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11)
“맞습니다.”
루시페우스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어젯밤 복귀한 기사들은 아니나 다를까 아무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대로 새벽부터 말을 달렸다.
이곳에 도착했을 땐 갓 정오를 넘겨, 태양이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중이었다.
“여기를 보시면 말이죠.”
루시페우스가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손짓했다.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현격히 빠른 속도로 바위가 밀려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는군.>
<직접 보니 더 놀라워.>
그리고 그것이, 마검사들을 매료한 루시페우스의 마법인 듯했다.
이어지는 손짓에 그 아래의 흙이 대번에 걷혔다. 그 안에 가득 담긴 보석들의 반사광이 한낮의 햇볕 아래서 반짝반짝했다.
“그러니까, 이게….”
“네. 아직 완성되려면 좀 멀었군요.”
갖은 크기와 모양의 수정들이 구덩이에 한가득 차 있었다. 검붉은 기운이 서려 있어서 보통 ‘수정’이라고 하면 떠올릴 법한 투명함은 거의 없었지만.
“확실히 알렉스가 찾은 것과는 다르네요.”
“예. 유사한 기질을 띠도록 했어도, 이곳의 마기만큼 짙은 농도의 마력으로 만든 게 아니니까요.”
엘런의 말에 건조하게 대꾸한 루시페우스는 그 수정들을 마법이나 손으로 건드려 보더니, 이내 흙으로 다시 덮었다.
“이런 게 열 군데나 있다고?”
“정확히는 총 열여덟 곳이고, 술식상 마력이 집중되는 곳이 열 곳입니다.”
“그들이 일단 여기에 왔다가 그 열 곳으로 이동했을 거라는 거지.”
“예. 제가 다른 지점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려준 바람에….”
씁쓸한 듯 목소리를 울리며 루시페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니까. 안 그랬으면 후작이 이 사달을 벌일 생각도 못 했겠지. 일종의 미끼였다고 치자.”
나는 그가 자책감을 덜 수 있도록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었고.
“혈통이 어쩌니 저쩌니, 지루한 법리 해석 다툼 없이도 그의 죄과를 만천하에 내보일 수 있게 됐으니까.”
“하지만 전하께서 이런 험한 곳에 오시게 되었잖습니까….”
앓는 듯한 목소리를 울리며, 루시페우스가 내 손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내 손끝이 차게 식어서인지 장갑 너머 그의 손이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저희가 말씀드린 게 이겁니다.>
그때, 마검사들이 장난감 같은 것을 하나 내밀었다. 벽돌 크기의 나뭇조각에 바퀴가 네 개 달린 것이….
‘장난감 자동차?’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우두머리가 재빨리 대꾸했다.
<영상을 공유해주는 녀석들 말입니다.>
장난감 수레의 한가운데에는 까만 오닉스가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게 무언가에 조작되는 듯 이리저리 각도를 바꿨다.
<여기에 입력된 상이 저희가 가진 마도 기계로 전달되는 거죠.>
그의 말이 마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다른 마검사가 자신의 품에서 작은 손거울처럼 생긴 것을 꺼냈다.
<이런 걸 계속 갖고 있었다고? 그대들을 구금할 때 소지품 검사를 너무 느슨히 했군?>
<덕분에 저희가 도움을 드리지 않습니까.>
우두머리의 능청에, 나는 픽 웃고는 그들이 건넨 손거울을 받아 들었다.
뚜껑 없이 손잡이가 달린 그 거울은 뒷면이 자개로 장식돼 있었다.
거울면에 비치는 영상 속 풍경은 너른 황야, 저 너머의 협곡, 군데군데 나뒹구는 돌들….
<어제 늦은 오후께 이곳의 영상입니다. 사람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작동하도록 해뒀거든요.>
과연 영상 속 인물들의 낯에는 은은한 노을빛이 물들어 있었다. 기울어진 볕을 받는 수백의 사람 한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둘.
“…후작 부자가 둘 다 움직였군.”
그리고 그 곁에는 복면을 한 사내가 다섯 명 있었다.
