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12)
“어째서? 분명 성기사단이 도착하려면….”
“그러게 말입니다. 이 계획은 애초에 그들을 겨냥한 건데….”
루시페우스의 낯에는 분노와 당혹감이 범벅되어 있었다. 후작과 세운 계획에 제가 모르는 게 있는지 가늠하듯 그의 눈동자가 황망하게 배회하였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이는 루시페우스의 두 생에 걸쳐 똑같이 꾸려진 거니까.
“이게 그 전조입니까?”
엘런이 평소의 태연함을 유지하지 못한 채 다급히 물어왔다.
“술식을 이미 시작한 거고요? 성기사단이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잖습니까.”
“혹시, 저희를 목표물로 삼은 건….”
케인이 아연한 낯으로 말을 마치지 못했다.
마검사들 또한 상황을 가늠하려 애쓰는지 심각한 낯을 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 누구도 말 한마디 빚어내지 못하고 있을 때.
쿠르르르릉…!
우리의 안일함을 힐난하듯, 지금까지 중에 가장 큰 굉음과 함께 지반이 크게 흔들렸다.
내 어깨를 안은 루시페우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자들이.”
분노를 삭이는지, 간신히 말소리를 빚어내는 그의 숨소리가 바스러졌다.
핸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외국인 마법사가 명령하듯 쥐인 그 스태프의 끄트머리에는 보석 같은 게 달려 있었는데, 그 내부에는 검붉고 검푸른 기운이 일렁이고 있어서 굉장히 불길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핸슨이 놀라거나 두려움에 사무칠 때면 그의 감정에 동조하듯 보석 안의 기운이 요동치기도 했다.
‘이것도 무슨 마법을 쓰게 하는 걸 텐데….’
핸슨의 붉은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저 멀리 바위에 걸터앉은 남자를 향했다. 그는 손에 쥔 무언가를 들여다보느라 이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귀공자.
며칠 전 구릿빛 피부의 마법사들을 데리고 마을에 들이닥친 그는 둘째 큰아버지의 아들이 틀림없었다. 촌장님이 마을을 후원해주는 은인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핸슨의 아버지는 핸슨에게 큰아버지가 둘 있다고 했으나 둘 중 누구도 본 적 없었다.
한 분은 수십 년 전에 귀의하고 신관이 되어서, 다른 한 분은 아버지와 배다른 형제인 데다 귀족이라서.
둘째 큰아버지는 핸슨이 태어나기 전에는 몇 번 휴가를 왔었다지만 그 이후론 식량이나 보낼 뿐, 마을에 걸음 한번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것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저 귀공자의 패악질을 본 순간 핸슨은 아버지의 말이 틀렸음을 알았다.
그는 마을에 자신의 혈육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듯했으니까.
그러잖았다면 난폭한 외국인들이 저희를 함부로 다루게끔 놔두지 않았으리라.
그것도, 이런 식으로는….
핸슨의 음울한 눈빛이 제 발치를 향했다.
서른, 마흔씩 나뉘어 이동한 그들은 하나의 밧줄로 다리가 묶였다.
그것도 다들 붙어선 채 그리된 거라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어서, 한 사람이 삐끗했다가는 다 함께 넘어질 판국이었다.
와중에 저마다 스태프를 오랫동안 쳐들고 있으니 탈력감에 휘청휘청했다.
상황에 대한 공포심은 비단 핸슨만의 것이 아니었다. 흑, 흐흑, 어디선가 억눌린 울음소리가 떨려 나왔다.
“───!”
그걸 들은 걸까, 팩 소리 지른 마법사가 석궁처럼 생긴 걸 저들에게 겨눴다. 핸슨과 주민들은 겁에 질려 스태프를 쥔 팔을 바싹 뻗었다.
“─!”
그럼에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푸슛! 짧은 파공음과 함께 핸슨의 옆에 선 샐비 아줌마의 볼에 붉은 금이 갔다.
복면 때문에 그의 입매를 볼 수는 없었지만 어깨를 들썩이는 양이 낄낄대는 듯했다.
