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15)
만났다라…. 나는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울컥함을 애써 참았다.
<그리고 그편에 과마력자가 모두 몰려가 있어요.>
<이런….>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뜩해져 이마를 짚었다.
아냐, 괜찮아. 괜찮을 거였다.
그때와 달리 루시페우스는 마력을 소진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충격받거나 방심할 일도 없다.
강한 그가, 잘못될 일은 없다.
‘그가 죽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오 대 일이라는 건가….>
<아뇨, 넷입니다. 한 놈은 알비누- 씨와 있어요.>
<그래?>
<알비누- 씨가 아까부터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거든요. 그를 지킬 수밖에 없겠어요.>
<…그래. 어쨌든 그들이 쓸 수 있는 전력은 대부분 루시페우스 경에게로 향한 셈이네.>
마검사들 또한 긴장한 낯을 지었다. 루시페우스의 강함을 알면서도, 그 마검사들의 광포한 성정을 걱정하는 듯했다.
‘루시페우스에게 정말 중요한 순간이니, 그동안 나도 내 일을 해야지.’
이 모든 걸 제대로 끝맺으려면 말이다.
나는 상념을 털어내며 롤란드 경에게 말했다.
“이자들이 전황을 살펴봐줬어. 후작 측에서 이편에 신경 쓸 여력은 없을 듯하군. 기사 하나쯤은 괜찮겠지? 각하께 상황을 전달해주길 바라네.”
“예, 전하.”
“소용돌이가 인 쪽에 내 기사들을 먼저 보내둘 테니 성기사단의 조속한 참전을 부탁드린다고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데릭을 비롯한 암조 기사들은 억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대꾸했다.
“대신 케인과 엘런 쪽에게 복귀하라고 할게. 이 마검사들이 그쪽에 있는 자들하고 연락할 수 있거든.”
“…녀석들이 신성력 다 썼다고 기어 오면 어쩌려나 몰라.”
케인과 엘런을 언급하자, 데릭이 간신히 평소처럼 이기죽댔다.
“레오폴트 경. 우리는 저기 언덕 위로 이동하지.”
“예?”
“그쪽에서 더 자세히 살필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루시페우스 경께서 여기 계시라고….”
아멜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루시페우스가 친 결계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듯했다.
‘아마 마기의 침투를 방어하고 저들의 감시를 피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단연코, 돌발 행동이 아니었다. 계산 끝에, 또 깊이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루시페우스 경에게 마지막 정리를 부탁하려면, 그가 일을 마칠 때까지 상황을 파악해둬야 하니 어쩔 수 없어.”
주둔지에서 가장 가까운 절벽에 오르자, 기대한 대로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좌로부터 우까지, 커다란 마수의 발톱에 할퀴인 것처럼 대지가 길게 패인 협곡. 그 안을 메우고 있는 부연 기운이 마치 펄펄 끓는 물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생겨난 소용돌이가 두 개 더.
<하디.>
<예. 연락은 바로 해두었습니다. 그쪽 먼저 처리하고 복귀하라고요.>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케인과 엘런도 당장 오진 못하겠네.”
데릭네가 아직 도착하지 못했는지 맨 처음 발견한 소용돌이가 조금씩 기세를 더하는 가운데, 다른 쪽에서 소용돌이가 추가로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겠지. 저 정도면 마물이 나온대도 몸집 작은 녀석 한두 마리 나오고 말 테니까.”
“전하께서는 웬만한 성기사들보다 더 잘 아시네요?”
레오폴트의 말에 내가 피식 웃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이 한 세기에 한 번꼴로 발생하다 보니, 격랑에 대해 배워도 평생 겪지 못하는 성기사가 대다수였다.
그러니 그에 관한 지식이 일반에 알려지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공제눈’에서 이 사건에 관해 읽었으니 레오보다 잘 아는 게 당연하지.’
뭐, 후작을 제압하든 처리하든, 루시페우스가 그와의 일을 마친 뒤 빨간 눈의 마을 주민들을 풀어주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억지로 여는 술식이 멈출 테니까.
