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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04화 (204/220)

204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18)

내가 루시페우스의 이름을 외친 순간.

“무슨 개수작이지?”

“윽…!”

내 목을 틀어쥔 도미닉의 아귀힘이 억세졌다.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할 텐데. 후작한테 아무것도 못 하고 오면 안 되는데.’

막사를 떠날 때 후작과 함께 있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다 끝나지 않았을까.

숨이 모자라서인지 몽롱해지는 의식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며 나는 놈을 노려보았다.

“그 이름이면 제가 겁먹을 줄 아셨나 본데.”

말과 달리 녀석은 내가 내지른 루시페우스의 이름에 겁먹은 모양이었다. 루시페우스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당한 게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났다.

“…웃어?”

도미닉 놈이 입꼬리를 파들거리며 반대편 손까지 뻗어 내 목을 조르려고 할 때였다.

“주제도 모르고… 컥!”

흰자위를 번득이던 도미닉 놈이 불현듯 얼어붙었다. 그 낯에 번진 건 공포와 고통이었다.

“주제를 모르는 건.”

“경!”

“네놈이지.”

어느새 도미닉의 뒤에 나타난 루시페우스가 놈의 목덜미를 쥐고 있었다.

급작스러운 안도감에 얼굴이 풀어지고 말았다. 도미닉을 자극하기 위해 억지로 짜낸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네놈이 감히…!”

“컥! 혼자…선… 뭣도… 아닌 게….”

루시페우스의 손에 딸려 몸을 일으키면서도 놈은 내게 눈을 부라렸다. 와중에 루시페우스의 손에 닿아 고통스러운지 눈가며 입가가 젖어들었다.

“감히, 감히…!”

한데 루시페우스는 어딘가 고장 난 듯, 도미닉의 목을 틀어쥔 채 한참 부들부들 떨었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어딘가 불안했다. 어깻숨을 몰아쉬는 것이….

‘세르니타 때 같아.’

깜짝 놀란 나는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경, 나 괜찮아! 놀라서, 그래서 갑자기 불렀어. 큰일 없었어, 응?”

반짝 들어 올린 입꼬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루시페우스의 낯이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 목에 자국 남았겠지…. 입술도 터졌으려나. 손도 다쳤고….’

애초에 바닥에 엎어져서 목 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그때처럼 루시페우스가 불안정해지기라도 한다면….

“봐, 나 멀쩡해! 테오 오라버니가 준 반지가 오래돼서 문제가 있긴 했는데…. 응?”

나는 상대적으로 멀쩡한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물론 엎어졌을 때 거기에도 생채기가 나 큰 효과는 없었다.

어떻게든 다독이고 싶은데 어지러워서 일어날 수도 없고…. 표정으로만 괜찮음을 피력할 때였다.

루시페우스의 팔이 크게 움직이더니 도미닉 놈의 몸뚱이가 내팽개쳐졌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응, 그렇다니까?”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다가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한껏 가까워진 그에게선 불안한 열기가 났다.

“제가 빨리 왔어야 했는데….”

괜히 미적거려서…. 남자의 낯이 자책으로 물들었다.

그래도 세르니타 때보다는 상태가 괜찮았다. 아직 시야가 뒤바뀐다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그래. 괜찮았다.

루시페우스가 왔으니까. 여기도,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쪽도 곧 정리될 거였다.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후작은. 잘 처리했어?”

“정말, 정말이지…. 저는 전하께서 어딘가 잘못되시는 줄만 알고….”

…대화가 어긋나는 게, 아주 괜찮은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루시페우스는 내 양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따뜻한 빛이 나더니 손등의 통증이 사라졌다.

평소에 내게 신성력을 쓸 때보다 그 빛이 훨씬 강했다.

“잠시만. 잠시만 계십시오….”

애써 진정하려는 듯 몇 번 심호흡한 루시페우스는 도미닉 놈에게 다시금 다가갔다.

내동댕이쳐진 그대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놈은 루시페우스와 닿았던 것 때문인지 이따금 발작하듯 부들거렸다.

루시페우스가 녀석의 멱살을 쥐어 들어 올리더니….

퍽!

도미닉의 고개가 돌아갔다. 놈의 멱살을 쥔 손도, 다시금 쳐들린 주먹도 부들부들 떨렸다.

