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나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 (6)
“제가, 말입니까? 하지만….”
루시페우스의 목소리에 크나큰 당황이 깃들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혹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게, 단순히 제가 과한 신성력을 지녀서가 아니라….”
“그래. 그대의 신성력이 애초에 그리 쓰이는 게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일전에 렌틸 자작이 성녀의 때 이른 죽음과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가 짙어진 현상의 연관 관계를 언급한 것이 떠올랐다.
“대대로 성녀들의 출현 주기를 따지면 격랑의 주기와 일치했거든요.”
학자의 탑에서 꾸민 가설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렌틸 자작은 성녀가 계시되는 것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와 연관 있다고 추측하는 듯했다.
지난 격랑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던 게 성녀의 신성력이 담긴 봉인구를 가져가서라고도 했고.
게다가….
“에리나 경은 그걸 알아서 격랑에 자원한 모양이야.”
“본인의 신성력이 격랑의 피해를 막는 데 쓰여야 하는 걸 알았던 거지.”
레베카 역시, 비슷하게 판단하는 듯했고.
두 자리에 함께 있었던 루시페우스 또한 나와 같은 깨달음에 다다른 듯했다.
특별한 신성력을 타고나는 성녀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닫기 위해 계시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조금 뒤 루시페우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소리는 개운한 듯 울렸다.
“…저는 오래전부터, 어머니께 받은 신성력을 저버리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 삶의 목표였고요.”
그가 동대륙의 샤먼에게서 받은 조언은, 어머니의 시신이 자리한 곳에 신성력을 버리라는 것.
그리고 지난 격랑 때 일찍 전사하여 영광의 홀에 안치되지 못한 에리나 경의 시신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균열에 흡수되었다.
이어지는 루시페우스의 말끝은 가늘게 떨렸다.
“그 꿈을… 제가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레베카는 그에 관해 로젤리아와 상의하겠다며 주둔지를 떠났다.
막사에는 나와 루시페우스 단둘이 남게 되었다. 레베카가 나가며 뭐라고 귀띔했는지, 레오폴트가 호위랍시고 다시 들어오지 않은 덕분이었다.
“잠깐 눈 붙이시는 게 어떨까요.”
“으응, 안 졸린데. 경이 너무 완벽하게 치유해줘서 그런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루시페우스는 짧게 침음했다.
그가 신성력을 터뜨린 것이 그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내 호출을 받고 날아오고선 내내 불안정하긴 했으니까. 신성력을 조금만 써도 될 걸 엄청 퍼부었던 느낌이고.’
뭐,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나는 내 연인을 위로할 겸, 사심도 채울 겸 내 옆자리를 팡팡 쳤다.
“경이 팔베개해 주면 잠이 올 것도 같고.”
“…전하, 여긴.”
“언니들이 나 알아서 쉬고 있으라고 했는데, 뭘?”
내 언니들이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자마자 나는 양껏 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나도 경이 걱정이야.”
“저야….”
“그래, 경이야 튼튼하지. 그래도 요 며칠 제대로 못 잤잖아?”
빨간 눈의 마을에서도 내게 무릎을 빌려주고서 주변을 경계한답시고 선잠만 잤더랬는데.
“원래 사랑하면 걱정되는 거야, 응?”
내가 내 머리맡에 앉은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리자, 루시페우스의 귀 끝이 붉어졌다.
“…제가 정말, 전하를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나 이겨 먹으려고?”
“그런 말씀이 아닌 걸 아시면서….”
“이겨 먹고 싶으면 말해. 경한테는 내가 다 져줄 수 있어. 근데 일단 지금은 팔베개해줘.”
달의 신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와서일까, 그와 나의 운명을 확신하게 돼서일까.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능글맞은 소리가 자꾸만 튀어나왔다.
루시페우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도대체, 정말이지 전하께서는.”
“헤헤.”
그는 그대로 다리를 침대 위로 올려 내 옆에 누웠다. 와중에도 그저 나를 간호하기 위한 것임을 피력하듯 이불 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답삭 그의 어깨 바로 아래 머리를 괴었다.
그의 체온은 어느덧 평상시 수준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보다 조금 높은, 딱 따뜻한 정도.
