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나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 (1)
[♡내사랑♡] ↗ (13)
고개를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런 글귀가 적힌 액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휴대폰, 오랜만이네.
- Rrrrrrr….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통화 연결음.
꼬박 22년 만에 듣는 전자음을 흥미로운 마음으로 감상하는데… 뚝, 소리가 멎더니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이윽고 내 손이 휴대폰 액정 속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 그러니까 이건….
‘전생의 마지막 기억이네.’
‘나’는 그 자리에 붙박여 선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엄지를 이리저리 움직여 채팅 앱의 이런저런 이름들을 헤집었다.
‘이날 잠수 이별을 당했었지. 그래서 혼자 술을 먹다가, 집에 가기 싫어서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는데….’
마음 편히 갈 곳도, 불러내서 허심탄회한 소리를 지껄일 상대도 없었다.
그래. 내 전생이 그랬지.
액정을 이리저리 조작하는 내 손끝을 들여다보며 나는 울적해졌다.
그러던 중에, 휙휙 넘어가던 앱 사이로 웹소설 플랫폼이 나타났다.
보던 작품의 상세 페이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공작가의 제비꽃은 눈물로 자란다》.
맞아, 강변에서 혼자 술 마시면서 ‘공제눈’ 재주행했지.
저 소설이 내 두 번째 삶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한데 막상 살아보니….
‘루시페우스의 첫 생을 기록한 이야기였어.’
그것도 아주 엉터리로.
루시페우스…. 괜찮을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의식 저편에 두고 온 그를 떠올리자 마음이 조급해질 때였다.
“소설 속에선 그렇게 굴러도 운명의 연인이라도 있지.”
한참 동안 액정을 들여다보던 ‘나’의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부럽다….”
알코올 기운 섞인 한숨과 함께 ‘나’의 고개가 쳐들린 순간.
- 부러워?
응?
갑작스레 들려온 말소리에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 이런 기억이 있었나…?
“뭐예요?”
‘나’는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를 울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 아냐, 제대로 들었어.
“네?”
나도 깜짝 놀랐다. 정말로 아무도 없는데?
- 정말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부러워?
“…뭐야.”
귀신인가? 아니면 전생의 내가 미치기라도 했나? 이런 기억, 정말 없는데…?
- 너한테 새로운 삶을 주고 싶어서 왔어.
“…와, 뭐야, 이거.”
‘나’의 입에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흘러나왔다.
- 지금 삶이 마음에 안 들지?
“어, 딱히….”
- 조금 전까지 부모님 댁에 가려다가 싫은 소리 들을까 봐 그만두고. 친구들 부르려다가 걔들이 네 편 안 들어줄 게 뻔해서 그것도 포기했잖아.
“…뭐예요, 누구예요?”
- 네 소원을 들어주려고 왔다니까. 지금 네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
- 증발해 버리고 싶잖아.
“잘, 잘 모르겠어요….”
‘나’는 한동안 그대로 붙박여 있었다.
- 나도 네 도움이 필요해.
“네?”
- ‘공제눈’은 재밌었어?
“네에?”
- 너 그거 여러 번 읽었잖아.
얼빠진 대꾸만 계속하던 ‘나’는 얼떨떨한 낯으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네, 그렇긴 한데….”
‘공제눈’은 내게 지루한 일상의 백색소음 같은 거였다.
통근 시간에 딱히 할 게 없을 때도 읽었고, 약속 시간에 늦는 친구나 애인을 기다릴 때도 읽었고, 아무도 없는 본가에서 빈둥댈 때도 읽었다.
야근하고 지쳐서 들어왔는데 바로 잠들기 싫은 날에도, 일찍 자기 싫은 일요일 밤에도, 상사에게 깨지고서 화장실에서 울다가 바로 복귀하기 싫을 때도….
처음 연재되는 걸 달릴 땐 출근길의 여흥이었는데, 어쩌다 이리 빠져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열 번까진 안 읽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과장됐나?
그때, 다시금 목소리가 울렸다.
- 역시 레오폴트랑 아멜리가 최애니?
“네, 뭐….”
- 거기 좀 불쌍한 애들도 있잖아. 그, 스칼렛이나, 루시페우스나…. 걔들은 어때?