<이자들이 그대들의 동료인가?>
<동료까지는 아닙니다만, 예….>
마검사들은 재차 그들과 선을 그었다. 실제로 마검사로서의 가치관부터 그들과 다른 듯했으니 단순히 우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건 아닌 듯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루시페우스가 무언가를 눌러 참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화면의 뒤편에서 두려움에 가득 찬 낯으로 눈동자를 황망하게 굴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빨간 눈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해쓱한 얼굴에 허름한 차림새….
나는 다시금 루시페우스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킬리온의 정체를 알고서, 또 빨간 눈의 마을의 존재를 알고서 혼란스러워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꽤 복잡할 거였다.
영상 속 후작은 마검사들에게 허공을 이리저리 가리키며 바락바락했다. 그의 표정이며 몸짓 하나하나가 고압적이기 그지없었다.
‘이게 후작의 본모습인 거겠지. 조금의 체면조차 차리지 않은….’
마검사 하나가 주민들에게 원반 같은 걸 내밀자, 주민들은 하얗게 질린 낯으로 그걸 잡았다.
“마검사들은 좌표를 설정하는 정도의 마력만 쓰는 모양이군요.”
구체적인 지시가 필요한 부분만 마검사들이 직접 실행한다는 소리였다. 그들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이동에 드는 마력은 모두 주민들의 걸 쓰고 말이지?”
“예. 그렇게 마력을 아끼면서 여기까지 왔겠군요.”
이윽고 원반을 나눠 쥔 이들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몇 번에 걸쳐 그곳에 자리한 주민이 모두 이동한 뒤. 마검사 중 하나와 함께 도미닉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렇게, 그들을 처리하러 간 거군.”
내 읊조림에 사위가 숙연해졌다.
오늘 새벽, 황성에 남은 막심을 통해 전달받은 3소대의 보고는 우리에게 낭패 그 자체였다.
‘아주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일은 알비누스 후작이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일이었다.
수정을 모으는 데까지는 귀족파 주류들이 합심했고, 어쩌면 게이블스 후작 정도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와 관련된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걸 알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후작만이 알고 있었을 거였다.
루시페우스의 지난 생에도 이 일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공제눈’을 읽은 나조차도 이게 귀족파의 음모인 걸 올해에야 알았으니 말이지.’
그러니 거사를 앞둔 후작으로서야 다른 가문의 잔챙이는 처리하는 게 타당했다.
“…이렇게 소후작의 죄가 하나 또 늘었네. 그렇지?”
내가 부러 장난스레 울린 목소리에 루시페우스가 작게 웃어 보이며, 품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킬리온의 피가 담긴 수통도 함께였다.
“전하의 기사들에게서 조언을 받아 이걸 더 개조했습니다.”
“또? 어떻게?”
“어제 신성력을 씌운 눈으로만 표식을 볼 수 있는 게 인상적이어서, 그걸 응용해 보았죠.”
“…아, 그러면 저들이 빛줄기를 볼 수 없도록?”
“네. 이건 애초에 신성력을 불어넣는 도구였으니 상성에도 맞더군요.”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가 내 눈을 잠시간 제 손으로 덮은 뒤, 마검사들 몇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이들이 마도 기계를 조작하는 자들입니다.”
“아하.”
루시페우스가 우두머리를 비롯한 마검사 다섯의 눈에 신성력을 덧씌웠다. 그들이 그저 어리둥절한 낯을 하고 있기에 내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신성력으로 눈을 강화하는 거야. 저 나침반의 표식을 신성력을 씌운 눈으로만 볼 수 있게 개조했대.>
<아, 본대륙에서는 신성력이 발달해 있다더니…!>
마검사들은 또 새로운 발견을 한 듯 들떴다. 그러는 동안 루시페우스가 내 눈에도 신성력을 씌워주었다.
이윽고 킬리온의 피를 떨어뜨린 나침반을 작동시키자, 나침반에서 은은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와아….>
<역시 제국에 오길 잘했어.>
여섯 가닥의 빛줄기가 협곡의 내부를 메운 뿌연 대기를 뚫고 이편과 저편에 몇 가닥씩 나뉘어 뻗어나갔다.
