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14)
“아, 그래.”
레오폴트는 능글맞은 미소를 씨익 지어 보였다.
“안 그래도, 나도 다녀올 데가 있던 참이네.”
그리 말하며 레오폴트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는 듯, 루시페우스는 내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손수건으로 내 이마며 목덜미를 닦아내는 그의 낯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도 까딱 마시고, 마검사들을 부리십시오.”
“그들도 여기가 그저 낯설 텐데.”
“말동무라도 삼으시든가요.”
농담인 듯 하는 말이었지만 그 낯은 한없이 심각했다.
“그들이 마도 기계로 확인하는 게 생기면 경에게 전할게.”
“손거울, 가져오셨군요?”
“그러엄. 경 말 잘 듣지?”
나는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그의 눈앞에서 장난스레 흔들어 보였다.
고작 이런 거 하나로 말 잘 듣는다고 생색내는 게 내가 생각해도 양심 없었지만.
앓듯이 작게 웃음 지은 루시페우스는 몸을 반쯤 일으켜, 양손으로 내 양어깨를 쥐었다.
‘어?’
내내 나를 괴롭히던 어지러움이 마치 증발된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식은땀도 함께 날아간 것 같았고….
“마기가 적당히 순환되다가 빠져나도록 길을 냈습니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이고, 마기가 다시 누적되면 길이 막혀 다시 고일 테니… 부디 막사 안에만 계세요.”
그리고…. 내 목뒤를 감싼 그의 손이 초커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방어 마법을 걸었습니다. 전하께서 마력에 취약하시니 몸에 직접 걸 수는 없어서 말이죠….”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루시페우스는 이 모든 게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낯으로 초커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마법으로 전하를 탐지하지 못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마법 공격을 막는 겁니다.”
“그쪽 마검사들이 굳이 여기까지 올까…?”
“술식은 주민들이 가동하고 있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아마 그들도 마도 기계로 우리가 온 걸 보고서 술식을 진행한 듯하거든요.”
“걱정 마. 레오폴트 밑의 성기사도 몇 배속됐을 테고, 내 기사들도 있으니까.”
“…그의 무력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루시페우스의 말소리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는 지난 생에 레오폴트와 오래간 적대했으며, 그때보다 더욱 강해진 이번 생의 레오폴트를 아니 그 말은 참이었다.
“그저, 전하를 따로 계시게 두는 게 괴로워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생긋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과오라 생각하는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자책의 늪에서 나올 수 있도록.
“빨리 다녀와. 죽이든 말든, 경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네.”
“그리고, 돌아와야 해.”
걱정은, 그의 몫만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요.”
그제야 남자의 입매에 아주 미세한 호선이 깃들었다. 식은땀을 닦아내듯, 이마에서 관자놀이를 따라 그의 엄지가 꾹꾹 훑어 내려갔다.
그가 내내 분노든 불안감이든 크나큰 감정의 동요를 버티고 있어서일까, 그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화인(火印)에 찍히듯 홧홧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의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이마에 내려앉았을 때.
어, 어흠! 헛기침 소리가 나 고개를 빼어 보니….
“영애?”
“아이, 참.”
언제 온 건지, 아멜리가 레오폴트를 타박하듯 그의 위팔을 콩콩 때리고 있었다.
“눈치가 없어요, 그렇죠?”
“으응,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나는 아멜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멜리가 민망할세라 우리를 민망하게 만든 레오폴트는 당장에라도 종소리 타령을 주워섬길 기세였다.
“그런데 영애가 여기엔 어떻게 와 있는 거야?”
“교단에서 치료 사제들을 파견하는 데 보조 치료사로 지원했어요.”
“아아, 하긴. 영애의 세례 결과가 대단하다고 사교계가 들썩였었지.”
나는 빤히 알고 있던 내용을 금시초문인 척했다. 그게 능청임을 아는 루시페우스가 작게 웃었다.
알비누스 부자의 행동이 예측을 벗어나는 가운데 또 어떤 것들은 착실히 루시페우스의 지난 생과 똑같이 흘러갔다.
