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99화 (199/220)

199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13)

“정말로, 저분과 대적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알렉스의 탄식과도 같은 말소리에 나도 얼떨떨한 낯으로 대꾸했다.

<아무리 이곳의 마나가 순종한대도….>

<원래 가지신 마력이 강대해서 그 효능이 배가 된 거겠지?>

<따라오길 잘했어….>

나와 함께 움직인 마검사들 또한 루시페우스의 실력에 예의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찬탄했다.

대부분의 마검사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관찰하기 위해 암조 기사들을 따라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마도 기계를 조종하는 이들은 계속 집중해야 하니 나와 함께 안전한 곳에 있기로 했다.

마법진을 타고 순식간에 수 시간 거리를 단축한 성기사들의 경우에는 신기해하는 낯을 감추지 못했다. 신전 이동 포털은 수백 년간 써온 거지만 마법진은 루시페우스가 방금 즉석에서 만든 거니까.

그리고 대열의 중후반부에, 장성급의 기사들과 함께 로젤리아가 나타났을 때.

“전하, 그러면 저는 녀석들과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바로 성기사단에서 출정할 테니, 조금만 더 수고해줘.”

알렉스가 고개를 꾸벅여 보이고는 제 소대원들과 로니를 데리고 주둔지를 떠났다. 열밖에 안 되는 동료들이 마계와의 경계에서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급한 모양이었다.

나는 로젤리아에게 다가가 성기사단의 인사를 해 보였다.

“각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내가 할 말이지. 너는 괜찮으냐.”

말에서 훌쩍 내리며 묻는 로젤리아의 딱딱한 말소리에 걱정이 배어났다. 마법진을 통과한 순간 짙어진 마기 때문인지 로젤리아의 콧잔등에 주름이 졌다.

“덕분에요. 저야 레베카 언니의 초커도 있고.”

“…그래도 안색이 창백한데. 그래서 그자가 그리도 안달복달했나.”

“안달복달…요?”

…꽈르르르릉…!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지반의 울음이 다시금 사위를 엄습했다. 로젤리아의 낯이 삭막하게 굳었다.

진동이 잦아든 뒤, 우리는 먼저 도착한 성기사단원들이 주둔지를 조성하고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그들이 벌써 그 사특한 술수를 부린 바람에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반응하고 있다는 거지.”

“네. 자신들의 마력이 부족한 대신 서두르는 건지…. 루시페우스 경의 진단으로는 반응 속도가 계산보다 늦다니, 성기사단의 원래 일정에 맞춰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완전히 열기 위해서인 듯해요.”

“성기사단이 당도하는 때를 노린 거라면…. 지금 시작해서, 열흘도 더 남은 그믐에 맞추겠다고?”

“…뭐, 우리야 진행 속도 차이를 모르니까요. 어쩌면 성기사단이 출정한 걸 알았을 수도 있고요.”

“하긴, 흉악범들의 속을 짐작하여 무엇하겠나.”

로젤리아의 미간이 가차 없이 찌푸려졌다.

어제 출정 계획을 급히 앞당길 때까지만 해도 그저 내 말에 도박을 걸어도 손해 볼 건 없다는 정도의 판단이었을 텐데, 정말로 일이 벌어졌으니 분노할 법도 했다.

“그러니, 각하. 말씀드린 즉결 처분권은….”

“…그래. 저 영식의 능력이 굉장히 강력하더군.”

로젤리아가 루시페우스를 흘끗하며 대꾸했다. 그는 대오의 후미에서 막사를 치기 위한 자재나 말의 여물 등의 주둔용 물자를 마법으로 옮기고 있었다.

“네 기사들이 바다에 내려가 있다고.”

“네. 저들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자극했으니 균열이 무너지는 조짐이 보일 거라, 최대한 방비하고 있으려고요.”

“네 기사들은 바다가 처음일 텐데.”

“성기사단이 올 때까지 버티는 정도야 할 수 있지요.”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지만, 내 기사들이 별 탈 없이 잘해내고 있을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협곡의 바닥이 무너지면 마계와의 통로가 뚫려버리는 거니까. 뭐라도 해야지….’

게다가 그곳은 지난 생에 루시페우스가 추락하여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했고….

