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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09화 (209/220)

209화. 나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 (5)

“그대도, 고생 많았네.”

나를 품에 안은 채, 레베카가 내 머리 너머로 루시페우스에게 말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바로 가보고 싶었는데, 접근하기가 어려워 기다리고 있던 참이네.”

레베카는 에둘러 말했지만, 루시페우스가 폭주하여 우리가 있던 절벽 쪽이 망가졌기 때문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세르니타에서의 일로 루시페우스가 정신을 잃었던 걸 보였었으니, 그때와 같은 상황이었던 걸 알았겠지….’

나는 레베카가 그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할세라, 재빨리 몸을 떼어 울먹울먹한 낯을 지어 보였다.

“언니, 루시페우스 경은 그저….”

“그저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는 거지?”

“앗….”

능청스러운 말에 나는 금세 낯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씨익 웃으며 내 볼을 살짝 꼬집은 레베카는 루시페우스에게 내처 말했다.

“그대의 마법이 대단하더군. 아로카트령 본성에서 말을 쉴 새 없이 달린대도 몇 시간은 걸린다던데, 그대가 만들어둔 마법진이 남아 있어서 순식간에 왔지 뭔가.”

“…아, 그걸 쓰셨군요.”

“아우렌바흐 소공작이, 이쪽 마법진이 아직 남아 있으니 한번 써보라고 알려 주더라니, 그게 정말 작동할 줄이야.”

레베카가 저편에 있는 레오폴트를 눈짓했다.

레오폴트 또한 냉큼 와서 걱정했다느니 놀랐다느니 한껏 수선거리고 싶은 낯이었으나, 나를 둘러싼 이가 많아 일단 양보하는 듯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신성력으로도 쓸 수 있게 만들었다고?”

“예. 그땐 전하께서 쓰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루시페우스의 말끝이 한껏 가라앉았다. 내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레베카가 올 일은 없었으니까.

“그대 덕에 세실이 다 회복했겠지만, 내가 한 번 더 살피면 좋을 것이니….”

레베카가 느릿하게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네 기사들과 해후하고 막사로 오렴.”

“네, 언니.”

“그리고 그대도.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말이야.”

“예.”

…의논? 내가 의아하다는 낯으로 눈썹을 작게 들어 올렸지만, 레베카는 그저 웃어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다음으로는 암조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전하, 진짜…!”

“아무리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이 급하다고 하셔도, 저희를 다 보내신 건 너무하셨어요!”

“저희는 전하를 지키는 게 사명인 놈들인데요.”

“전하 곁을 비우라는 명이 가당키나 합니까?”

“이런 명을 받들려고 충성을 맹세한 게 아니었지 말입니다…!”

케인이며 리나며 알렉스며… 모든 기사의 낯이 저마다 슬픔이나 억울함 같은 것들로 한껏 일그러진 채였다. 심지어 엘런마저 코끝이나 눈가가 발개져 있었다.

“미안해, 미안.”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그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모두가 안심할 수 있게끔.

10년 넘게 동고동락한 내 수하들이 나 때문에 괴로워한 흔적이 여실한 낯을 보니,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놈들이 어쭙잖게 양동 작전을 벌였던 걸 보니, 이 녀석이 여기 남아 있었어도 어떻게든 다른 일을 시키셨을 것 같지만요.”

케인이 데릭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데릭의 낯이 암조 기사들 중 가장 처참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쪽에 가라는 걸 끝까지 거부하지 않았다고 크게 자책한 모양이었다. 그가 가장 마지막에 남은 무리를 통솔했으니까.

“제가 어떻게든 끝까지 버텼어야 했는데…. 다음엔 꼭 항명할 거라고요!”

그 마음이 짐작되니 미안해서, 나는 부러 장난스레 대꾸했다.

“경, 그거 좀 불충하게 들리는 거 알지?”

“이제 좀 불충해야겠습니다.”

“전하 안 계신 동안, 저희끼리 이야기 좀 해 보았는데요.”

“전하 말씀 말고, 급료에 충성하기로 말입니다.”

