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에필로그 (1)
알비누스 후작을 발견했을 때, 그는 게거품을 물고 혼절해 있었다고 했다. 재판정에 세워야 하니 일단 치유했으나 그의 정신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반쯤 풀린 동공은 허공을 배회하고, 제대로 다물지 못해 침이 줄줄 흐르는 입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소리가 두서없이 흘러나왔다고 했다.
“업보를 치르게 해줬을 뿐입니다.”
그를 어찌한 것인지 조심스레 물었을 때, 루시페우스는 그렇게 간단히 대꾸하고 넘겼다.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후작의 처분은 모두 그에게 맡겼으니까.
“목숨을 앗으면 더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잖습니까. 가졌던 걸 모두 잃고 빌빌대는 걸 보는 편이 더 좋겠더군요.”
악취미를 고백하듯 말했지만, 그게 반황실파처럼 구는 귀족파를 정리하기 위한 내 오랜 계획을 위한 것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후작이 양아들의 손에 죽었다면 누군가는 그를 동정할 테니까.
‘루시페우스가 그를 처단하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그를 법정에 세워서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전대미문의 대륙급 범죄에 책임을 따져 물을 곳은 더 이상 없었다.
후작은 미쳤고, 그와 범죄를 공모한 아들은 죽고 말았으니까.
책임질 이는 더 이상 없다지만 처벌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건을 비롯해 알비누스가 저지른 모든 죄는 알비누스의 이름에 그 책임을 묻게 되었다.
멸문이라는 방식으로.
행정부 각료만이 참석한 어전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었지만 원로원에서는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다.
벌을 연대하여 받을 방계는 후작의 손에 절멸한 지 오래.
그 업화에서, 루시페우스 한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신전에서 맹세한 바에 따라, 후작의 피를 받은 즉시 대신전의 귀족 명부가 수정되어 알비누스에서 분리되었다고 했지.’
그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며 받은 기사 작위가 있으니 귀족 신분을 아주 박탈당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간 그는 성이 없게 되었다.
‘나한테 메르제 후작 위가 있으니까, 나중에 결혼하고 메르제를 성으로 쓰면 되겠지?’
나는 더 이상 자제하지 않게 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해죽해죽 웃었다.
“뭐가 그리 좋으신가요.”
내가 히죽거리는 게 다 느껴졌는지, 내 연인은 손에 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으응, 우리의 장밋빛 미래?”
“…전하께선, 정말.”
귀 끄트머리를 붉힌 그는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떼고는, 잔뜩 찌푸린 미간 아래로 미소 지어 보였다.
“왜, 싫어? 방해돼? 부담스러워?”
“…전하께선 답을 다 아시면서 항상 그리 물으십니다.”
그의 맨손이 제 무릎을 베고 누운 내 코끝을 얄밉다는 듯 짧게 흔들었다.
루시페우스가 반대쪽 팔을 걸친 차창 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지금 기차를 타고 학자의 탑에 가는 중이었다.
1년에 한 번, 학자의 탑 내부를 일반에 공개하고 한 해의 연구 성과를 보고하는 학자의 날.
원래는 12월에 열리는 것이, 올해는 이례적으로 11월 초에 열리게 되었다.
올해 학자의 탑에서 가장 공들인 연구가 빨간 눈의 마을에 관한 것인데, 이번 일로 마을의 존재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 탓이었다.
그리고 그 연구가 리나의 발견에서 시작된 만큼, 전략실 명의로 학자의 날에 초청받은 참이었다.
“기차 여행이 그리도 신나십니까.”
“내가 이 몸으로 어딜 돌아다닐 수나 있었겠어? 예전에는 종종 기차 여행도 다녔었는데. 이젠 20년도 더 된 일이네….”
학자의 탑에 방문하게 되자마자 내가 고집한 것은, 기사들을 보내는 대신 내가 직접, 그것도 기차를 타고 가겠다는 거였다.
마차보다야 마법을 사용하는 기차가 빠르긴 했다. 하지만 멀미에 취약한 나는 내 전용 마차가 아니면 오랜 시간 이동하기가 어려워 세실 평생 단 한 번도 기차를 탄 적이 없었다.