<주민들 쪽은. 아직 별다른 일 없지?>
<예. 감시하는 놈이 주니 술식이 진행되는 속도가 느려져서, 하나 남은 과마력자 놈이 못되게도 구네요.>
<석궁 같은 걸 들고 있는데…. 원거리 공격용 마도 기계인 것 같습니다.>
다른 마검사들이 루시페우스를 대적하러 간 가운데, 도미닉과 남은 자가 빨간 눈의 마을 주민들이 있는 곳을 순회하며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그편에 정신 팔렸다면 우리야 다행인 일이지.>
<그래도 얼른 돌아가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저희의 은신 마법이 그들에게 간파될 수 있으니까요….>
<괜찮아. 루시페우스 경이 내게 방어막을 쳐두었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안심이지만…. 하디가 고개를 끄덕거렸을 때였다.
“으아아아아!”
갑작스러운 함성과 함께 한 무리의 발소리가 절벽 아래를 울렸다.
“뭐지?”
레오폴트가 곧바로 절벽 끄트머리로 가 주둔지 쪽을 살피더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민간인들이네요.”
“민간인?”
“무장을 하기는 했는데, 기사 훈련을 받은 것 같진 않아서요.”
“…그런 자들이 왜 여기에 있어?”
레오폴트의 말소리가 선뜻 이해 가지 않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후작가의 사병인가?”
“후작가의 사병은 정무 회의 마치자마자 아버지께서 구금하셨어.”
“…그럼 뭐지?”
챙, 채챙, 금속이 부딪는 소리가 저 아래서 아스라이 울려왔다.
“한번 살펴보고 와주게.”
“예!”
레오폴트가 자기 휘하의 기사들에게 턱짓하자 그중 셋이 주둔지 쪽으로 향했다. 여차하면 주둔지로 복귀하여 그들을 지원해야 할 상황이었다.
한데 어째선지 레오폴트는 그러고도 한참 걱정스러운 낯으로 주둔지 쪽을 살폈다.
내 손을 주무르며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던 아멜리가 그에게 다가갔다.
“상황이 안 좋나요?”
“아뇨, 어려운 상대는 아닌 듯한데…. 생각보다 전투가 길어지는 게 이상해서요.”
저기 봐요, 레오폴트는 아멜리의 눈에 신성력을 덧씌운 뒤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갑옷도 가지각색이고…. 체구를 봐도 무예를 직업으로 수련한 사람들 같지는 않지요?”
“아니…!”
레오폴트가 가리키는 쪽을 구경하던 아멜리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저 사람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아멜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저희 할아버지께 빚을 졌던 분들이 있어요.”
“할아버지라면, 로즈버리 선대 후작? 그렇다면….”
“네에, 전하께서 채권 매입해주신 그 가문들 말이에요.”
깜짝 놀란 나는 덩달아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레오폴트가 내 눈에도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니, 정말이네…?”
정말로, 마르크 백작이며 프랑 자작이며 아멜리의 황성 탐험을 고달프게 한 자들의 얼굴이 중간중간 보였다. 게다가….
“저 맨 앞의 금발 남자는….”
“…저 자식이.”
레오폴트가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아멜리의 언니와 결혼을 약속하고 로즈버리 남작에게서 사업 자금을 뜯어낸 ‘꽃뱀’ 짓으로도 모자라, 아멜리를 두고 흉계까지 꾸몄던 그 녀석이었다.
“아니, 가만. 랜들, 마르크, 프랑…. 그리고 저기 보면 스털링 백작 영식에 리라 남작도 있어.”
아멜리가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하나같이 로즈버리의 재정 상태를 악화시키기 위해 선대 남작에게 들러붙었던 거머리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알비누스 후작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가문들이야.”
“예?”
“기억 나? 알비누스의 목표가 힐베르크령과 그 근방의 영지들을 흡수해서 원로원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거였다고.”
“아, 그러고 보니 저 가문들의 영지가 모두 힐베르크령 근방이네요…!”
힐베르크의 후계자인 아멜리가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응. 게다가 하나같이 영세해서 알비누스 후작가의 후의를 받아 지내고 있지. 심지어 스털링 백작가는 알비누스 선대 후작 부인의 친정이고.”
“그렇다면, 양동작전을 펼친 걸까요…?”
“양동작전치고는 그 병력이 좀 허술한데…. 가만.”
