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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03화 (203/220)

203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17)

후작은 분노로 낯을 일그러뜨리고서 씩씩댔다.

“감히, 네가 감히…!”

“감히?”

좁아진 미간 아래서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비대칭으로 기울어졌다.

“알비누스의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당신이 가주 행세를 한 게 ‘감히’ 아닙니까.”

“어디서 헛소리를 듣고 와서는…!”

루시페우스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후작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얼마 전까지 제가 무시로 부리던 놈을 적대한 순간, 그 존재가 공포요 살의가 된 지 오래였다.

위압감에 후작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디서긴요.”

“…컥.”

아니, 실제로 숨이 막혔다. 루시페우스에게 순응하는 마나가 주변의 산소를 희박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들었지요.”

“켁, 커헉…!”

어느새 후작은 털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도망치려 애쓰는 그의 가슴팍에 루시페우스의 신발 밑창이 닿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억!”

루시페우스가 한 걸음 내딛듯 발을 내지르자 후작의 볼품없는 몸이 그의 발아래 납작 자빠졌다.

그것이 굴욕이었으나, 후작은 루시페우스를 노려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흰자위에 실핏줄이 두드러졌다.

그의 가슴팍을 밟은 채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불손한 태도로, 루시페우스는 허리를 숙여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헛소리라.”

헛소리일 리가 없잖은가.

그의 첫 번째 생, 며칠 뒤에 돌아올 그믐날.

이곳에서 쥐고 죽은 진실이 바로 그거였는데.

“둘 중 하나지. 에리나가 아버지의 딸이 아니거나. 내게 아버지가 따로 있거나.”

차라리 헛소리였다면 그 삶이 조금이라도 덜 불행했을 텐데….

루시페우스는 천천히, 또 깊이 심호흡했다.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날의 충격과 배신감을 생각하니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이대로 발을 내리찍어 바스러뜨릴 수도, 낙뢰며 불기둥으로 대번에 잿더미로 만들 수도, 산소를 앗거나 무지막지한 기압을 선사하여 구역질 나는 흔적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마지막에 와서 그르칠 수는 없는 법.

그는 허리를 더 깊이 숙여 한쪽 손을 뻗었다. 맥박 뛰는 곳에 세실리아의 입술연지 자국이 남아 있는 쪽의 손이었다.

“…커헉!”

그의 손에 후작의 비쩍 마른 목이 틀어쥐였다.

정말, 정말이지…. 이 목을 비트는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이대로 힘만 조금 주어도, 평생 돈만 믿고 살아온 이 노쇠한 몸뚱이에서 마지막 숨을 앗는 것쯤 어렵지 않을 거였다.

“허억, 헉…!”

“잘못된 것이 있다면.”

루시페우스가 구태여 제 몸 안의 기운을 누르지 않아, 그의 손과 맞닿은 부분을 타고 통증이 일었다.

“당신의 존재겠습니다.”

“끄윽…!”

그 통증에 후작의 낯에 식은땀이 가득 배었다.

후작의 죄과는 지난 생에나 이번 생에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혈통을 눈가림하고.

어린 루시페우스를 천대하고.

자신에게 힘을 준 그를 멸시하고.

끝까지 속이고.

조롱 끝에 그를 절망의 나락에 빠뜨리고.

‘이번 생이 그대로 반복되었다면, 후작은 또 여기서 나를 없애려고 했겠지….’

루시페우스는 자꾸만 후작의 목에 손가락이 감겨들려는 걸 간신히 자제하였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루시페우스의 엄지 끝이 유독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가 악마의 핏줄이어서인지 이곳에선 마법이 더 잘 써지지 뭡니까.”

무감한 말소리와 함께 엄지가 후작의 턱 바로 아래 달라붙었다. 낙인찍히는 듯한 격통에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까딱하면 죽일 수도 있으니 숨도 골라서 쉬시라는 말입니다.”

“은…혜도… 모…르는…!”

“은혜라.”

루시페우스의 콧가에 웃음이 스쳤다.

후작은 루시페우스의 낯에 웃음 비슷한 게 비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늘 소름 끼치는 무표정으로 그의 패악이며 시키는 바를 덤덤히 받아내지 않았던가.

그런 놈이 여유롭게도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을 짓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리된 거지…!’

제가 망한 건 알았지만, 정말로 그랬다. 낭패감에 속이 부글부글했다.

