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나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 (2)
낯선 풍경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내 얼굴인데, 내가 전혀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저렇게 웃었던가?
‘자기가 웃는 모습은 원래 다 낯설게 보이나?’
나는 천천히 전생의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눈매, 코, 입술, 턱선….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실은 기억한 적 없었다.
세실리아로 태어나고서 나는 내가 누리게 된 모든 행운과 호의와 사랑을 세실리아의 겉껍데기 때문이라고 치부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전생에 관한 건 다 꼭꼭 묻어두고 살았다.
세실리아보다 못나서 사랑받지 못한 나의 전생을.
그런데….
‘예쁘네.’
미적인 기준을 두고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냥 예뻤다.
피로에 절어 거뭇한 눈가도, 둥그렇게 말린 어깨도, 의기소침한 듯 잠긴 눈빛도,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불만 있냐는 소릴 듣곤 하던 입매도.
다 나였고, 다 예뻤다.
그런데 이런 걸 다 잊고 살았어….
“그만 울어. 울리려고 데려온 거 아냐.”
“데려왔다고요?”
여긴 저승인가? 죽은 내 혼백을 데려온 건가?
“안 죽었어. 이건 일종의… 애프터서비스? 네 전생 쪽에서 쓰는 말로 말이야.”
“네?”
달의 신은 빙긋 웃으며 내 양손을 잡아끌었다.
“여기는 너희들에게 작은 달이라고 불리는 곳이야.”
그러고 보니 하늘의 달이 너무도 컸다. 한쪽 하늘을 가득 메우리만치 커다랗고 하얀 위성의 표면.
“그럼 저게….”
“응. 너희가 한 달의 기준으로 삼는 큰 달.”
“그래서, 저는 어떻게 된 거예요?”
“너는 텅 비어 있잖아. 신성력도 없고, 마력도 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지….’
없었던 신성력이 생겨난다면, 그래서 신성력의 총량이 바뀌면 세계의 섭리를 거스른 걸 들킨다는… 그런 계산인가?
“똑똑하네.”
뭐야, 아까부터…. 내 생각이 들려?
정말로 그런지, 달의 신은 내 말이 맞는다는 듯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 갑자기 고대 양식의 신전이 생겨나, 우리는 그 앞 계단에 걸터앉게 되었다.
“그런데 네가 너무 많은 기운에 휩쓸렸어. 네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훨씬 초과해서 말이야. 지하의 힘에 오래 노출된 와중에 그 애가 널 보호하겠답시고 우리의 힘을 너무 강하게 터뜨렸지.”
“…마기와 신성력, 말씀이신 거죠.”
“응.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두 힘은 서로 반발하잖니.”
그러면 마지막에 도미닉이 쏜 마법 공격을 루시페우스의 신성력으로 막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걸까?
아니면 신성력이 내 몸에 스며든 마기와 무슨 반작용을 일으킨 걸까?
“다 맞아. 똘똘하네.”
“…….”
“황실의 뛰어난 유전자를 물려받은 세실리아가 아니라 너 말이야.”
달의 신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해오던 생각을 다 안다는 듯이.
전생의 내 얼굴을 하고서, 세실리아 속 알맹이를 칭찬하니 느낌이 이상했다.
어찌나 이상한지, 또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았다.
나는 작게 훌쩍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나요?”
“돌려보내 줄게. 그 반발력 때문에 네 영혼이 퉁겨진 거거든. 네 몸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연결부를 더 튼튼하게 손봐줄 거고.”
“그럼 살 수 있는 건가요?”
“넌 살아 있어.”
하지만, 루시페우스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텐데….
“그러게, 펑펑 울고 있네.”
아,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걱정 마. 네가 돌아가면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을 거란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나요?”
“여기는 내 의식 속이니까. 너희들 말로 물리라는 게 통하지 않지.”
그리 말하며 달의 신이 허공을 휘젓자, 공간은 대번에 전생의 내 자취방으로 바뀌었다. 그러고는 전생의 마지막 날 내가 술 마시던 강변으로, 프리지어궁의 내 방으로, 또 루시페우스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던 동대륙의 초원으로 바뀌었다.
쏴아아- 바람이 한차례, 키 높은 수풀을 훑고 지나갔다.
“이런 것도 가능해.”
딱, 달의 신이 손가락을 울리자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수풀이 얼어붙은 듯 일거에 멈췄다.