‘공제눈’의 클라이맥스였던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전장에 레오폴트를 따라왔던 아멜리가 이번에도 따라온 것처럼.
그때와 달리 레오폴트는 신성력을 탁월히 제어했고, 무엇보다 나를 경호하느라 주둔지에만 머무를 테니 아멜리가 죽을 위기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루시페우스 경, 전하는 제가 책임지고 보필할 테니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
아멜리가 특유의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아멜리도 정무 회의에 참석했으니 내가 신성력이 모자란 걸 알 거였다. 그리고 어쩌면, 루시페우스와의 혈연에 관해 얼추 들은 바가 있는 것도 같았고….
레오폴트와 아멜리, 두 사람의 호의 어린 낯을 묵묵히 지켜보던 루시페우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공작님.”
“그래.”
“제가 당신께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거기까지 말한 루시페우스는 얼마간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라…. 그는 분명 레오폴트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돌이키고 있을 거였다.
한 여자를 놓고, 다른 정파 아래서 반목하던 지난 생의 기억까지….
“정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소공작님의 신의와 우정과 실력을 믿습니다.”
루시페우스의 목소리가 어딘가 억눌린 듯 울렸다.
“어어, 그래.”
사정을 모르는 레오폴트는 그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맡겨만 주게.”
아마 그에게는 루시페우스의 진지한 기색이 양아버지의 악행에 대한 자괴감이나, 나에 대한 걱정 정도로만 보이리라.
“그리고, 레이디께도. 죄송했습니다.”
“경께서 도와주신 것이 더 많은걸요.”
아멜리는 정말로 괘념치 않는다는 듯 손사랫짓했다.
루시페우스의 콧가에 깊은 한숨이 떨려 나왔다.
그가 말하는 미안함이 단순히 로즈버리를 파산시키기 위한 음모에 대한 것만은 아닐 테니까.
이윽고 루시페우스는 막사 바깥을 눈짓했다. 마검사들과 내 기사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데릭을 위시한 1소대와 2소대의 젊은 기사들은 오늘 새벽 황성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은 뒤 성기사단과 함께 온 차였다.
“이자들은 서대륙의 마검사들입니다. 믿을 만한 자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믿을 만한 자,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말소리가 조금 어색하게 울렸다.
그가 살면서 제 편이라며 신뢰한 이는 거의 없었을 테니….
“그럼, 전하.”
“응. 뭐든 다 경 뜻대로 해.”
“정말 제 뜻대로 하자면 전하를 이곳에 모시고 오지도 않았습니다.”
루시페우스가 눈매를 찡그리며 엷게 웃었다.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켜 그의 어깨를 안았다. 거의 쓰러지듯 기대는 것에 가까워, 루시페우스의 품이 딱딱히도 굳었다.
모두 다 보는 앞에서의 포옹에 사람들 눈동자 굴리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다녀와. 이 일만 끝나면, 정말 모든 게 다 마무리되는 거니까.”
다른 이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그 말이 그에게 힘이 되는 것만이 중요했으니까.
불길한 조짐이 나타난 건 루시페우스가 떠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소파에 반쯤 누워서 마검사들이 마도 기계와 감응하며 주절거리는 얘기를 들었다.
<빨간 눈의 사람들, 되게 안쓰럽네요. 이곳의 마력을 타고나서인지 마력을 쓰는 건 손쉬운 것 같지만, 취급이 너무 비인간적이에요.>
<그쪽도 그래? 여기는 무슨 꽃다발처럼 발들을 다 묶어놨어.>
<밧줄이나 좀 느슨하게 해주지. 하여간, 과마력자들은 다른 인간은 다 벌레인 줄 알지….>
과마력자. 서대륙에서 마력을 상대적으로 많이 타고난 자들을 칭하는 말인 듯했다.
어려서부터 공부로 나와 경쟁했던 레오폴트 역시 마검사들의 말을 알아들을 거였으나, 구태여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묻지는 않았다.
‘…엘런 말대로 레오가 정말 눈치가 좀 있었나? 전략실 일이라고 생각해서 안 물어보는 것 같은데….’