“예에. 돈줄은 어떻게든 사수해야 하니까….”

“얼씨구?”

갈수록 가관인 기사들의 투덜거림에 어느새 눈물은 쏙 들어가고 웃음만 비어져 나왔다.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 풀어져, 나는 필요한 이야기를 물을 수 있었다.

“성기사단은, 아직 복귀 전인가 보지?”

그간의 보고를 요구하는 걸 깨닫자마자, 세 소대장이 앞으로 나왔다.

“네. 술식이 중단되었는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반응이 현격히 느려져서, 저희는 복귀하고 성기사단만 남았습니다.”

루시페우스 쪽을 돌아보니 술식이 중단된 게 맞는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용돌이가 생긴 곳들을 정화하고, 추가적인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좀 더 머무르며 살핀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도 구조해야 하고요. 저희와 함께 왔던 마검사들이 아직 그곳에 남아 있어서, 마도 기계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리고 아까 이쪽을 급습한 자들이 있었는데….”

“저기 있습니다.”

이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레오폴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한쪽 구석에 포박된 채 꿇어앉아 있는 무리가 있었다. 마르크 백작, 프랑 자작, 그렉 랜들 같은 이들의 낯이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사상자는 없고?”

“부상자야 좀 있지만, 죽은 자는 없어요. 말씀하신 대로 무기가 개조된 거라 간신히 분전한 거지, 검법조차 제대로 모르니 싸움이 제대로 안 돼서 말이죠.”

하긴, 검도 맞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까. 내가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무기류에 조예가 깊은 알렉스가 첨언했다.

“근력을 보조해서 상대의 검격을 잘 버티게 하고, 실제 검날보다 더 넓은 범위에 피해를 입혀서 상대에게 스치지 않아도 상처를 내고… 그런 정도의 마법이 걸린 듯하더군요.”

“저편 마검사들이 공격용 마도 기계에 진심이라더니, 재밌는 걸 만들었나 보네.”

“저자 말씀이시죠?”

케인이 포박된 무리 바로 옆을 가리켰다. 성기사 넷이 포박된 남자 하나를 엄중하게 지키고 있었다.

“어, 저 마검사는 아까 레오에게 당했는데…?”

생각해보니, 저자에게 당했던 하디와 마검사들도 멀쩡하고…?

<그대들, 어떻게 된 거야?>

<저희가 엄살을 부렸던 건 아니고요….>

마검사들은 하나같이 영 겸연쩍은 낯을 지었다.

<나도 그대들이 기절한 척한 거라 생각하고 추궁하는 건 아니야.>

도미닉 놈과 나타난 마검사는 그들이 과마력자라고 부를 정도로 마법적 재능이 더 뛰어났고, 희한한 마도 기계를 쓰기도 했으니까.

<루시푸-스 경께서 신성력을 쓰신다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럼 그대들도 치유된 거야?>

나는 세르니타에서 루시페우스가 기절한 이후로, 응급 처치한 적 없는 내 상처가 빨리 아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번에도 루시페우스의 신성력이 제멋대로 폭주해 주변의 이들을 치유한 모양이었다.

피아 구분 없이.

‘그땐 상처가 좀 더 빨리 나은 정도였는데, 이번엔 다들 싹 나은 걸 보면….’

그만큼 루시페우스가 크게 동요한 거겠지.

그가 느꼈을 깊은 절망감을 생각하니 심장부터 손끝까지 욱신거렸다.

“뭐랍니까?”

내 상념을 걷어내며, 우리의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던 케인이 물었다.

“응, 루시페우스 경이 너무 자비로워서 말이지, 나 살리는 김에 덩달아 다 치유해 줬다네?”

“예에?”

내가 루시페우스의 팔을 안으며 부러 발랄하게 하는 말에, 기사들은 떨떠름한 낯을 지었다.

“전하, 진짜 너무하세요….”

“저희가 그렇게 엮어댈 때는 아니라고 하시더니.”

“이젠 애인 편만 드시고….”

“뭐, 뭐…! 경들 원하는 대로 경들 일도 줄고 잘됐네, 어?”