나는 재빨리 초커를 짚어, 눈에 덧씌운 신성력을 조절해 그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들의 무기에는 저마다 무슨 보석 같은 게 번쩍이고 있었는데….
‘투명한 보석 안에 흐르는 검붉은 기운…. 이렇게 쓰려고 마력을 주입한 수정을 회수해간 거였나.’
그 수정이 마법 효과를 내는지, 평생 검 한번 휘두른 적 없을 것 같은 이들이 성기사를 상대로 곧잘 싸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려가 봐야겠어.”
“왜요, 뭔가 이상한가요?”
“저들이 쓰는 무기가… 평범한 게 아니야.”
“네?”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운 듯 울렸다.
“귀족파에서 투자 명목으로 수정을 사재기했댔잖아. 거기에 마력을 넣어서 일종의 마력석으로 만들었더라고. 마법 효과를 내거나 마력을 증폭할 수 있게끔 말이야. 그걸 돌아올 수 없는 바다로 가져가기에 추적했는데, 운반책이 알비누스에 이미 당해서….”
짝, 짝, 짝.
갑작스레 뒤에서 울린 박수 소리에 우리는 흠칫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역시, 영특하십니다.”
느끼하리만치 말끝을 길게 늘이는 어투….
“당신은…!”
철그럭, 레오폴트가 재빨리 검을 뽑아 상대를 겨눴다.
“…도미닉 알비누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나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어찌 된 일이지? 분명 아까 마검사들이….
<며, 면목이… 컥!>
주변을 살피니 마검사들은 모두 공격당해 널브러져 있었다.
복면을 쓴 사내 하나가 재미있기 그지없다는 낯으로 하디의 머리통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석궁처럼 생긴 마도 기계.
‘아까 마검사들이 봤다던 게 저거구나.’
나는 눈매를 빳빳이 굳히고서 도미닉 놈에게 물었다.
“죽였나?”
“이제 제 앞에서 서대륙 상것들의 안부까지 따지십니까.”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지?”
“제가 데리고 있는 서대륙 상것들이 실력만큼은 저놈들보다 우월한데…. 허접한 은폐 마법으로 친절하게도 냄새를 풍겨주시니 올 수밖에요.”
그리 대꾸하는 도미닉 놈은… 어딘가 돌아버린 것 같았다.
평소 나를 협박해도 원체 담이 작아서인지 떨곤 했는데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 마치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루시페우스에게 당할 때 입은 공포 때문에 뇌가 어떻게 돼버린 걸까…?
‘상대는 도미닉과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마검사. 우리는 전투 인원이 레오폴트뿐인데…. 아멜리는 신성력으로 치유밖에 못하니까. 아까 함께 올라왔던 성기사들은….’
눈동자만 움직여 언덕 아래쪽을 살피자, 레오폴트의 소대원들이 열심히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캉! 캉! 먹먹한 울림과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백번 헛손질해 봐라, 등신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복면의 마검사가 낄낄댔다.
“원하신다면 나가셔도 됩니다. 마력으로 만든 결계라 신성력을 튕겨내니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캉! 캉! 바깥의 기사들이 어떻게든 결계를 부수기 위해 얼굴이 시뻘게져라 검을 휘둘렀지만, 신성력으로는 아무리 해도 소용없단 소리였다.
그럼, 여기서 탈출하려면….
“원하는 게 뭐지?”
나는 별 의도가 없는 것처럼 손을 모아 쥐며 도미닉 놈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요. 이제 와서 부마가 되기도 글렀겠다. 보아하니 저 계획도 실패겠다. 제가 뭘 원해야 할까요?”
“경의 아비가 곧 죽게 생겼던데.”
“뭐, 반역자의 자식 처지에 효심이 중요하기나 할까요?”
…알비누스의 부자 관계가 생각만큼 친밀하지 않았나?
나는 검지에 낀 텔레포트 반지를 슬며시 쥐며 도미닉의 주의를 끌듯 말을 이었다.
“아무리 경이 불효막심하대도….”
나만 여기서 빠져나가면, 레오폴트가 아멜리를 데리고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의동생이 죽이게 놔두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어?”
‘의동생’이라는 말에 도미닉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제가 바라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어디 한번 울어 보시겠습니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