”

나는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본 그대로 입을 열었다.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내 쪽으로 살짝 기울이자, 우리의 다정한 한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연인의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다들 눈을 못 떼는 것 같은데…. 그게 불쾌한 게, 단순히 질투심이나 그대에 대한 독점욕 때문일까?”

순식간에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평소였으면 입 모양이 읽힌다며 조심했을 것을 대놓고 말했으니까.

가까이 자리한 이들은 그걸 그대로 들었을 테고, 멀리서 입 모양을 읽은 이들도 있었을 거였다.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내 말이 온 연회장에 퍼져, 순식간에 허투루 입 여는 자는 없게 되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지난 한 해의 풍요를 기념하는 복된 날이지. 한데 참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군.”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의 일이 지나고 첫 공식 석상.

여느 때의 수확제와 달리 그 개회식이 장엄하게 치러졌다.

보통 그해 새로 서임받은 기사들을 축복하고 한 해를 무사히 보냈다며 축배를 드는 정도지만, 올해는 지난달 있었던 사건에 대해 논공행상해야 했으니까.

“여하튼 모두가 기쁜 낯으로 이 자리에 다시 모이게 되었으니, 태양께 감사드릴 일이지 않겠는가.”

그리 말한 아버지는 귀빈석에 자리한 교황을 향해 교단식 인사를 선보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교황 곁에는 차기 교황으로 지목되는 레베카가 서 있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얼마 전 돌아올 수 없는 바다와 연관해 아주 흉악한 음모가 있었다.”

아버지는 알비누스 후작이 꾸몄던 음모의 자세한 내막과 함께, 흉수는 참회의 탑 최하층에 구금했고 그 후계자는 현장에서 즉결 처분했으며 알비누스의 영지와 재산 모두를 국고에 몰수했다는 처벌 내역을 간략하게 덧붙였다.

“한편으로는 제국의 강인한 기사들이 태양의 이름 아래 승리를 이끈바, 그 공로자들을 치하하려 한다. 우선 성기사단.”

“성기사단장 로젤리아 에슈바이크 알 아마리우스, 지고하신 대륙의 태양을 뵙습니다.

아버지의 부름에 로젤리아가 성기사단의 새하얀 정복 차림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뒤로 로젤리아의 세 명의 대대장과 세 명의 부대대장들이 따랐다. 그중에는 내 어린 시절 호위였던 란셀과 브랜든도 있었다.

시종장이 은쟁반에 받쳐 들고 있던 교지가 적힌 두루마리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역적의 흉악한 음모로 대륙에 참극이 도래하려던 순간, 빠른 판단으로 대처하여 제국민에게 일말의 피해도 입히지 않은 성기사단을 황실은 크게 치하하는 바다.”

아버지는 교지에 적힌 내용을 큰 소리로 읊어내려 갔다.

“이에 황실에서는 성기사단 전원에게 각자 금화 50개씩을 하사한다.”

성기사단 평기사 한 사람의 월급이 금화 다섯 개이니 통 큰 포상이었다.

다시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로젤리아가 양손으로 받들자, 태양의 광영을 외치는 함성과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은 제국군 전략실.”

아, 우리 차례다.

이 순간을 위해 단상 아래쪽에 서 있던 나는 케인과 엘런, 알렉스의 세 소대장을 거느리고 아버지 앞으로 나아갔다.

“전략실은 그간 학자의 탑과 공조하여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이상 현상에 관해 연구하고, 역적의 불온한 움직임을 좇아 사회의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사심에서 시작된 올 한 해의 고생이, 공식 석상에서 아버지의 입으로 참 아름답게도 포장되었다.

“결정적으로 역적의 음모를 간파한 공로가 크디크다. 이에 전략실 전원에게 푸른 달의 4급 훈장과 금화 50개씩을 하사할 것이며, 전략실장 세실리아 에슈바이크 알 아마리우스에게는 국보 7호 달의 은수정을 하사한다.”

다, 달의 은수정요…?

달의 은수정은 아수라마수라의 시조가 마계의 군대와 싸울 때 달의 신이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커다란 수정석이었다. 마물이 주둔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결계석으로 쓰였다나.

‘달빛을 받으면 표면이 은처럼 빛나서 은수정이라고 하는 건데….’

여하간 그 의미가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라 한껏 목소리를 낮춘 속삭임이 곳곳에서 울렸다.

역시, 황실에서 4황녀 전하를 워낙에 귀애하시니….

아냐, 이번 사건이 워낙 컸으니 당연한 포상 아닐까?