“전하 경호 일만 줄이고 다른 일은 잔뜩 시키셨으면서요….”

그리 투덜대면서도 암조 기사들의 낯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내가 잘못된 줄 알고 울며 자책한 흔적이 여실한 그 낯에서 말이다.

“전하, 막사까지 모시겠습니다.”

암조 기사들과 마검사들과의 대화가 다 끝난 뒤.

아직 로젤리아의 명이 거둬지지 않았음을 피력하듯, 레오폴트가 막사로 가는 길을 앞장섰다.

레오폴트 역시 조금 울었는지 눈가가 발갰다.

짜식, 15년 우정의 보람이 있네.

아멜리 또한 종종거리며 내 곁을 떠나지 못했다. 내가 이상한 걸 제일 먼저 알아차렸으니, 아멜리야말로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겪은 인물이었다.

“전하께서도, 루시페우스 경도 다 괜찮아지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나 때문에 루시페우스가 불안정해진 것까지 다 봤겠지….

조금 민망했다. 늘 단단하고 올곧은 여주인공은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그저 미소 지어 보일 따름이었지만.

말한 대로 레베카는 로젤리아의 막사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세실, 넌 일단 눕거라.”

“저 괜찮은데….”

“알아. 그래도 이 언니는 걱정이 돼서 말이야.”

레베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시페우스가 번쩍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간이침대에 눕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두 사람.”

레베카가 막사 입구에 서 있는 레오폴트와 아멜리를 향해 말했다.

“황실과 교단 간의 비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해서 말이야.”

완곡한 축객령이었다.

로젤리아로부터 내 호위를 명 받은 레오폴트는 다소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아까 나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했다고 자책했으리라.

아멜리가 그의 팔을 작게 흔들었다.

“레오, 호위는 밖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적들도 다 체포됐고.”

“…예, 그렇긴 하지만요.”

쓰게 웃으며 읊조린 레오폴트는, 이내 그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낯에 걸었다.

“그럼 밖에 있을 테니, 필요하신 일이 생기면 지체 없이 부르십시오.”

그러고는 절도 있게 성기사단의 인사를 해보인 뒤, 아멜리와 함께 막사를 빠져나갔다.

펄럭, 휘장으로 된 문이 닫히며 두 사람의 뒷모습이 사라졌을 때. 레베카가 내게 이불을 덮어 목 바로 아래까지 덮어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가 이제 극비일 필요는 없지만, 그대의 의중이 어떠한지 몰라서 말이야.”

나는 레베카의 용건이 루시페우스의 신성력에 관한 것임을 직감했다.

루시페우스의 의사를 중요시해야 할, 황실과 교단의 비밀이랄 것은 기실 그것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성녀의 쌍둥이 동생, 즉 루시페우스의 외조모가 지녔던 신성력의 행방. 에리나 경이 넘겨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그 신성력의 행방 말이다.

그리고 레베카는 루시페우스가 그 신성력을 지닌 걸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가 괴로울 만큼 많은 신성력을 갖고 있음을 아니까.

“…제 신성력에 관해 말씀하시려는 거군요.”

루시페우스 또한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대꾸를 늦추고픈 듯, 침대의 머리맡에 걸터앉아 내 이마 위로 은은한 신성력을 쏟았다. 그새 마기가 몸에 스며들었었는지 관자놀이가 시원해졌다.

이어지는 말은 마치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울렸다.

“짐작하시는 게 맞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신성력을 제게 넘겨주셨습니다.”

“…그렇군.”

“신성력이 그런 식으로 유전되는 일은 없다는 걸, 저도 그날 전하께 이야기를 들은 뒤 문헌을 찾아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신성력을 양도할 수 있는 거였다면, 나야말로 내 신성력을 세실에게 나눠줬을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레베카의 말에 루시페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또한 내게 신성력을 넘겨줄 방법을 찾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의 깊디깊은 마음에 고맙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진중한 분위기 탓에 내가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 때.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해서 말이야.”

“제안…이라 하시면.”

“그대의 신성력으로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닫아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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