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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07화 (207/220)

207화. 나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 (3)

그가 제 삶의 주인인 적이 없다…. 그리 말하는 달의 신이 비정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제 삶을 바탕으로 쓴 그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일 수 없지.”

그 말은 한편으로 내 전생의 슬픔을 건드렸다. 얼굴에 치미는 뜨거운 것들을 나는 애써 참았다.

내 생각을 다 알았을 거면서, 달의 신은 훌쩍이는 나를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 대신 변수를 하나 줄게.

- 변수요?

-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는 사이, 에리나의 모습을 한 달의 신은 그를 위한 영혼을 섭외하는 중이었다.

저 짧은 사이에 내 전생에 ‘공제눈’의 이야기를 연재해서, 한 번이라도 루시페우스 알비누스라는 등장인물의 편에서 생각한 이를 찾고, 개중에 누군가에게 사랑을 쏟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지금의 삶을 떠나도 무방할… 그런 사람을.

그렇게 찾은 게 나.

그런데, 나는….

“어쩌겠니. 그게 너인걸.”

“…….”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나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이며 훌쩍였다.

“그런 너인데도, 너희는 결국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하게 됐잖아.”

참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때의 기억을 되찾은 루시페우스는 내게 달의 신을 만나본 적 있냐고 물었었더랬다.

‘…저를 위해 달의 신이 나를 부른 것도 그때 알게 된 거야.’

그 거대한 운명의 무게에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도 빠르게 뛰어 아플 정도였다.

루시페우스를 보고 싶었다.

저 루시페우스가 아니라, 이번 생의 루시페우스를.

내가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저버리지 않을 나의 연인을.

“가봐.”

한참 나를 울게 내버려둔 뒤에야 달의 신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했지, 그 애는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이젠 안 죽고 살고 싶다잖아.”

“…그치만요.”

“넌 잘했어. 네 말마따나, 엉터리 이야기를 단서로 더듬더듬 찾아가서 결국 해냈잖아.”

내가 맨날 ‘공제눈’이 엉터리라고 투덜댄 걸 다 알았다니, 찔리면서도 통쾌했다.

“그 이야기를 네가 더 재밌게 고쳐줘서, 나도 지켜보면서 즐거웠고.”

그때, 저편의 달의 신이 이전 생의 루시페우스를 떠나보냈다.

나는 어느새 달의 신과 손을 맞잡은 채 칠흑 같은 무(無)의 공간에 떠 있었다.

“그리고 고마워. 우리의 힘을 가진 저 특별한 아이가 삶의 의지를 다지게 해줘서.”

“특별한… 아이요?”

루시페우스의 혈통과 연관이 있는 말인가? 성녀가 신탁의 계시를 받아 나타나니, 그가 물려받은 신성력이 특별한 걸 수도….

달의 신이 싱긋 웃었다.

“앞으로 네가 비는 소원은, 되도록 다 들어줄게.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해. 그 아이의 행복을 끝까지 책임져 준다면 말이야.”

너무 남용하지만 마.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홀로 남겨졌다.

“안 돼….”

루시페우스의 손이 덜덜 떨리며 간신히 세실리아의 얼굴에 닿았다.

풀어진 동공. 작게 벌어진 입술. 창백해진 얼굴.

그 모든 게 지시하는 바는 명백했다.

“도, 도대체….”

손의 화상은 물론이요, 터졌던 입가도 넘어지며 쓸린 생채기까지 모든 게 아문 지 오래였다.

완벽히도 깨끗한 외관을 한 세실리아는, 그가 몸 곳곳을 살피는 동안 미동도 없었다.

“다, 다친 곳도… 더, 없으…신데….”

루시페우스가 간신히 웅얼거린 어눌한 말소리에, 아멜리가 울음을 삼켰다.

“이, 런 장난에는… 저는 못 웃습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루시페우스는 스스로가 허튼소리를 하는 걸 알았다.

그의 손이 어렵사리 세실리아의 볼을 감쌌다.

그러는 내내 세실리아의 눈동자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밀리, 나는 레베카 전하께 연락을….”

“네, 어, 얼른요.”

레오폴트가 뛰어가는 기척이 났다. 아멜리는 숨죽여 흐느끼며 곁을 지켰다.