“잘 곳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신 것…. 그 정도가 은혜일까요.”

질식해서일까, 아니면 분노로 달아올라서일까. 보랏빛이 될 정도로 벌게진 후작의 낯 한가운데서 흰자위가 유독 허옜다.

“거래는 파기했지만, 신전에서 맹세한 건 아직 유효하지요.”

그 순간, 루시페우스의 손톱 끝이 후작의 턱 바로 밑으로 파고들었다.

“가주님의 피가 조금 필요합니다. 어머니의 묘소를 찾기만 하면 알비누스의 성을 버리고 평생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신전에서 맹세한 건 피를 받는다는 쪽이었지.’

루시페우스의 손끝을 타고 흐른 피가 나침반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운명이 끊어졌다.

평생 그의 삶을 고달프게 만든 알비누스라는 이름을, 그 번거로운 허울을 저버리게 되었다.

후작에게 알비누스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반의반 쪽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니, 이를 고수할 이유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 이름 아래 허비한 지난 생을 온전히 지우고 싶었다.

저만 아는 쓴웃음을 삼키며 루시페우스는 후작을 냉랭한 낯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것으로 모두 끝입니다.”

“으윽…!”

낯을 잔뜩 일그러뜨린 후작이 주먹으로 바닥을 크게 내리쳤다.

“그래도 널 아들처럼 키웠는데!”

하, 루시페우스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기가 막히면 웃음만 나온다더니….”

“그게, 네게는 이리 쉽게 끊을 인연인 게냐…!”

무슨 개수작인가 싶어, 루시페우스는 후작의 낯을 코끝으로 빤히 살폈다.

그가 후작을 안 세월이 그의 생의 두 배였다. 그가 아는 후작은 이런 소리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 짤막한 침묵이 흘렀을 때.

“──.”

“─.”

“──!”

아무도 없던 곳에서 서대륙 공통어가 들려왔다.

“…아하.”

그의 손목에 달린 게 충격을 가하면 연결된 이들을 호출하는 마도 기계인 모양이었다.

평소였으면 거기에 밴 마력의 흔적을 알아차렸겠으나, 근방에 마기가 넘실대고 있어 그러지 못했다.

‘그래 봤자.’

루시페우스의 콧가에 조소가 스친 순간.

쿵, 쿠쿵, 쿵! 마검사들의 욕지거리와 함께 굉음이 사위를 울렸다.

네 마검사가 허공에 멎어 있었다.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도중, 루시페우스가 친 방어막에 검이 박혀 거기에 매달린 꼴이 된 것이었다.

“저의 힘에 모든 걸 다 거셨으면서 고작 이 정도 장난을 치십니까.”

이럴 위인인 줄이야 알았지만…. 그 풍경을 등진 루시페우스의 낯에 떠오른 건 오로지 희열뿐이었다.

후작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윽고 루시페우스가 그의 목을 쥐었던 손을 치켜들자.

악!

으억!

허공에서 바둥대던 마검사들이 일거에 나동그라졌다.

후작이 무언가를 주문하듯 검은 눈동자를 뒤룩거렸으나, 이어진 건 사방에서 울리는 억눌린 신음성이었다.

어느새 마검사들의 몸에는 프렘린 옛 집사장의 몸에 났던 상흔이 열몇 개씩 나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석궁형 마도 기계가 쥐여 있었다.

루시페우스가 친 새로운 방어막에 그들의 포격이 열몇 배 복제되어 반사된 거였다.

모든 건 한순간이었다. 벌레나 소동물을 다루는 듯한 압도적인 실력 차였다.

루시페우스가 차게 웃었다.

“발악은 다 끝났습니까.”

“미미, 미안하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튀어나온 말은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

“내가, 자, 잘못했다…!”

루시페우스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양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사과 같은 걸 바라진 않았다.

그래도 기왕 사과받았으니 조금은 기분이 풀려야 할까?

하지만 그에게 든 마음은 개운함과는 전혀 달랐다.

괴로움, 슬픔, 참담함….

수십 년간 할퀴인 마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겹겹이 둘렀던 외피가 형편없이 물크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괴롭게도 버텼는데.

별거 아닌 말이 저자에겐 저리도 쉬워서….

들끓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며, 루시페우스는 후작이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도, 도미닉만은…!”

후작은 숫제 싹싹 빌기 시작했다.

“그 녀석만은 놔두거라, 응? 이제 알비누스라고 남은 건 녀석뿐 아니냐. 복수는 나한테만 하고, 응?”

