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에필로그 (2)
‘크, 울림 한번 달다.’
그랬다. 내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다녀오고 그 후속 업무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사이, 스칼렛은 당당히도 가주 대행 자리를 꿰찼다.
지난 정무 회의 이후 게이블스 후작의 직무가 정지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추수철에, 곧 연말.
다음 주의 수확제를 마지막으로 황성 사교 시즌은 끝나지만, 각 가문의 안살림은 이제부터 바빠질 차례였다.
영지 소출을 관리하고 연간 소득을 정리하여 세금을 걷거나 내는 등,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으니까.
하필 이런 때 가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게이블스 후작으로선 도리가 없었다.
대리인을 내세워 영지나 거래 관계의 가문들과 소통해야 하는데, 모자람이 만천하에 까발려진 윌로우 놈을 쓸 순 없었으니까.
‘윌로우 놈은 그날 이후로 시골 어디에 정양 갔다고 했지. 정양은 개뿔.’
진작에 제 편으로 돌아선 보좌관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스칼렛은 얼마 전부터 게이블스 가주 대행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본격적으로 후계 가도를 밟기 시작했다는 신호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인사가 늦었군요.”
“감사드립니다. 루시페우스… 경…?”
스칼렛이 일부러 말꼬리를 늘이는 게, 그가 성을 잃은 일에 관해 언급하고자 함이 빤했다.
알비누스의 멸문이 근래 아수라마수라 귀족 사회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던 만큼 루시페우스가 성을 포기한 사실도 덩달아 널리 퍼진 참이었다.
렌틸 자작은 자중하라는 양, 제 조카딸에게 눈을 흘겼다.
“이번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에서 크나큰 공적을 세웠다고 들었소.”
“미력한 재주로나마 대륙에 이바지해 영광일 따름입니다.”
렌틸 자작이 건넨 치사에 루시페우스가 낯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했다.
남들에게 그 표정은 일종의 겸손으로 보이겠으나, 거기에 그가 어떤 악몽을 묻어 두었는지는 나만이 알았다.
“그러니 폐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실 테고.”
아하? 내 스승 또한 루시페우스의 처우에 관해 궁금하긴 한가 보군?
“뭐, 전하께서도 생각하신 바가 있지 않으시겠니?”
“걱정해서 여쭌 건 아니었어요. 단지 제가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알고 싶어서.”
“너도 참, 한창 바쁜 때 별게 다 궁금하구나.”
제 고모의 핀잔에, 스칼렛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리 말하며, 스칼렛은 꽤 작위적인 동작으로 루시페우스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기세가 의미심장하여, 루시페우스는 선뜻 그것을 맞잡지 못하고 스칼렛을 쳐다보았다.
이어지는 스칼렛의 말소리가 새치름했다.
“제 첫 악수예요. 전하의 부군 되실 분께 개시하려고 며칠 동안 아껴 놨답니다.”
악수는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들 간의 인사였다. 아수라마수라에 아직 여성 가주가 많지 않다 보니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고 보니 스칼렛의 낯에는 미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영광입니다.”
그 모든 걸 파악한 루시페우스가 엷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어쩌면 그의 뇌리에, 스칼렛을 사교계에서 축출했던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게이블스 가주 대행님.”
“조만간 경께도 축하드릴 일이 생기면 좋겠네요.”
그들의 악수는 통상적인 것보다 오래 이어졌다. 두 사람 다 저마다의 감상에 빠져 그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못한 듯했지만… 루시페우스가 간신히 로젤리아의 손을 잡았다 놓은 것보다는 확실히 길었다.
그러니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에리나 경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성력을 쏟아낸 루시페우스는, 그의 오랜 소망대로 남들처럼 살 수 있게 된 거였다.
학자의 날 행사는 생각보다 굉장히 소탈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대회의실에 모인 탑의 구성원과 초대객은 자유롭게 여기저기 앉거나 서서 발표를 경청했다.