‘이따금 기사들이 출장 가면서 기차를 탔다고 할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다고.’
하지만 이제 내겐 루시페우스가 있으니까.
“경이 예전에 쓸모 많다고 나를 설득하더니, 정말 쓸모가 많았어.”
“쓸모 같은 거 없어도 된다셨으면서요.”
“으응, 그래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지.”
나는 들뜬 마음에 정말 되는 대로 주워섬겼다. 내가 제 손을 잡고 거기 볼을 비비며 하는 말에 루시페우스는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보좌관실은 어때? 사람들이 텃세 부리고, 경 괴롭히고 그러지 않아?”
“그들이 제게 무슨 텃세를 부리겠습니까. 제게 전하처럼 든든한 뒷배가 있는데요.”
“그들 뒷배는 그레이스 언니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막냇동생이라면 끔찍이도 아끼시거니와, 저야 잠깐만 같이 일하는 사이 아닙니까.”
“아카데미 때 경 괴롭혔던 것들 있는 건 아니고?”
“…뭐, 그런 자들은 애초에 황태자 보좌관실에 들어올 수나 있겠습니까. 대부분은 이번 일로 윌로우 게이블스와 함께 사교계에서 추락했고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어조로 말했지만, 굳이 저를 괴롭힌 게 아니라도 아카데미를 함께 다닌 이들을 대하는 게 편하지는 않을 거였다. 아카데미 시절의 소년 루시페우스는 대부분의 학생에게 유령 취급을 받았으니까.
“…괴롭혔던 사람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다 처리할게. 그레이스 언니한테 말해서 말이야.”
“정말이지….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박힌 돌을 굴러온 돌도 아니고 지나가던 돌이 뺄 수 있다뇨.”
“그러엄, 이게 황실 권력이야. 달의 신이 경에게 준 행복에 이런 무소불위의 권력까지 있는 거라고.”
내가 유난스럽게도 너스레를 떨자, 루시페우스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페우스는 요 얼마간 임시직으로 황태자 보좌관실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멸문된 알비누스의 재산 처리를 위해서였다.
후작의 수족으로 일했던 그만큼 알비누스의 재산 목록을 잘 아는 이가 없었으니까.
알비누스의 영지와 사유 재산은 모두 황실에 귀속되었다. 알비누스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배상해야 마땅했으나, 피해자라고 할 만한 게 대부분 알비누스의 음모에 부화뇌동한 가문들이었다.
결백한 피해자라곤 힐베르크와 로즈버리뿐.
새 출발을 준비 중인 로즈버리는 일전에 루시페우스에게서 배상받은 것에 만족했으며, 알비누스의 지원금이 끊겨 파산한 몇몇 군소 영지가 힐베르크에 복속되는 선에서 그쳤다.
“그리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황태자 전하께서 많은 편의를 봐주고 계십니다.”
“그레이스 언니도, 응? 혹시 경에게 약속된 거랑 다른 일 시키려고 하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내가 바로 가서.”
“오셔서요?”
“나랑 놀기도 바쁘다고 떼쓸게.”
웃음을 목구멍 안으로 삼킨 루시페우스는 책을 쥔 손을 허공에 고정한 채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전하께서 어차피 황태자 전하를 뵈러 자주 오가시니, 저야 오래 근무하면 전하도 종종 뵐 수 있고. 괜찮습니다.”
“일찍 퇴근해서 수선화궁으로 오면 되지.”
“수선화궁에는 아무래도 찾으시는 분들이 많으니, 좀 번거로워서….”
“성가셔? 내가 로젤리아 언니한테 기사들 단속 잘하라고 따끔하게 한마디할게.”
“어쩜 이리도 든든하신지….”
루시페우스의 손끝이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아닌 게 아니라, 루시페우스가 성기사단을 옮기기 위해 쓴 이동 마법진을 신성력으로 가동할 수 있다는 게 알려지자마자, 성기사들이 마법 술식을 배우겠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물론 거기에는 현격한 재능의 차이라는 장벽이 존재했다. 때문에 그들과 말 섞는 것이 루시페우스에겐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내가 오죽하면 그러겠어? 이렇게 둘이 오래 같이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말이야.”