그런 생각을 하느라 내 낯이 가라앉아서였을까, 나를 바라보던 로젤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렌틸 자작이 네게 그런 것까지 가르쳤을 것 같지는 않고.”

“짐작이죠. 언니들 나누시는 말씀 주워들은 걸로요.”

내가 배시시 웃으며 그리 대꾸했지만,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로젤리아도 알 거였다. 내 수하들의 안전이 달린 작전을 짐작만으로 진행하는 건 말이 안 되었으니까.

쿠르르르르…!

“…앗.”

“괜찮니?”

“운동 좀 할걸, 별수 없네요.”

로젤리아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헤쭉 웃어 보였다.

이건 바닥이 흔들려서다. 내가 민첩성과 평형감각이 모자라서지, 어지러워서가 아니다…. 그리 되뇌며, 남몰래 식은땀을 찍어냈다.

“바다에 내려간 네 기사의 수효는?”

“현재 열이고, 지금 막 열둘이 더 출발했습니다.”

꽈르르르릉…!

다시금 지반이 깊은 울음을 냈다. 성기사단이 온 걸 안 것처럼 굉음과 진동이 더 심해졌고, 그 주기도 짧아지고 있었다.

로젤리아의 부관 중 하나가 재빨리 속삭였다.

“각하, 문헌에 따르면 이 정도의 주기라면 슬슬….”

쯧, 로젤리아가 작게 혀를 찼다.

한 세기에 한 번 일어나는 격랑인 만큼, 마지막 격랑이 20년 전에 일어났던 만큼, 로젤리아는 제가 이를 대처하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해리슨.”

“예.”

로젤리아의 턱짓에, 부관이 루시페우스를 이편으로 불러왔다.

“앉게.”

로젤리아가 다짜고짜 내뱉은 말에 나는 놀라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한데 루시페우스는 짐작되는 바가 있는지 순순히 로젤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뭐야, 나만 몰라? 내가 당황하여 주변의 분위기를 살필 때였다.

스릉, 검집에서 뽑힌 로젤리아의 검이 순백의 은빛을 내며 루시페우스의 머리 위에 올랐다.

어느새 성기사단 모두가 숨죽인 채 이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경.”

“예.”

“그대는 태양의 검을 받든 자는 아니나 두 신의 뜻 아래 그대의 칼끝을 대륙의 적들에게 겨눌 것을 허한다.”

“태양의 은총을 받드나이다.”

그리고 툭, 툭, 로젤리아의 검이 루시페우스의 양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니까, 이건….’

성기사단에게 통용되는 권한을 주기 위해 약식으로나마 임시 서임식을 치르는 거였다.

“지금부터 황성에 돌아갈 때까지,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경에게 별 세 개에 준하는 권한을 선사한다.”

“태양에 광영을!”

이편을 지켜보던 성기사들의 구호 소리와 함께 로젤리아가 검을 도로 검집에 넣었다.

‘별 세 개면, 중대장급….’

아무리 임시라지만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런 만큼, 지금부터 그가 벌일 단독 행동을 모두 용인한다는 로젤리아의 의지가 성기사단에 전해졌을 거였다.

루시페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이편에 주목했던 이들이 다시금 하던 일들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사적 복수, 즉결 처분.”

로젤리아는 부관이 갖다준 건틀렛을 끼며 무심한 듯한 말소리를 이었다.

“그대가 다 알아서 하라. 흉수의 음모를 고발하고 그대의 능력으로 성기사단의 진군 속도를 높여준 데 대한 보답이다.”

“감사합니다.”

“성기사단의 창단 목표는 마계의 어둠을 멸하는 것에 있지, 그걸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는 인간을 벌하는 건 군법상 정해진 바가 없어서.”

내가 로젤리아와 담판을 지으면서 귀띔해둔 바를 확실히 못 박아주는 거였다.

“출정하면서 폐하께도 말씀드렸다. 그가 연루된 범죄가 이미 수많은데 대륙의 안보를 위협하는 음모마저 획책하다니 진정으로 간악하다시며, 현장에서 처단하는 것도 용납하겠다고 하셨다. 재판정에 올린다면 죽음이 아쉬울 만큼의 벌을 강구하겠다고 하셨고. 그러니.”