그 상황에서 자꾸만 의식이 아뜩해지려고 해, 루시페우스는 애써 정신을 집중했다.

곧 깨어나실 텐데, 추태를 보이면 안 되지….

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차분히 심호흡하려고 해도 숨소리가 자꾸만 부서졌다.

“경, 저희 일단… 읏.”

아멜리가 루시페우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어깨에 손을 뻗었을 때.

정전기가 튀듯 따가운 거야 상관없었으나, 남자의 체열이 너무도 높았다.

“경, 괘, 괜찮…으세요?”

“저, 전하….”

“저희 일단, 막사로….”

아멜리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그는 세실리아를 제게로 당기더니… 덜덜 떨리는 품에 세실리아를 파묻을 기세로 끌어안았다.

“이, 이렇게 따뜻한데….”

남자가 얼굴을 내려 세실리아의 볼에 제 볼을 느릿하게 맞대었다.

“약속하셨잖아요….”

고개를 가로젓자 세실리아의 보드라운 뺨에 그의 눈물이 묻어났다.

“저를 위해, 위험한 일에 안 뛰어들겠다고 하셨잖아요.”

아, 아닌가. 그건 제가 멋대로 청한 거였나.

그래. 애초에 약속한 건 저였다.

최선을 다해 지키겠다고.

그래놓고서 고작 후작과 대거리하기 위해 곁을 비웠다. 어차피 세실리아의 뜻을 위해 그의 신병을 넘길 건데, 굳이 필요하지 않은 분풀이를 하겠답시고.

아무리 세실리아가 등을 떠밀었다지만, 그녀가 그의 복수를 바란다고 말했다지만.

그 다정함이 저를 배려한대도 제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게 중요한 건 따로 있는데.

그 무가치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세실리아는 착실히 위태로워진 거였다.

아무리 세실리아의 명이라지만, 그가 거기에 순종하는 운명을 타고났다지만….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폐부를 살라 먹을 것 같아, 루시페우스는 간신히 심호흡했다.

“…헉!”

그때, 아멜리가 숨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조금 떨어진 그녀조차 숨 막힐 정도로 남자에게서 풍기는 체열이 높아졌다 싶더니.

“이, 이게….”

지표면이 요동치고 있었다. 최소한의 습기마저 말라붙어 순식간에 갈라진 지표면이 마수의 비늘처럼 오소소 일어났다.

파도치는 듯한 흙 조각의 울렁임은 그 근원이 어디인지 알리듯, 남자에게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아멜리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 기괴한 풍경의 한가운데서 남자는 그저 제 정인의 몸을 끌어안은 채 흐느꼈다.

“제, 제가…. 저는 이제, 어, 어떻게….”

어떻게 살아야….

가닿을 곳 없는 말소리가 그의 입가에서 바스러졌다.

지난해, 동대륙에서 첫 번째 생의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루시페우스는 죽기 위해 살았다.

이전에는 딱히 삶을 바란 적이 없었다. 그저 죽지 않으니 산, 그 정도.

언젠가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소망하면서.

그런 그가 삶을 열망했다.

석 달 전, 달의 신과의 기억을 되찾았기에.

죽음에 처한 제가 반사적으로 바란 것 때문에, 고작 제가 행복하고 싶다는 이유로 이 세계에 불려온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 존재에게 속절없이 매료된 채였다.

어린 시절의 밤을 보듬어준 온기.

제 삶을 밝힌 작은 빛.

그의 심장을 낯선 방식으로 뛰게 만들고, 평생 모르고 살았던 타인의 감촉을 알게 해준 그의 새로운 세계.

저 때문에 이 삶을 짊어진 그녀를 위해, 그는 살기로 했다.

그리고 세실리아가 곁을 허락하자, 그 바람은 더욱 맹목적이 되었다.

“내가 믿기로 했으니까, 그만큼 경도 믿어보지 않을래?”

“경의 기쁨과 슬픔에, 내 기쁨과 슬픔을 걸기로 한 나.”

“경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질 거야.”

그런 다디단 이야기를 끊임없이 속삭이시는데, 거기에 영혼째 사로잡히고 만 것은 우주의 섭리이리라.