“평생 잊지 말라고 했지.”

퍽! 그의 주먹이 다시금 도미닉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거기에 너무도 많은 감정이 깃들어서일까, 그 주먹질은 오히려 처연하게만 보였다.

“네놈이 받은 수모.”

퍽, 그건 마치 주체할 수 없는 자책감에서 비롯된 몸부림 같았다.

“절대 잊지 말라고.”

퍽, 뒤늦게 도미닉의 코에서 피가 주룩 흘렀다.

“주제를 모르는 건 네놈이니까….”

녀석을 내던지듯 내려놓은 루시페우스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그때였다.

“조심해!”

레오폴트의 긴박한 외침이 울렸다.

조심? 그러고 보니 검 부딪는 소리가 언제부터인가 멎어 있었는데….

<잘되면 추가금이랬지!>

어느새 석궁 모양으로 바뀐 마검사의 마도 기계가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탁! 타타탁! 중간쯤에서 번쩍번쩍 불꽃이 튀었다. 루시페우스가 재빨리 결계를 쳐서 마검사가 쏜 것을 막았다는 증거였다.

“괜찮으시죠?”

“응, 나야….”

그 짧은 거리조차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온 루시페우스가 내 어깨를 안았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은 낯을 지으려 했으나….

“경이 다 막았…잖아.”

“그, 초커는 어디….”

내 짧은 헐떡임에, 루시페우스가 황망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머리가 자꾸만 어질거렸다. 막사를 떠난 지 오래인 데다 초커마저 뜯겨, 마기에 무방비해져서인 듯했다.

“흐아앗!”

그러는 사이 레오폴트가 이쪽을 공격하느라 저를 등진 마검사의 등을 크게 내리그었다.

<계약금에 저승길 노잣돈은 없었는데….>

털썩, 쓰러진 마검사의 입가에서 웅얼대는 말소리가 귓가를 쨍하게 울렸다.

<나머지는 알아서….>

…알아서?

나는 황급히 도미닉을 보았다.

놈은 여전히 내팽개쳐진 그대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그의 품에 피스톨 같은 것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피스톨? 이 세계에선 처음 보는데?’

본대륙에만 없는 거라면, 마도 기계…?

“경!”

내가 긴박히 루시페우스의 옷깃을 잡은 순간이었다.

“큭. 크큭….”

기이이잉-. 날카로운 고주파가 뇌를 울리며, 피스톨에 불길한 빛이 어룽거렸다.

자세히 보니 그 몸체에 마력을 주입한 수정석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신성력을 마력으로 바꾸고, 그걸 증폭하는 역할을 할 터였다.

총구가 향한 곳은, 나.

“저 새끼에게 뺏기느니 차라리….”

땅바닥에 짓눌린 얼굴로 뇌까리는 녀석의 말소리가 소름 끼쳤다.

“차라리, 같이 죽자…!”

총구에 몰린 검붉은 기운이 터진 순간, 앞으로 내뻗은 루시페우스의 손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시야가 순백으로 뒤덮였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하리만치 거대한 힘이었다.

터진 입 안이나 쓸리고 긁힌 자잘한 상처들이 아무는지 몸 곳곳이 간질간질했다.

‘내가 마력에 약하니까 신성력을 썼구나.’

눈앞이 새하얘서인지 자꾸만 정신이 아뜩해, 나는 내 어깨를 안은 루시페우스의 팔에 축 늘어졌다. 맞닿은 곳에 땀이 날 정도로 그의 품이 뜨거웠지만….

‘이제 다 끝났으니까.’

내가 안전하고, 루시페우스가 다 처리할 거니까, 괜찮아.

신성력 방어막 너머로 언뜻언뜻 검붉은 기운이 비쳤다. 그걸 온전히 소멸하기 위함인지, 루시페우스의 신성력이 밀도를 높였다.

시야가 울렁거렸다.

뽀얀 유백색이 된 신성력이 마력을 살라 먹는 풍경이… 어째서인지 가물가물했다.

‘긴장했던 게 풀려서 그런가….’

온몸이 오싹거렸다.

그동안 참았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 모양이었다.

“전하, 잠시만요.”