어쩌면 아멜리가 소외될까 봐서인지도 모르겠지만.
한편 아멜리는 세르니타에서 내 임시 시녀로 활약했던 경험을 살려, 야무지게도 내 손이며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낯으로 바깥을 살피던 내 눈에, 저 멀리 협곡의 가장자리에서 피어오르는 소용돌이가 눈에 띈 거였다.
‘어, 저건…?’
그전까지 협곡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 기껏해야 아지랑이 정도였다면, 그건 모래 폭풍으로 보이리만치 확연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신호였다. 협곡의 바닥이 뚫리며 생겨난 공기의 흐름에 그 아래 마계의 공기가 섞여들었다는, 마계와의 입구가 열리고 말았다는 신호.」
그러니까, 기사들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균열을 정화하려 노력했지만, 놓친 부분이 있는 거였다.
‘…그럴 수 있어. 아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냐.’
돌아올 수 없는 바다는 남에서 북까지 몇 시간은 걸어야 할 만큼 넓은 공간이었으니까. 술식이 시작된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으니 미처 살피지 못한 곳에서 균열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혹시 협곡에 내려가 있는 동료들과 연락할 방도가 있어?>
<아, 예. 통신용 마도 기계가 있습니다. 마기의 간섭 작용 때문에 시차는 있겠지만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상황이 다급하게 느껴졌는지 레오폴트가 물었다.
“이동해야겠어.”
“네?”
“어디로요?”
밑도 끝도 없는 내 말에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놀랐다.
“우선 롤란드 경을 불러줘.”
레오폴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낯이었으나, 우선 알겠다며 막사를 나섰다.
‘그래, 쉬기는 무슨.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루시페우스도, 로젤리아도 저마다의 전장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으니까.
나 또한, 나의 싸움을 해야 했다.
“동남쪽 균열 한 군데가 붕괴돼서, 조만간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릴 것 같네.”
“네?”
내가 다짜고짜 내뱉은 말에 50대의 노장 롤란드 경은 놀란 티도 못 냈다.
“저기, 소용돌이.”
“아니…!”
롤란드 경은 20년 전의 격랑 때 현역이었다. 당시에도 보급부대인 3대대에서 근무했던지라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격랑의 경험자였다.
그러니 소용돌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잔류한 인원이 총 얼마지?”
“1대대에서는 레오폴트 경이 이끄는 3소대의 절반이, 그리고 3대대의 2, 4, 5소대가 남아 있습니다.”
“2소대가 경비를 맡겠고, 4, 5소대는 비전투 인원이군….”
“전하, 저는 전하의 호위를 명 받았습니다.”
잠자코 있던 레오폴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와 제 휘하의 기사들은 움직일 수 없다는 시위였다.
“하지만 누군가는 가야 해. 협곡에 가 있는 이들이 저걸 못 봤다면 알려야 하고, 여차하면 직접 정화해야 하니까.”
“전하께선 성기사단에 속하지 않으셔서 자율권을 받으셨겠습니다만, 저는 성기사단의 일원으로서 단장 각하의 명만 수행합니다.”
레오폴트가 그치고 드물게도 완고하게 굴었다.
“…데릭 경.”
“전하!”
“별수 없잖아. 경비 인원을 유출할 순 없고, 레오폴트 경은 성기사단장님의 지시만 따른다 하고.”
“하지만 말입니다…!”
데릭을 비롯한 기사들이 크게 반발했다.
성기사단을 믿지 못해서는 아닐 거였다. 십여 년간 저들이 주군으로 섬긴 나를 타인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 기껍지 않아서였다.
“경들. 지금은 준격랑 시야. 전시(戰時)라고.”
불복할 셈이냐는 내 에두른 단언에 데릭을 비롯한 기사들이 불만스러운 낯을 했다.
나는 그걸 못 본 체하며 마검사의 우두머리에게 물었다.
<하디.>
<예.>
<루시페우스 경은?>
<후작과 만나셨습니다.>
雪花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