핸슨의 낯이 더욱 허옇게 질렸다. 스태프에 달린 보석 속 기운이 크게 일렁였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저들이 마을에 온 게 사흘 전이니 마력을 쪽쪽 빨리고 제대로 잠도 못 잔 것 또한 그만큼이었다.
어째서인지 처음 써본 마력이 평생 써온 것처럼 잘도 호응했으나 그런 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무언가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일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불쾌감.
‘마을의 은인은 개뿔….’
그의 불안한 눈동자가 다시금 제 사촌 형을 흘끗했을 때였다.
“…제기랄!”
어금니를 빠드득 간 그가 내내 들여다보던 걸 바닥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 조각이 비산했다.
‘거울…?’
이른 오후의 햇볕이 반사되어 번뜩이는 게 분명 거울 조각이었다.
“하! 연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여기까지…!”
사촌 형, 도미닉의 검은 눈동자가 희번덕였다. 눈 밑이 거뭇거뭇하고 잔뜩 해쓱해진 그 낯은 귀기 들린 사람처럼 보였다.
“으아아악!”
단전에서 들끓는 분노를 토해내듯 고함을 내지른 도미닉은 분을 못 이겨 바닥을 쿵쿵 굴렀다. 그가 깨 먹은 거울 조각이 더욱 잘게 바스러졌다.
죽음의 땅에 반짝반짝한 윤슬이 배었다.
“야.”
한참 씨근덕대던 도미닉의 짤막한 부름에 마검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마을 주민들을 대할 때와 판연히 다르게도 눈빛부터 공손했다.
“시작해.”
“이르다. 다르다, 계획.”
“이르긴, 빌어먹을. 네놈들이 내게 토 다는 것도 계약 사항에 있었나?”
“…알았다.”
마을 주민들로서는 기가 막히게도, 마검사는 짧은 제국어로 대꾸해 가면서 도미닉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다른 곳에 있는 제 동료들과 통신하듯 손목의 팔찌에 대고서 중얼거린 마검사가 별안간 주민들에게 눈깔을 부라렸다.
“해!”
그건 그들이 며칠간 원반에 마력을 주입하라고 윽박지를 때마다 내뱉던 유일한 제국어였다.
하지만 그게 너무도 갑작스러운 명령이어서일까, 주민들이 모두 벌벌 떨며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별안간 도미닉이 마검사가 들고 있던 마도 기계를 빼앗아 그들에게 겨눴다.
“네놈들도 내가 우스워?”
푸슛! 무리에서 가장 바깥쪽에 서 있던 토미가 신음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와 다리가 묶여 있던 이들이 공포조차 느끼지 못한 채 휘청거리자, 도미닉이 다시금 마도 기계를 그들에게 겨눴다. 창백해진 주민들은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지금 당장. 빨리 시키는 대로 해, 이 악마 새끼들아.”
악마 새끼, 그 말을 도미닉은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이 내뱉었다.
“네놈들에게 적선한 값은 해야 할 거 아냐.”
부릅뜬 그의 검은 눈동자는 눈앞의 겁에 질린 붉은 눈들이 아니라, 그 너머의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간악한 배신자 새끼.”
제 평생의 열등감을 선사해온 의동생을, 제가 응당 가져야 할 모든 걸 가져버린 그 주제 모르는 악마의 낯을.
까드득, 그의 어금니가 기분 나쁜 마찰음을 울렸다.
“…감히 날 우습게 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
“경.”
나는 다급히 루시페우스의 팔뚝을 쥐었다. 다행히 그의 체온은 정상이었다.
“저들이 실수한 걸지도 몰라. 상황이 바뀐 만큼 목적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나 또한 크게 당황했으나, 그와 내 수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추측한 바를 주워섬겼다.
“마력 총량도 경에 비하면 한참 미달이고, 두 달이 그믐이 되려면 열흘은 남았고, 수정도 다 완성되지 않았고. 어차피 성기사단을 궤멸시키진 못한다는 계산이라 무력시위를 하려는 걸 수 있어.”
그래. 그럴 확률이 높았다.