…복수라.

“그 죄를 빌미로 경이 즉결 처분해. 사적 복수로써.”

세실리아가 제게 바란 게 정말로 복수일까?

아니면 제가 복수를 바란다고 생각한 걸까.

‘…나만 아니었다면 이자를 법정에 세우셨겠지. 당신의 명분을 위해.’

제 어린 날의 시간을 엿보지 않으셨더라면.

제 이전 생에서부터 비롯된 후작에 대한 복수심을 모르셨더라면.

…제게 이리도 가까운 자리를 허하지 않으셨다면.

이제 와서 그 모든 가정이 무용하다는 걸 루시페우스는 알았다.

하지만, 세실리아가 그를 위해 무엇을 선택했는지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 다정에 답할 방법은 진즉 정해둔 차였다.

“당신들이 제게 그런 의미나 될 줄 아십니까.”

온 얼굴 근육을 써서 애걸하는 후작에게 루시페우스가 짓씹듯 내뱉었다.

“…제 삶이 그렇게까지 초라하지 않습니다.”

제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빛을 따르며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감히, 네깟 것들이 더는 더럽히게 둘 줄 알아…?

루시페우스의 손이 짤막한 움직임을 재차 이뤘다.

“으윽…!”

후작의 사지가 땅바닥에 틀어박혔다. 반사적으로 어떻게든 몸을 꿈지럭거렸으나….

“…커헉!”

그의 목에 무형의 구속구가 채워지며 그마저도 불가해졌다.

이윽고 루시페우스의 손이 후작의 이마 위에서 멎었다.

“너는 지금부터.”

후작의 눈동자가 제가 떠맡은 순간부터 두려워해온 양아들의 손바닥에 붙박였다.

“네가 알고 있는, 네가 관여한 죽음을 겪는다.”

“으헉…!”

즉석에서 짠 술식이었다. 루시페우스는 굳이 마력을 세심하게 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후작은 늘 다른 이들이 정신계 마법에 백치가 되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고 했으니까.

“으큭, 컥…! 사, 살려….”

악몽에 빠진 후작의 낯이 괴기스럽게 일그러졌다. 누군가의 사경을 헤매는지 목구멍에 마지막 숨이 가랑대었다.

폭발 사고에 즉사한 힐베르크 선대 후작 부부.

독에 죽은 그 큰아들이자 현 힐베르크 후작의 형.

빨간 눈의 마을에서 자식을 가지려다가 죽은 세 명의 부인.

그가 한시라도 빨리 가주가 되려고 때 이른 죽음을 선사한 그의 법적 아비.

그의 혈통 문제를 감추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처리된 알비누스의 방계들.

그의 모략에 자금줄이 묶여 고생하다 죽음을 택한 여러 영세한 가문의 이들….

후작의 눈동자가 잔뜩 오그라든 채 허공을 배회하였다. 그가 보는 환상이 제각각인지 시시각각 그의 반응이 뒤바뀌었다. 어딘가가 절단된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다가 토혈하듯 헛구역질했다.

그 꼬락서니를 한참 내려다보던 루시페우스는 마검사 하나의 시신과 함께 순간 이동 마법을 썼다.

목적지는 총 열 군데.

그와 같은 색의 눈동자를 지닌 자들이 모두 발이 묶여서는, 해쓱한 낯으로 스태프를 쳐들고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루시페우스는 정수리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연민, 그리고 이 일을 시작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들끓었다.

그 모든 괴로움을 눌러 내리며 루시페우스는 마검사의 시체를 그들 앞에 내던졌다.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주민들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며칠간 마검사들에게 당한 폭력에 모두 신경이 쇠약해진 차였다.

“후작은 제압되었고 이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제야 루시페우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가 스르르 움직이는 그 풍경에 루시페우스는 심장부터 목뒤까지 쭈뼛했다.

킬리온의 눈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이 대규모로 엄습했다.

열 번째 지점에서 주민들을 묶어둔 밧줄을 해제한 뒤, 루시페우스는 도미닉의 위치를 찾기 위해 나침반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한데 이상했다. 빛줄기 하나가 향한 곳이….

‘주둔지 쪽?’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갸우뚱한 순간, 세실리아의 손거울이 열리는 감각이 났다.

[루, 켁, 루시페우스…!]

그의 심장이 저 협곡 아래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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