도대체 전략실이 뭐 하는 데길래?

경악과 찬탄이 섞인 좌중의 웅성거림을 배경으로,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성력 저장할 것 새로 만들라는 거구나.’

도미닉 놈에게 뜯겼던 초커는 레베카의 신성력이 많이 담겨 있었던 덕에 어렵잖게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걸 잃었었고, 그래서 위험에 노출됐으니 황실의 과보호가 간만에 제대로 발동한 거였다.

어느새 시종장으로부터 달의 은수정이 올려진 필로우를 건네받은 아버지가, 빙글빙글 웃는 낯을 짓고 있었다.

딸아, 어서 안 받고 뭐 하느냐?

아니,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국보는 좀….

내가 떨리는 눈동자로나마 반항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내 남자가 얼마나 유능한지 몰라서 그러시지….’

나는 하릴없이 달의 은수정을 필로우째 받아들었다.

“과분한 보물을 하사하심에 감읍하나이다. 한낮의 태양에 광영을.”

와아아아, 다정한 황제 부녀의 모습에 모두가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나와 내 기사들이 물러나고, 진군에 애썼던 대신전의 실무자들과 사후 처리를 도맡은 행정관 등등이 간단한 포상을 받은 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좌중을 훑어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아직 남은 게 또 있나?

포상받을 자들은 다 받은 것 같은데…?

사람들의 낯에 의아함이 깃들 때였다.

“루시페우스 경.”

아버지의 호명에 좌중이 깜짝 놀랐다.

내 곁에 서 있던 루시페우스가 예상했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가자, 그의 눈 색을 확인했을 때보다 더한 술렁임이 일었다.

저자가 왜?

후작을 고발해서?

무슨 일이지?

이번 일에 루시페우스가 공헌한 바는 아직 아는 사람만 아는 내용이었다. 정무 회의 때의 증언과 알비누스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나와의 관계와 얽혀서 자극적인 소문만이 났을 뿐.

‘연정에 미쳐서 양부를 밀고한 배은망덕한 내부 고발자라나….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웅성거림이 차츰 높아지자, 아버지가 논란을 일축하듯 힘주어 목소리를 울렸다.

“루시페우스 경은 이번 일을 대처하며 건국 시조, 아마리우스 1세께서 완수하지 못하신 일을 해냈다.”

초대제께서 못하신 일이라면…. 사람들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두 신의 종이자 짐의 딸인 신관 레베카의 증언에 따르면 루시페우스 경이 자신의 신성력으로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완전히 닫았다는군.”

경악이 무음의 파동이 되어 술렁임을 잠재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루시페우스의 정수리를 흐뭇한 낯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성기사단의 보고 또한 이를 부연하였다. 지난주 그믐을 지나는 내내 어둠의 태동이 일지 않았다고. 그러니 더불어 고지하자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장원에 대한 접근 금지령을 지금부로 해제한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연회장에 자리한 성기사단 누구도 반발하는 기색이 없어, 그걸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충격에 충격을 거듭하는 이야기에 숨조차 함부로 쉬는 이가 없을 때.

“이에 황실과 대륙의 모든 생명을 대표하여 루시페우스 경의 공훈을 포상하려 한다.”

믿기지 않는 공로였지만 여하간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대제의 숙원을 이룬 그에게 과연 어떤 포상이 내릴지, 모두가 기대감에 찬 눈으로 아버지의 입만 쳐다보았다.

“우선, 아수라마수라 500년 황실의 염원을 이뤄준 은인에게 나, 옵티무스 3세의 이름으로 성을 하사한다.”

루시페우스에게 새 작위를 내리긴 해야 했으니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였다.

“그 전에…. 아로카트령에서 동북쪽,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장원 지역을 분리하여 새로운 봉토로 삼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다시금 웅성거림이 높아졌다.

장원, 그러니까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둘러싼 주변 지역은 그 명칭이 무색하게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으니까.

‘빨간 눈의 마을이 거기에 속하지만…. 이제 마기가 걷혀서 초목이 자란대도, 진짜 장원 꼴을 갖추려면 한참 걸릴 텐데?’

그런데 이걸 포상이랍시고 하사하려고?

내가 아버지의 다음 말을 반항기 어린 눈빛으로 기다릴 때였다.

“그리고 그 영지의 이름은.”

한데 내처 교시를 읊는 아버지의 낯은 그저 엄숙하기만 했다.

“에리난트로 한다.”

에리난트.

고대어로 ‘에리나의 땅’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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