“후작 부자 두 사람과 킬리온 신관의 동생, 그리고 그의 자식이나 다른 친척들… 정도겠군요.”
“저 빛줄기를 따라가 보면 되겠네.”
“우선 이자들의 기계로 위치만 확인해 두도록 하지요.”
루시페우스의 눈짓에, 마검사들은 결연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았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 때문에 경이 바로 확인하긴 어려운 거지?”
어제 빨간 눈의 마을에서도 그랬듯, 루시페우스는 내 기사들보다 타인의 기척을 잘 감지하는데 말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후작 부자의 능력이 평범한 탓에 다른 이들의 기운에 묻혀서 감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예. 이 근방 여기저기서 거대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마을 주민들이 신성력을 크게 타고난 데다가, 다들 모여 있으니 말이죠….”
루시페우스의 말에 내 기사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성기사단의 위치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응, 다녀와.”
나를 잘 부탁한다는 듯 기사들에게 눈짓한 뒤, 루시페우스의 신형이 대번에 사라졌다.
그사이 마검사들은 영상 마도 기계를 조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심력을 많이 써야 하는지,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식은땀마저 흘렸다.
<마도 기계에 은신 마법을 걸고 간간이 순간 이동도 시켜야 해서 꽤 많은 마력이 소모됩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에 간섭을 받으니 더 집중해야 하고요.>
<…그렇군.>
다른 마검사들이 눈치 좋게 해준 설명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루시페우스가 돌아왔다.
“순조로이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 속도면 서너 시간 안에는 집결지에 도착하겠군요.”
“좋아. 우리도 슬슬 움직이자.”
성기사단은 오늘 새벽같이 대신전의 이동 포털을 타고 아로카트령에 당도했다. 그리고 현재,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파견 나올 때면 주둔하는 곳을 향해 진군하는 중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유역 중 아로카트령 본성에서 가장 가까운 너른 땅.
20년 전, 루시페우스가 태어나고 에리나 경이 사망한 곳.
그곳에서 성기사단과 합류하기로 이야기된 상태였다. 수정 운반책을 뒤쫓던 3소대와 로니는 지금쯤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을 거였다.
“다시금 말하지만, 우리는 성기사단이 올 때까지 일단 기다릴 거야.”
“네.”
“후작 부자가 성기사단을 목표로 계획을 실행할 테니, 그 죄를 물어 처단하는 거고.”
나는 마검사들을 위해 같은 이야기를 서대륙 공통어로 한 번 더 했다.
“필요한 경우 즉결 처분 가능.”
그리 말하는 내 시선은 루시페우스의 낯에 고정돼 있었다.
“성기사단장님께 말씀드려 뒀으니까.”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일행 모두 그것이 루시페우스를 위한 일임을 알았을 거였다.
“그럼, 움직이자.”
내 마지막 말과 함께, 우리 일행이 말을 매어둔 쪽으로 다가가던 그때.
갑자기 멈춰 선 루시페우스가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한 지점을 살피듯 그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왜 그래?”
“저건….”
그가 무언가를 물으려는지 마검사들을 향해 손짓할 때였다.
“…어?”
그런데 멈춰선 그의 뒤편 멀리에… 협곡을 가득 메우고 있는 부연 대기가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아지랑이처럼….
“경, 저거 혹시….”
내가 그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하자, 루시페우스가 덩달아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구르르릉….
지반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나지막한 소리.
어…?
모두가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주고받았다.
설마.
…아니겠지.
내가 불안함을 담은 낯으로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보았을 때.
꽈르르르르릉….
한층 커진 굉음이 대지를 울린 순간, 나는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반사적으로 나를 제 품으로 받친 루시페우스의 낯은 서늘한 분노로 굳어져 있었다.
“지금 이거….”
지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이어지는 진동. 협곡에 감도는 불길한 조짐.
“…시작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