“이 짧은 순간에, 어느 세계에서는 300편짜리 소설이 완결되고, 누군가가 서너 번은 다시 읽을 만한 시간이 흐를 수도 있다는 소리야.”
그거, 내가 ‘공제눈’을 읽은 걸 말하는 것 같은데….
“맞아.”
달의 신이 빙긋 웃었다. 우리는 어느새 맨 처음 앉았던 신전 앞에 돌아와 있었다.
“‘공제눈’, 잘 썼지? 나 재능 좀 있는 것 같아.”
“뭐…. 네, 여러 번 읽었으니까요.”
나는 마지못해 그렇게 대꾸했다.
내용이야 아주 엉터리였지만, 재미는 있었으니까. 그해를 풍미한 베스트셀러였을 정도로.
“그래, 이 이야기를 좋아한 사람은 많았어. 그리고 그중에, 그 아이에게 연민이든 안쓰러움이든 호감이든…. 뭔가를 느낀 사람을 찾았지.”
어째서인지 달의 신의 말은, 루시페우스를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것처럼 울렸다.
“역시 똘똘하다니깐.”
“…아, 하지 마세요.”
달의 신이 또 내 머리를 쓰다듬기에, 나는 ‘공제눈’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반항을 했다.
“맞아. 그 아이에게 다른 삶을 선사할 존재가 필요했어.”
“다른 삶….”
그 말을 듣는데, 나를 만나 죽지 않고 살기로 했다던 루시페우스의 말이 떠올랐다.
“…그럼 그도 이걸 아나요?”
“당연하지. 그 애가 행복하고 싶다고 빌어서 내가 너를 데려온걸.”
“네?”
“너도 알다시피 그 애는 지난 삶을 불행하게 마쳤어. 뭐, 행복과 불행은 너희들의 판단이니 난 모르지만, 그 애가 제 삶을 불행하다고 여겼으니 그렇다고 말하는 거야.”
“…그랬죠.”
두 번째 삶마저 스스로 죽어 끝마치려 할 정도로, 그는 제 삶에 절망했었으니까.
“그 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빈 소원이 그거였어. 한 번이라도 행복하고 싶다고.”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욱죄었다.
“그래서 너희 기준의 행복을 줄 사람을 데려온 거야.”
“그게, 저…라는 거고요?”
나는 영 미심쩍다는 낯으로 달의 신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내게 작은 달의 보름날마다 소원을 빌잖아.”
“…네.”
“그때 들어오는 소원을 보면…. 건강하게 해달라. 물질적으로 여유롭게 해달라. 뭐, 그런 것들을 빼면 가장 많은 게 사랑이더라고. 연인 간의 사랑이든, 가족의 사랑이든….”
그 애에게 건강이란 말할 것도 없고, 돈도 부족할 것 없잖니? 달의 신이 장난스레 덧붙였다.
“그래서 제게 바라는 게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군요….”
“게다가 거기에서의 삶을 버리고 이 세계로 넘어올 마음을 먹은 건 정말로 너 하나뿐이었어.”
“…….”
“그리고 이제 그 애는 행복해. 네가 있어서 말이야.”
달의 신의 단언에, 목구멍이 울컥 치받혔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건 삶을 미련 없이 떠난 전생의 나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고, 지금의 삶에 대한 깊은 감동이기도 했다.
수락은 충동적이었지만, 나는 내 사랑이 보답받지 못하는 삶에 지쳐서 새로운 세계를 택했다.
내 사랑이 필요한 이가 있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돌려받았다.
그리 쏟아부었지만 단 한 번도 응답받은 적 없는 사랑을.
그것도 그로부터 먼저, 그리도 과분한 마음으로.
거기에 더해 가족이며 동료들까지….
“…제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도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 내가 이 생을 왜 얻었는지 다 잊어서.
환생할 때 기억의 편린을 내 멋대로 해석해서, ‘공제눈’의 세계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핑계로 어린 루시페우스를 내버려 뒀는데.
내가 어려서부터 꿈에서 루시페우스를 본 건, 내 사명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을 텐데….
자책감이 가슴을 무겁게도 짓눌렀다.
뻔뻔하게 눈물이나 흘릴 순 없어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환생할 때의 기억을 잊은 건 네 영혼이 다른 세계로 넘어와서야. 대신 너희가 작은 접점이라도 갖게끔 무의식을 연결해준 거고.”