“…네, 뭐. 다들 나름 사연이 있더라고요.”
- 루시페우스도 그렇다는 거지?
“뭐어, 불쌍한 구석도 있긴 하잖아요. 다른 엑스트라들도 다 그렇고요….”
악역도 단역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공제눈’이어서, 내 삶에서조차 나를 주인공으로 두지 못한 내가 그리도 집착적으로 읽었던 걸까?
그때,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렸다.
- 응, 그래. 네가 딱이겠다.
“네?”
-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있는 곳 말이지, 난 거기서 왔어.
‘나’는 이게 웬 미친 소리냐는 듯 헛웃음 지었다. 눈물은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애초에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와 대화하는 것부터가 미친 것 같았지만….
- 여기에 아주 큰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있어서 말이야.
“빙의…인가요?”
목소리는 쿡쿡 웃었다.
- 그래. 빙의물이라는 게 있었지.
뭐지, 로판 좀 읽어본 자인가?
한데 이어지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 ‘공제눈’, 내가 쓴 거야.
“네에?”
- 자고로 다른 세계에 내 세계 소개하려면 소설이 최고 아니겠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 ‘공제눈’ 작가가 이세계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건가?
아니, 세실리아인 내 세계의 사람이라는…?
- 내 세계에서 살아갈 영혼이 필요해.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쓴 거야.
“‘공제눈’의… 세계에서요?”
- 응. 말했잖아. 여기에 아주 큰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있다고.
목소리의 이야기가 선문답에 도돌이표여서, ‘나’도 나도 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 말이지, 그게 그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야.
“사랑….”
- 그것도 아주 많이. 괜찮겠어?
“내가, 씨×, 그것만은 자신 있어요.”
오, 전생의 나. 입이 좀 걸었는걸?
그러는 사이 ‘나’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들 질린다던걸.”
분풀이하듯 내뱉은 ‘나’는 한참을 울었다. 어흑, 흑, 아주 눈물 콧물 범벅이 될 정도로.
묻어두었던 그 시절의 슬픔이 떠올라서일까, 내 마음도 크게 저며 들었다.
‘아. 그랬지….’
전생의 나는 다른 사람에게 특별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누구에게나 번번이 사랑을 쏟아부었다.
내가 받고 싶은 만큼의 사랑을.
하지만 애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제대로 호응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세실리아인 나는 애정에 인색하게 굴었는데.
보답을 기대할 일 없도록 번번이 선을 그었는데.
스칼렛과의 우정도 거래 관계라고 일축했고, 언니들과 테오도르가 서운해하는 걸 알면서도 맘껏 기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속절없이 빠져버린 그 남자 또한, 그저 내가 아는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라고 치부하여 서로의 마음을 부정했다.
“흑, 흐흑….”
내가 전생과 현생을 반추하는 내내 ‘나’는 구슬피도 흐느꼈다.
목소리가 다시 울린 것은 ‘나’의 훌쩍임이 얼추 잦아들었을 때였다.
- 그것만 약속해 준다면, 너를 내 세계로 초대할게.
“그럼 여기를 떠날 수 있는 건가요?”
- 응.
“그럼 전 죽는 거예요?”
- 원한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걸로 할 수도 있고, 내 세계의 영혼을 대신 데려올 수도 있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 어느 쪽?
“맞바꾸는 쪽요….”
어느새 울음을 그친 ‘나’는 작게 우물거렸다.
그 축 처진 목소리를 나는 알았다.
내 것에 자신이 없어서 겸연쩍어하는 목소리.
스스로도 제대로 아껴주지 못했던 전생의 나.
내 삶은 늘 그저 그런 거고, 불운을 당해도 내가 ‘그래도 되는’ 존재여서라며 마음을 다독이던 전생의 나.
그런 ‘나’는 내 삶을 다른 이가 대신 겪는 것조차 싫었던 거다.
- …그래, 그건 뭐. 여기 신이 알아서 하겠지.
내 옹송그려진 어깨에 깃든 기색을 읽었는지, 목소리는 말끝을 흐렸다.
- 음, 조금 힘든 삶이 될 수도 있어.
스카우트해 가는 거면서, 이제 와서요?
- 태양 녀석한테 들키면 안 돼서 신성력을 줄 수 없거든.