행사에 참석한 모두가 가장 기다린 순서는 맨 마지막인 빨간 눈의 마을에 관한 연구 발표 시간.
알비누스 후작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을 인위적으로 일으키기 위해 그 주민들을 납치한 정황이 알려지면서, 마을의 존재가 공론화된 거였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일까, 학자의 탑에서는 빨간 눈의 마을 촌장을 섭외해 그 생활상에 관해 질의응답하는 시간까지 마련하였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교양 높은 사람들이어서, 그를 대놓고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리고 발표의 모든 내용은 과거형이었다.
그들이 마력을 크게 타고난 바람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눈동자가 왜 붉은 빛을 띠는지 또한 이미 널리 알려진 덕분이었다.
그들에 대한 편견이 수백 년간 이어진 만큼 사람들의 의식이 쉽게 바뀌진 않을 거였다. 하지만 마을의 빈곤한 사정과 대륙급 범죄에 이용당했다는 사실 덕에 동정하는 척이라도 하게 되었다.
발표가 이어지는 내내, 나는 루시페우스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손은 언제나처럼 조금 더 따뜻한 정도였다. 평범하게 많은 수준의 신성력만을 지니게 된 그가 감정의 동요를 겪는대도 불안정해질 일은 이제 없을 거였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대서 그의 마음속 혼란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두 시간이 넘는 행사 내내, 나는 그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내가 평생 절대 놓지 않을 그 손을.
본행사가 끝난 뒤 탑의 연회장에서 소박한 만찬연이 치러졌다.
은둔한 현자들의 공간답게 세월감이 묻어나는 석조로 된 너른 홀에서, 효율적으로 배치된 샹들리에의 은은한 불빛 아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토론했다.
나는 렌틸 자작을 비롯한 간부급의 학자들과 다른 귀족 후원자들과 함께 다이닝룸에서 만찬을 즐겼다.
“전하 덕택에 닥터 안네마리가 아주 보람찬 한 해를 보냈습니다.”
“탑에서 많은 편의를 봐줘서 내가 고마울 따름이에요.”
렌틸 자작이 게이블스의 권리를 되찾겠다며 원로원에 데뷔한 데에는, 학자의 탑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으니까.
“전하께서 예전부터 탑에 많은 후원을 해주셨는데,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려 뿌듯합니다.”
“이번 빨간 눈의 마을 건만 해도 먼저 제보해주지 않으셨더라면, 지금처럼 마을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저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겠지요.”
“무엇보다 닥터 안네마리가 게이블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에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던걸요.”
학자들의 점잖은 금칠에 나는 생긋 웃었다.
“덕분에 의미 있는 법이 제정될 기회도 생겼으니까. 새해에 원로원에서 발의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힘써줘요.”
“영광입니다.”
“특히 귀족 출신 학자들이 아주 적극적입니다.”
“가주의 독단적인 후계 지명으로 고통받은 가문이 비단 게이블스만은 아니니까요.”
오늘 내가 직접 움직인 것은 근래 학자의 탑과 공조 중인 다른 안건 때문이기도 했다.
바로 스칼렛이나 렌틸 자작처럼 능력이 있는데도 불공평하게 후계에서 밀려나는 경우를 방지하는 법안을 만드는 것.
게이블스처럼 영향력 큰 가문이 능력 없는 자를 후계로 삼으면, 제국 전체의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번만 해도, 게이블스의 가신들과 게이블스의 사업에 투자한 가문들이 적극적으로 후작을 규탄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해관계에 얽힌 가문이 많은 가문의 경우 후계 지명 과정에 다른 가문도 관여할 수 있게 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었다.
‘일종의 주주총회 같은 거랄까?’
하지만 이는 각 가문의 자율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레 접근해야 했다. 때문에 학자의 탑의 연구가 필요했다.