루시페우스의 손끝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여전히 나를 한번 잃었던 충격에서 온전히 헤어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느릿하게 그의 단단한 가슴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서로에게 기나길었던 오늘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그의 손끝이 더는 떨리지 않고, 막사 안의 공기가 그저 고요하게 가라앉았을 때.
나는 입 안에서 내내 굴리던 말을 조심스레 뱉었다.
“내가 거짓말을 했더라.”
“거짓말…요.”
“전에 경이 물어봤었지, 달의 신을 만난 적 있느냐고.”
“예, 그랬죠.”
“꿈에서 봤는데, 내가 달의 신을 만났었어.”
꿈이라면…. 루시페우스는 끄응, 침음을 삼키며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그것이 아까 전, 내가 죽은 줄 알았을 때의 일임을 짐작한 거였다.
그의 입가에 거친 한숨이 어렸다.
“괜찮아, 경. 별일 없었고, 나 여기 있잖아. 응?”
얼굴 보여줘, 나는 손을 뻗어 그가 제 얼굴을 가린 손을 톡톡 쳤다.
괴로움을 내색하듯 얼굴을 쓸어내린 손을 따라, 그의 눈동자 또한 차분히 내리깔렸다. 내 낯을 살피는 그의 눈빛은 그저 조심스러웠다.
저에 비하자면 약하기 그지없는 나의 손짓에, 그는 번번이 이렇게 모든 걸 허락하고 만다.
그 사실에 벅차오르는 마음을 담아, 나는 최선을 다해 방긋 웃었다.
“경이 날 지켰잖아.”
“제가 한 게 뭐 있습니까….”
그저 슬퍼한 것밖에는…. 루시페우스가 앓듯이 중얼거렸다.
그가 자책에 빠지지 않도록, 그의 신경을 유인하듯 나는 그의 가슴팍을 손톱으로 갉작거렸다.
“경 때문에 내가, 여기 있잖아.”
셔츠 아래 그의 품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씀은….”
“경의 두 번째 생을 행복하게 하려고 내가 왔잖아.”
“…….”
어느새 그의 낯에는 명백한 고통과 당혹감만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 짐작대로야.’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그를 토닥였다.
달의 신에 의하면, 루시페우스는 저를 위해 내가 이 세계에 온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작은 달에서 본 루시페우스는, 생을 되감는 과정에서 작은 달을 방문한 그는, 달의 신이 저를 위해 새로운 존재를 불러온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는 세르니타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그 일을 기억해 냈다고 했다.
한데 몇 번이고 내게 마음을 고백하면서도, 단 한 번도 내 환생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전 생의 나와 알았느냐고 물었을 때 결국 대답하지 않은 걸 보면… 그는 오히려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듯했다.
‘세르니타 사냥 대회가 벌써 석 달은 더 전의 일이니까….’
내 사소한 괴로움 하나하나마저 제 탓으로 돌리는 이 바보 같은 남자는, 그 사실에 그리도 오래간 괴로워한 거였다.
그마저도 제 이기심이 빚어낸 과오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에게 더욱 바싹 붙으며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두 개의 심장 소리가 엇박자로 울렸다.
루시페우스는 한참 뒤에야 간신히 목소리를 울렸다.
“…죄송합니다.”
이거 봐, 역시 그렇다니까.
“제가 괜한 소리를 해서… 고작 제 사소한 소망 때문에 전하께서 낯선 세계에 오게 되셨는데….”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멎은 지 오래였다. 그 손은 다시금 제 얼굴을 가리듯 덮고 있었다.
“그러니 제가 완벽하게 지켰어야 했는데…. 전하를 잃고 만 제가 어찌나 한심하고 죽고 싶던지….”
루시페우스의 말소리에는 다시금 물기가 배어나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 그의 손을 걷어냈다. 그의 낯 위로 내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소한 소망이라고?”
“그거야….”
“경이 한순간이라도 행복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저 멀리 다른 쪽을 향했다. 불만스레 굳은 그의 입매는, 그가 이 화제를 피하고 싶음을 명백히 알려주었다.
마치 치부를 들킨 것처럼….
‘아니, 정말 치부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그의 심장이 뛰는 곳에 내 손을 얹었다.
“믿어봐 달라고 했잖아.”