“성기사단을 상대로 하는 것보다 나를 상대로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고…?”
분위기가 풀릴까 싶어 농담조로 덧붙였지만 따라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루시페우스의 낯이 더욱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저 발악에 불과하니, 계획대로 차분히 정리하면 되는 일이야.”
나는 루시페우스가 진정하도록, 그의 팔을 작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의 숨결이 거칠어지는 게 세르니타 때가 자꾸만 떠올랐으니까.
“우선 협곡 하부의 균열이 벌어지지 않도록, 성기사단이 올 때까지 내 기사들이 신성력으로 정화하면 어떨까?”
“그걸, 전하께서 어찌… 아.”
루시페우스의 얼떨떨한 말소리에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어찌 알기는. 루시페우스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었던 지난 생의 이야기를, 내가 몇 번이고 읽었기 때문이지.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릴 때 어떤 양상을 띠는지, 마지막에 성기사단이 어떻게 뒤처리했는지 어렴풋이 서술돼 있었으니까.’
술식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막아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피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수습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 틈을 통해 마물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그때부터 걷잡을 수 없이 격랑이 시작될 테니까.
“제가 이 근방의 모든 이들을 그때처럼 제압한다면 편하겠지만….”
그리 답하는 루시페우스의 말소리가 꽤나 음산하게 울렸다. 세르니타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는 걸 알았는지, 마검사들이 눈동자를 떨었다.
“그로 인해 숙성 중인 수정이 자칫 폭주할 수도 있으니…. 답답하군요.”
그렇게 짓씹듯 말한 뒤, 루시페우스는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손을 짚었다. 지반 속 깊은 곳을 탐사하는 듯했다.
“확실히 위력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 부인하기 어려운 움직임이 있어요. 이대로면 균열이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으음, 역시.”
저 깊은 곳에서부터 진동이 일고 있어서일까, 발밑이 요동치는 느낌에 자꾸만 어지러웠다.
“우선 케인, 엘런.”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소대장을 불렀다.
“협곡 아래로 내려가보면 그 바닥이 말라붙은 강줄기처럼 돼 있을 거야. 갈라진 흙을 따라 균열이 벌어지면 토사가 무너져 내리면서 바다가 열리는 거니까….”
루시페우스가 맞는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거기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면 붕괴를 지연할 수 있으니, 성기사단이 올 때까지만 버텨줘. 3소대도 합류시킬게.”
“그럼 저는 성기사단을 얼른 데려와야겠군요.”
“데려온다고?”
서너 시간 걸린다더니…. 설마 마, 마법으로?
당황스러움에 절로 입이 헤벌어졌다. 루시페우스의 손이 부드럽게 내 턱을 쓸어 입을 닫아주며 대꾸했다.
“이곳은 마기도 마기지만, 공기 질 자체도 굉장히 나쁩니다. 성기사단이 빨리 와서 막사를 쳐야 전하께서 쉬시지요.”
“그치만, 나는 괜찮아. 경이 무리하는 거 아냐…?”
루시페우스가 짧게 웃으며 내 후드 속으로 손을 넣어 관자놀이를 훑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배어난 식은땀이 그의 장갑에 맺혔다.
그래, 누가 누굴 걱정하겠어….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의 마력이 저와 상성이 굉장히 좋으니까요. 무엇보다 그들이 할 일이 많고요.”
“…음, 그건 그렇지.”
균열이 벌어지지 않도록 정화하는 데도, 혹여 격랑이 시작돼 마물이 쏟아져 나올 경우를 대비하더라도 성기사단의 전력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전하께서 안전하심이 보장되지 않고서는 후작 부자가 무슨 짓을 저지르건,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결국 루시페우스는 성기사단 수백 명을 옮겨왔다.
정확히 말하면 거대한 이동 마법진을 구축해서 그걸 타고 성기사단이 이동하게 했다.
합류 지점으로 이동하고 그들을 데려오기까지, 그 모든 게 순식간의 일이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3소대와 합류한 나는 공간을 찢고 수백의 군대가 쏟아져 들어오는 장관에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