그리 말하며,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 무릎을 대고 섰다. 뭘 하려고 그러나, 루시페우스가 나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렇게 단둘이 계속 붙어 있는 게 정말 오랜만이긴 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돌아오자마자 후속 문제로 저마다 바빠서, 루시페우스가 밤 시간을 쪼개 프리지어궁에 몰래 찾아오는 게 다였으니까.
어쩌면 수도원이며 빨간 눈의 마을에 함께 갔던 것을 빼면 아주 처음인지도 몰랐다.
“서대륙 공통어야 내가 평생 통역해줄 테니까….”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서대륙 공통어 독본》을 뺏어 그대로 차창 앞 테이블에 엎었다. 그러는 내내, 루시페우스는 새침한 척하고 있는 내 낯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한테 집중 좀 하지?”
“…분부대로요.”
어느덧 눈매로 호선을 그린 남자는 그대로 내 목뒤를 잡아 제게로 당겼다.
사르르 휘장처럼 드리우는 내 머리칼 사이로 입술이 맞물렸다.
대륙 한가운데 자리한 학자의 탑은 위도상 황성보다 남쪽이었지만 산속에 자리해서인지 훨씬 쌀쌀했다.
학자의 탑 아랫마을의 간이역에서 하차해, 거기서 마차를 빌려 타고 또 30분.
쓸모 많은 내 연인의 돌봄 덕에 개운한 기분으로 마차에서 내려서자, 초겨울의 청량하고 차가운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학자의 탑을 품은 산자락은 곳곳에 눈이 쌓여 희끗희끗했다.
“여긴 벌써 겨울이네.”
잠깐만이라도 조심하고자 위장 보닛을 써, 갈색으로 물든 내 머리칼 사이로 입김이 보얗게 흩어졌다.
“황성에도 곧 겨울이 오겠죠. 다음 주면 수확제인걸요.”
“겨울, 좋네.”
“겨울을 좋아하셨군요.”
루시페우스가 내 손을 잡아 학자의 탑 입구로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으응, 그건 아니고. 이번 겨울엔 기대되는 게 많으니까.”
“저희도 기대되는 게 많지 말입니다.”
따로 말을 달려 도착한 리나가 우리에게 바싹 따라붙었다. 처음으로 빨간 눈의 마을을 발견한 공로가 있는 만큼, 리나가 오늘의 호위를 겸하여 함께 참석하게 된 거였다.
성기사단의 새하얀 정복을 차려입은 리나는 평소보다 점잖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하사하시겠다고 노래하신 겨울 휴가가 어찌나 기다려지는지 말입니다.”
“한 입으로 두말 안 하니까 그만 좀 강조해.”
“예에, 게다가 그게 단순히 저희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하의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인 만큼 절대 안 무르실 거라는 것도 압니다.”
그리 말하며 리나는 루시페우스에게 히쭉 웃어 보였다.
“전하 모시고 어디 여행이라도 가실 거면, 저 휴가 때로 부탁드립니다. 새하얀 설원에 계신 전하의 자태를 놓치는 건 아쉽지만, 제가 고향에서 새해 맞는 게 상경하고 처음이라 할머니가 벌써 신나서 말이지요.”
“그런 데 안 갈 거거든.”
“아, 그럼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시려나요?”
“사생활에 신경 끄지?”
느물거리는 리나의 낯에 눈을 흘기며, 나는 간만에 암조 기강이 이대로 괜찮은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하,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그렇게 현관의 홀 안으로 들어서자 렌틸 자작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 옆에는 스칼렛도 함께였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이젠 아주 공개 연애하기로 하셨나 보지요?”
“영애, 말 좀 가려서…. 아, 아니지.”
스칼렛의 능청에 쏘아붙이려던 나는 말실수했다는 듯 과장하여 입을 톡톡 두드렸다.
“게이블스 가주 대행. 말 좀 가려서 해주면 어떨까?”
스칼렛이 그녀 특유의 고아한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