내내 얼굴에 걸었던 웃음기도 지우고 그에 대한 사랑으로 그저 벅차오르는 마음도 눌러 내리며, 나는 최대한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경의 기쁨과 슬픔… 아니, 경의 기쁨과 행복에 내 기쁨과 행복을 걸기로 했다고.”
언젠가의 고백을 언급하자, 내 손안에 담긴 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사소하겠어?”
“하지만, 전하께서 이 세계에 오신 것에 비하면 제 소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걸요….”
루시페우스는 다시금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안경 아래로 파고든 그 손짓은 내 시선으로부터 간신히 자신을 숨기는 정도였다.
그의 자책이, 그리도 깊디깊어서.
이는 한편으로 내게도 다행이었다.
나의 한마디 한마디에 울고 또 웃는 남자의 낯이 시시각각으로 흐려졌다가 빛나는 걸 보게 된다면, 나 또한 가슴이 저미고 또 크게 떨릴 테니까.
우리의 지난 이야기는 이미 다 흘러갔으니, 그저 몇 마디 말로 담백하게 정리하면 될 일이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살아갈 시간이니까.
나는 제 눈을 덮은 그의 손등에 내 손을 겹쳤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내 손가락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가 자원했어.”
그의 손이 움찔해, 나는 그 손을 꾹 눌렀다.
“전생의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길 바랐거든.”
내가 받고 싶어서 먼저 퍼주던 그 관심과 사랑에, 지겨워하지 않고 화답해주는 사람이.
“서로를 운명이라 확신하는 사랑이 부러웠고,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는 게 부러웠어.”
루시페우스가 제 입술을 말아 무는지, 그 모양 좋은 입술에 핏기가 조금 사라졌다.
내가 슬퍼했다니 그 이상으로 슬퍼하는 걸까? 결국 내가 제게로 왔다는 감동의 발로일까? 내게 그런 존재가 될 거라며 의지를 다지는 걸까? 아니면 그의 죄책감이 여전해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너머,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그 기쁨을 알게 해줄 사람이 필요했어.”
그리고, 찾았고.
그 의미를 담아, 나는 허리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단단한 입술이 거칠했다.
“그래서 달의 신이 나를 섭외했나 봐.”
“섭외…요.”
“내가 읽었다는 소설 있잖아. 경의 첫 생이 기록된.”
아…. 그의 입가에서 작은 탄식이 배었다.
“그게 달이 신이 쓴 거더라고.”
“예, 아무래도 그렇겠죠….”
여전히 눈이 가려진 아래로 그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그 이야기를 좋아한 사람 중 한 번이라도 경의 편에서 생각해본 사람을 찾았대. 그리고….”
내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듯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오르내렸다.
“누군가를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도 좋은 사람을 찾았대.”
나는 그의 손을 깍지 낀 그대로 들어 올렸다. 스르르 떨어진 안경 너머에서 내 전생의 눈동자와 같은 빛을 띠게 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내 소원이 경의 소원과 닿아 있었던 거야.”
루시페우스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빚어내지 못했다. 그의 낯에 번지는 게 안도감인지 충만감인지, 그 속도가 너무 느려 나는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이번 생에 내가 타고난 모든 것…. 황실이라는 배경, 내 가족들, 내 스승과 암조 기사들, 친우들….”
나는 겹쳐 쥔 두 손을 그대로 그의 심장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경까지.”
남자의 눈에선 다시금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걸 닦아내듯, 나는 그의 뺨에 내 입술을 내리눌렀다.
“내가 가진 모든 건, 경 덕분에 내가 이 삶을 얻게 되어서야.”
그의 팔이 어느새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심장이 맞닿은 채 그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이고, 귓가에서는 그의 눅눅한 숨소리가 거칠게도 바스러졌다.
거기 밴 건 벅차오르는 감격일 거였다.
“달의 신이, 경이 새로운 삶을 산대도 신성력을 넘겨받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댔지.”
“…예. 그랬죠.”
간신히 대꾸한 그의 말소리는 한껏 물먹은 채였다.
“경을 두고 특별한 아이라고 했어.”
“…….”
“경을 잘 부탁한대.”
나를 안은 그의 팔이 더욱 단단하게 죄었다.
다음 날 새벽, 루시페우스는 레베카와 함께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두 생에 걸친 소원을 이루는 데 성공했고, 돌아올 수 없는 바다는 더 이상 열리는 일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