고맙게도 학자의 탑은 아수라마수라의 폐단을 걷어내는 데 도움이 되겠다며 두 발 벗고 나섰다.
“그, 법안의 이름은 혹시 생각해두신 것이 있으신지…?”
정무 회의에 참석하면서 나와 안면을 튼 필리프가 내게 물었다.
내 대꾸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안네마리법.”
나는 렌틸 자작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어렸을 때 꿈꿨던 가주 자리를 조카딸이 쟁취하는 걸로 대리 만족할 수밖에 없는 내 스승에게 보은하려고요.”
“전하….”
렌틸 자작의 낯에 진한 감동이 번졌다.
만찬은 훈훈한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참, 빨간 눈의 마을의 촌장 칼뱅 씨가 루시페우스 경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게…요?”
후식이 나올 때쯤 날아온 화살에, 내내 묵묵히 앉아 있던 루시페우스가 얼떨떨한 낯을 지었다.
“경께서 그들을 구출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게 말하기엔 다소 어폐가 있습니다만….”
루시페우스가 당혹감에 젖은 낯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들을 더 돌봤어야 했는데, 내가 호출하는 바람에 그들을 내버려둔 걸 미안해하는 거였다.
“후작을 저지하고 그들을 핍박하던 서대륙 마검사들을 처단한 건 경이 아닙니까. 그게 고마운가 보지요.”
“언제 한번 꼭 대신전에 들러달라고 하더군요.”
학자의 탑 간부들이 연회를 즐기지 않고 먼저 돌아간 촌장의 편에서 한마디씩 얹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구조된 주민들은 건강 회복을 위해 교단의 보호 아래 지내고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학자들의 호의적인 말을 묵묵히 듣는 루시페우스의 낯은 어둑하기만 했다.
그는 조금 뒤에야 어렵사리 대꾸를 빚어냈다.
“그건…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어둑함이, 그저 양부의 흉악한 계략을 알았던 청년의 책임감으로만 보였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리의 모두를 경악게 했다.
“저 또한 빨간 눈이기 때문입니다.”
루시페우스의 고백에 아수라마수라 사교계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뒤집혔다.
만찬장에 자리했던 다른 후원자들의 입을 막을 수 없었던 탓이었다.
들었어? 막내 전하의 연인 말이야.
알비누스의 양자였던 검은 신사 말이지?
응. 그게, 그랬대잖아….
루시페우스가 다 각오하고서 공개한 거였지만, 그 소문이 황궁 구석구석에까지 나돌아다니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경, 괜찮아? 진짜, 여기저기서 다들 나불나불….”
그래서 오늘 수확제 개회연을 앞두고 루시페우스가 프리지어궁을 찾았을 때. 나는 그를 보자마자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경한테 허튼소리 하는 자는 없고?”
“제 아름다우신 뒷배가 이리도 든든한데 누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루시페우스는 갓 치장을 마친 나를 보고서 그저 감격스럽다는 낯만 지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사실….”
말끝을 흐리며 잠시 머뭇대던 그가 조심스레 안경을 벗었다. 자연스레 그의 눈동자가 맑은 적색으로 빛났다.
저편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시녀들이 저마다 작게 숨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얘들을, 진짜….
하지만 루시페우스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안경만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곧 다시 안경을 썼다.
“아니, 경….”
“저 같은 사람들이 이제 바깥에서 섞여 살려면…. 뒷배 든든한 제가 용기를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경에 걸렸던 마법을 해제했는지, 안경을 썼음에도 그의 눈동자는 본연의 빛을 잃지 않은 채였다.
차마 어색한 듯 내리깔린 그의 눈동자가 한동안 이곳저곳을 배회하였다.
그러고도 조마조마한지 입술을 달싹이던 루시페우스가, 불쑥 허리를 숙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제 용기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저의 작은 빛이시여.”
나를 에스코트하길 청하는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내 눈과 같은 높이에서 진한 초조함으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