그리고 피스톨에 어렸던 마력의 기운이 다 소멸했을 때.

루시페우스는 마법으로 아멜리를 데려와서는, 그녀의 품에 나를 안겼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도미닉 놈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툭, 소임을 다한 피스톨이 바닥에 떨구어졌다.

“컥, 커흑….”

마법으로 목을 잡고 들어 올렸는지, 곤죽이 된 놈의 얼굴이 목매달린 사람처럼 흔들거렸다.

루시페우스가 그쪽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래. 당신네에게 복수할 생각은 없었어.”

그 발걸음이 분노로 떨렸다.

“…나한테 한 것에 대해선 말이야.”

그의 걸음마다 도미닉 놈이 두둥실 저편으로 멀어졌다.

“내 목표는 고작 그런 게 아니게 된 지 오래니까.”

어느새 도미닉은 절벽 너머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큭, 크큭…. 놈의 피 범벅된 하관에서 웃음소리가 끓는 듯도 했다.

“하지만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분을 건드렸으니.”

와드득, 도미닉 놈의 모가지가 대번에 꺾였다.

“그 대가다.”

그대로 도미닉이 추락했다.

내 어깨를 안은 아멜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끝났어. 정말 다 끝났어….

그리 안도하며, 내가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을 때였다.

“어?”

아멜리가 놀란 소리를 냈다.

“전하?”

내 볼을 감싸고, 눈앞에 손을 흔들고, 신성력을 흘려 넣고…. 아멜리가 이것저것 하는 동안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탈진인가….’

눈동자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루시페우스가 회복해주면 되지 않을까…. 막연히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경!”

아멜리가 다급하게 루시페우스를 불렀다.

“얼른 와보세요. 이, 이상해요.”

절벽의 끄트머리에 멀거니 서 있던 루시페우스가 이편을 돌아보더니, 넘어질 듯 다급하게 뛰어왔다.

왜 그래, 다 끝났는데.

“전하께서….”

어느새 레오폴트도 다가온 기척이 느껴졌다.

“수, 숨을….”

안 쉬세요…. 내 머리 위에서 울리는 아멜리의 말소리는 숫제 흐느낌이었다.

내가? 숨을?

뭐지…?

“전하, 전하!”

시야에 루시페우스의 낯이 가득 찼다. 초점을 맞출 수 없어 확인할 순 없었지만, 그의 낯이 창백해진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 아니, 이럴 수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시야가 암전된 순간, 내게 보인 건 아멜리의 품에 안긴 나의 모습이었다.

‘…이런.’

루시페우스의 시야가 공유된 거였다.

한데 이상했다.

내 낯이 창백하고, 동공이 풀려 있는 게….

‘아냐, 나 살아 있는데?’

이래서는 루시페우스가 오해하잖아.

나 멀쩡한데, 응?

깜빡, 다시금 내 시야가 돌아왔다. 루시페우스의 낯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돼 있었다.

그러지 마, 나 괜찮아.

깜빡, 다시금 루시페우스의 시야가 공유되자, 오해할 수밖에 없으리만치 파리한 내 낯이 보였다.

얼른 신성력이라도 써봐. 기절을 심하게 한 것 아닐까?

깜빡, 다시금 내 시야가 돌아왔을 때.

“…….”

괜찮아, 한마디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잔뜩 젖은 루시페우스의 뺨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다시금 깜빡, 깜빡, 깜빡….

깜빡.

더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완전한 암전.

어?

아닌데.

나 죽은 거야?

아냐, 이러면 안 돼.

나 살아야 하는데.

살아서, 그의 손을 잡고, 후회 없이 사랑할 건데.

마음을 다 쏟기로 다짐했는데.

그래서, 그를 행복하게… 아니, 그와 행복하게 살기로 했는데.

이제부터가 진짜인데.

안 되는데….

그때였다.

새하얀 빛이 쏟아지더니, 예상치 못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밤을 머금은 너른 물결.

쐐액, 쐑, 귓가를 스치는 자동차 소리.

일렬로 늘어선 주홍의 가로등 불빛.

저 멀리 휘황찬란한 빛으로 제 몸을 감싼 마천루들.

‘어, 여긴….’

그러니까, 22년 전 내가 살던 도시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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