거기에 그는 조금도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한번 알아버린 이 찬란한 행복과 그녀가 선사하는 모든 달고 보드랍고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것들을 평생 누릴 수 있길 바랐다.

그녀가 점지할 그의 최후까지.

또는 그녀가 그 모든 축복을 거두어 그의 삶의 의미가 사라질 때까지.

모를 때야 모르고 살았으나, 한번 알아버린 바에야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거였다.

하지만, 다 잃고 말았다.

저를 위해 이 세계에 도래한 행운을, 제가 부른 제 삶의 구원을 제 실수로 잃고 말았다.

지키지 못했다.

“어, 어떡할까요….”

세실리아를 안은 팔이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흐느낌을 타고 대지가 진동했다. 절벽의 가장자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레오폴트의 소대원들이 아멜리와 마검사들을 데리고 철수한 지 한참이었다.

“저, 전하께서, 아, 아, 안 계시면…. 저는….”

루시페우스는 조심스럽게 세실리아를 제 품에서 조금 떼어내,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그의 태생이 비천함을 번번이 되새기게 하는 금빛 반점만이 일렁일 뿐, 영혼의 불꽃 한 점 비치지 않았다.

온기가 사라져 인형처럼 보이게 된 세실리아의 얼굴에 그에게서 흐른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툭, 그가 입 맞추곤 하던 오뚝한 코끝에, 투둑, 주름이 질 때면 그가 꾹꾹 문지르던 미간에, 툭, 그가 제 손안 빼곡히 담아내곤 하던 그 뺨에.

“돌발 행동도 안 하고, 방해 안 되게 할게.”

그리고, 그에게 심장이 간질여지는 감각을 알게 한 그 입술에….

저로 인해 당신의 계획을 수정하신 게 돌발 행동이었던 거지요.

방해는, 제가 당신에게 방해였지요.

당신의 세계에서 평온히 사시던 걸 이 낯선 세계로 끌어왔고. 주체하지 못하는 제 감정에 동조해달라 애원하고.

나를 위해서 온 당신인데.

계신 것 자체로 선물이요 행운이요 구원이었는데.

나는 그에 보답하기는커녕…. 당신이 재능이라고 위로해준 것을 쓸데없이 크게 타고나 놓고서, 결국 당신을 지키지 못해서.

허억, 헉,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루시페우스는 애써 정신을 붙들었다.

이대로 쓰러지면 세실리아를 더는 눈에 담을 수 없으니….

그는 하염없이 세실리아의 낯만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어떤 기적이 피어오르길 바라며.

하지만 그의 불운한 삶에 그런 행운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고, 루시페우스는 생각했다.

‘역시, 내 삶은 이번에도 이곳에서 끝맺는 거야….’

그는 눈을 질끈 감고서, 세실리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또 한참을 흐느꼈다.

지금 당장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영영 이 감촉을 잃어버릴 테니까.

어쩌지, 어쩌지….

그렇게 그림자가 길어졌을 때였다.

“…으응.”

한순간, 그의 품 안에 꿈지럭대는 감각이 났다.

하지만 루시페우스는 그게 그저 제 불안정 때문이라고 치부한 채 흐느끼기만 했다. 눈물이랄 것은 진즉에 다 쏟아내서 메마른 헐떡임에 가까워진 지 오래였다.

“경…?”

한데, 그의 훌쩍임에 낯선 소리가 섞여들었다.

무슨 감각을 뜯어볼 겨를이 없건만….

“겨엉.”

그제야 루시페우스는 멈칫했다.

제가 미쳐서 환청을 듣는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생각 외로 생생해서….

그의 귓가에 푸스스 웃는 소리가 났다.

어?

“경, 일어나 봐.”

루시페우스는 그에 순순히 따랐다. 그 목소리에 그가 불응할 도리는 없었으므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얼빠진 낯으로 소리가 난 곳을 보았을 때.

“난 경을 만나려고 온 사람이었네.”

세실리아가 웃고 있었다.

그 창백했던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 채, 빛이 꺼졌던 녹금안에 생기가 돌아와서는, 벌어졌던 도톰한 입술에 작은 호선을 걸고서.

“사랑해.”

그의 눈시울에서 눈물이 한 줄기 또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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