아, 그래서 내가 신성력 하나 없는 몸으로 태어난 건가?
한데, ‘태양 녀석’이라니…. 그게 주신인 태양신을 언급하는 거라면,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었다.
- 대신 다른 걸 듬뿍 줄게. 세계가 변해야 하는 일인데, 너 혼자 다 해야 하거든.
“세계씩이나요…?”
- 운명 하나가 바뀌면 얼마나 많은 게 바뀌는데. 게다가 그 애는 평범한 영혼도 아니고….
“그 애가 누구인데요?”
목소리는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나’의 반응은 괘념치 않고서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한 걸 보면 말이다.
- 부, 미모, 지력, 권력, 명예…. 너희가 좋아하는 걸 다 주려면…. 음, 황가에 자식 하나쯤 더 있어도 상관없겠지?
자식이 하나쯤 더…? 그 말은….
‘아.’
내가 믿어온 대로 ‘공제눈’을 열 번까지 읽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순간, 많은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령, ‘공제눈’에는 세실리아라는 이름의 막내 황녀가 없었다는 것과 같은….
그러는 동안 목소리는 말을 이어갔다.
- 그리고 인연도 많이 줄게.
‘나’는 미심쩍다는 낯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전생의 내겐 인연이라는 게 큰 쓸모가 없었으니까.
- 가족이든, 친구든. 네게 필요한 걸 어떻게든 채워줄 거야. 신성력 좀 없으면 어떠니?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주면 되지.
그 말에, 나는 세실리아인 내게 주어진 사람들을 생각했다.
부모님, 언니들과 오빠, 레오.
스칼렛과 렌틸 자작, 아멜리와 그들의 조력자들, 나의 암조 기사들.
그리고 루시페우스.
내가 그 마음을 몇 번이고 의심하고 시험하고 폄훼했지만, 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마음을 보여준 그들.
‘그러니까 그 모든 게… 세실리아의 것을 빌린 게 아니라, 정말로 내 거였어.’
세실리아의 몸에 들어왔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얻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실은 정말로 나만을 위한, 또 내가 이룬 것들이었다.
우연히 내가 좋은 인생에 편승해서 누리게 된 게 아니라… 저 안쓰럽고 고단한 내게, 모두를 마음 놓고 사랑하고픈 내게 새로이 주어진 삶.
나를 위한, 진짜 내 삶.
-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겠지.
‘나’가 그저 얼떨떨한 낯만 짓고 있을 때, 목소리는 제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었다.
- 그러니까 이건, 그에게도 너에게도.
새하얀 빛이 망막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우울을 배가하던 대도시의 야경이 아득해졌다.
- 그건 구원일 것이다.
그게, 그리된 거였어?
내가 태어날 때 유일하게 기억한 그 한마디가 그런 뜻이었다니.
이 삶이 단순히 내 전생을 보상하는 것도, 레오폴트나 아멜리를 위한 것도 아니라….
나와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을 위한 것.
거기에 생각이 다다르자,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루시페우스, 괜찮을까?
마지막으로 본 그는 불안정해지고 있었는데.
내가 진짜 죽은 건 아니겠지?
죽고 나서야 이 모든 걸 알게 된 거라면 너무 억울한데…!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런데 여긴 어디야?
그제야 사위를 둘러보니, 밤하늘에 커다란 달이 있었다.
달이라….
“그 망할 ‘공제눈’ 작가가 달의 신이었다니…!”
“나 불렀어?”
“꺅!”
갑작스레 울린 말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 누구….”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본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나였다.
세실리아인 나.
“뭐, 뭐야…?”
“아, 이건 좀 이상한가?”
고개를 갸우뚱한 세실리아는 이윽고 다른 모습이 되었다.
어깨를 덮는 검은색 머리칼, 다갈색 눈동자.
그 모습은….
“어….”
“오랜만이지?”
“…….”
그 모습 또한 나였다.
전생의 나.
조금 전까지 내가 마지막 기억을 엿보던 ‘나’.
“울지 말고.”
그 말을 듣자 턱 끝이 축축한 게 느껴졌다. 나는 손등으로 턱을 닦아냈다.
“그러니까, 당신은….”
“응. 네 짐작대로야.”
전생의 내가, 아니 달의 신이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