부관들의 도움을 받아 보호대에 이어 투구까지 착용한 로젤리아가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별 세 개의 권한을 가진 그대의 재량에 맡기겠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루시페우스의 낯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로젤리아가 열어둔 두 가지 선택지를 고민하는 듯했다.

“배려라니?”

한데, 거기서 대화를 끝낼 줄 알았던 로젤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우리 형제들 중 그대를 가장 늦게 알았으니, 혼인 선물이라도 제일 먼저 해주려는 것인데.”

“네, 네?”

로젤리아가 나를 보며 재빨리 한쪽 눈을 깜빡였다. 농담 재미없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내 둘째 언니는 윙크마저 참 절도 있게 했다.

“그리고, 레오폴트 경.”

“네, 각하.”

“레오?”

언제 와 있었는지, 로젤리아의 부름에 레오폴트가 즉각 튀어나왔다.

“아까 루시페우스 경과 이야기한 대로 그대가 세실의 호위를 맡는다.”

“예.”

“네?”

레오가 내 호위를 맡는다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나는 눈동자만 굴렸다.

“그럼, 너는 내 막사를 쓰고 있도록 해라. 주둔지의 지휘권은 3대대장 롤란드 경에게 있지만 네게는 자율권을 허한다.”

“네, 각하.”

로젤리아는 내 어깨를 느릿하게 쓰다듬은 뒤, 주둔지의 중앙부로 나아갔다. 저마다 정비를 마친 기사들이 모두 그 앞에 오와 열을 맞추어 섰다.

거의 오백에 가까운 인원….

‘원래 계획대로면 각 대대당 한 소대씩, 예순 명 정도만 차출될 거였지만 이번에는 성기사단이 거의 전원 참전했으니….’

그래. 후작 쪽의 돌발 행동이야 단지 놀랄 거리일 뿐, 그들의 예측보다 많은 전력이 있으니 상황은 어쨌건 훨씬 나았다.

“전하, 그럼 가실까요?”

“그래.”

레오폴트가 앞장서자 루시페우스가 재빨리 나를 에스코트했다. 실상 나를 부축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피로감에, 짙어진 마기에, 점차 심해지는 지표면의 진동까지.

쿠르르르르… 카가가가각…. 땅 밑을 울리는 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혔다. 귀가 먹먹해지니 어지러움이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이쪽입니다.”

레오폴트가 안내한 곳은 주둔지 안쪽에 설치된 가장 큰 막사였다. 한쪽 면이 트여 있어서, 저 멀리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협곡이 내다보였다.

미리 언질을 받아둔 하급 기사들이 냉큼 길을 터주었다.

“전하께서 어려서부터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가는 게 꿈이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여기서 뵈니 신기하네요.”

“그러게.”

막사 한가운데에 곰의 털가죽으로 덮인 소파가 있어, 나는 거의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얼마 만에 제대로 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나와의 추억은 애칭 부르지 말라면서 다 버린 줄 알았는데, 그걸 아직 기억해?”

“아니, 전하, 그, 제가 무슨….”

레오폴트가 낯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간만에 놀리는 재미가 있어서 나는 쿡쿡 웃었다.

“말했지? 내 언니가 성기사단장이니 어떻게든 될 거라고.”

“그럼요, 전하께선 뭐든 다 아시니까요.”

“아, 그게 우리 처음 만난 날의 일이네. 일곱 살 아우렌바흐 소공자가 흘린 침이 컵 한 잔은 다 채울 텐데.”

“아, 전하!”

내가 레오폴트 어린이의 다정한 마음에 고마움을 느껴서, 그 애의 행복한 사랑을 위해 헌신하기로 하고….

그렇게 15년.

이제는 그 시절에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모른 척하던 남자의 손을 잡고, 더 크고 더 오랜 나만의,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갈 시간….

한데 어째서인지 이편을 바라보는 루시페우스는 떨떠름한 낯을 짓고 있었다.

“왜?”

“…아닙니다.”

불만스러운 듯 낯을 굳힌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막사를 둘러싸고서 결계를 다 친 뒤의 일이었다.

“저, 소공작님.”

“응?”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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