“그렇지만, 저는 그걸 조금도 특별하게 여기지 못했는걸요.”
떼를 써서라도, 꿈속에서 슬퍼하던 그 빨간 눈의 아이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공제눈’이 사실은 루시페우스의 첫 생을 기록한 이야기라는 걸 알았을 때, 그래서 이 세계가 단순한 소설이 아님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크게 후회한 것이 바로 그거였다.
그게 내가 사랑하게 된 이의 과거여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생한 불행을 그저 ‘설정’이라 납득하고 넘어갔던 안일함이 후회스러웠다.
이 세상을 그저 소설 속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더라면….
“역시 내가 소설가로서 재능이 뛰어난 탓인가?”
“하?”
“네가 소설로 된 ‘공제눈’을 여러 번 읽긴 했지만, 혹시 네가 잊을까 봐서 네 꿈속에서 여러 번 들려준 건데.”
“맙소사, 어쩐지.”
어쩐지, 잊으면 안 된다는 양 끊임없이 반복되었더라니….
“네가 원래는 이 세계에 없던 인물이니까, 접점을 만들려면 이야기를 알아야 할 거 아냐.”
“아니, 그런데 왜….”
왜 레오폴트 친구로 설정했어요. 루시페우스 소꿉친구, 그런 걸로 해줬어야죠.
‘아, 루시페우스의 어린 시절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나….’
내 생각을 다 읽은 달의 신은 재밌다는 듯이 푸스스 웃었다.
“약속했잖아. 네게 많은 걸 주기로. 너는 전혀 다른 세계에 갑자기 오게 됐고, 이 세계 사람이면 누구나 가진 신성력도 없고. 그러니 황실에서 태어나는 게 최선이었어.”
“그래도 그러면 안 됐죠.”
불똥은 애먼 달의 신에게로 튀었다.
아니, 애먼 데가 아니었다.
“그를 위해 이 세계로 데려올 영혼을 고르려고 ‘공제눈’을 썼다면, 루시페우스 이야기를 제대로 썼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실 ‘공제눈’ 속 루시페우스의 설정이 얼마나 엉터리였던가.
그가 빨간 눈이라는 것도, 갑자기 후작을 위해 일하게 된 이유도, 아멜리에게 끌린 이유도,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관한 음모를 획책한 것도 다 적혀 있지 않았는데.
그걸 몰라서 나는 그를 오래간 알아차리지 못했고, 또 그의 마음을 의심하고….
하지만 그 모든 게 실은 내 잘못된 판단 때문이어서, 나는 그저 고개를 떨궜다.
한데, 이어지는 달의 신의 말이 아리송했다.
“전생의 그 애조차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살았는걸.”
그리 말한 달의 신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거기에 루시페우스가 있었다.
반가움에 눈이 휘둥그레진 순간,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에리나의 모습을 한 나란다.”
아, 그러니까 이건….
“꿈을 꿨거든요. 거기서 달의 신을… 만났습니다.”
세르니타에서 정신을 잃었던 그가 기억해낸 달의 신과의 만남이었다.
‘그때 달의 신이 그에게 두 번째 생을 준 걸 알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저 루시페우스는….’
그러고 보니 그는 내 연인과 사뭇 달랐다.
어딘가 공허한 눈빛, 한 번도 웃음이란 지은 적 없었을 것만 같은 삭막한 얼굴.
달의 신이 내 전생의 얼굴로 웃는 걸 볼 때와 같은 위화감이 스쳤다.
“말수도 없고, 믿는 사람도 없고, 딱히 바라는 것도 없고….”
“…그러네요.”
“네가 뭘 했는지 잘 봐. 네가 없는 삶을 살던 그 아이는 이랬어.”
목구멍에 왈칵 뜨거운 게 치밀었다.
“나는 저 아이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 이야기를 썼어. 한데 스스로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는 바가 없으니 어쩌겠니.”
“…그럼 하다못해, 주인공으로라도 해줬어야죠.”
그래야 내가 좀 더 감정 이입을 했을 거 아냐…. 레오폴트나 아멜리의 사랑을 이어준다느니, 그런 한심한 생각으로 설치지 않고.
그 덕분에 이 세계의 삶을 받아놓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한 거야.
“그 애가 제 삶의 주인인 적이 없으니까.”
무심한 어조로 이어지는 말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