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9)
<네, 네, 맞습니다.>
내내 제 일행들을 윽박지르던 사내가 대표로 답했다. 눈치를 흘끗 보는 게, 내가 황족인 것까지는 알았지만 루시페우스와 나 사이의 상하 관계를 파악하고자 애쓰는 듯했다.
“저자가 우두머리 격인 것 같더군요. 총 인원이 스물넷이고,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루시페우스가 귀엣말로 재빨리 상황을 알려주었다. 나는 짧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마검사들에게 말했다.
<난 그대들의 목적에 관심이 없어. 우리와 동행하기로 한 이상 방해만 안 되길 바랄 뿐이야. 지난번에 보니 그대들이 루시페우스 경에게 대적할 수는 없어 보이긴 했지만….>
<아, 존함이 그렇게… 되십니까?>
<응?>
<루시페-스? 네 음절? 이름이 기네.>
<제국식으로 세면 다섯 음절이야.>
<발음이 어렵네. 무슨 의미일까?>
<이름이 길면 마력을 더 강하게 타고나나? 우리는 길어 봐야 두 음절이잖아.>
“…….”
못 알아듣는 척을 할 걸 그랬나?
마검사들이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하여, 나는 루시페우스는 이해하지 못할 짜증에 사로잡혔다.
너희쯤은 루시페우스한테 대적할 깜냥이 안 되니 허튼수작 부리지 말아라, 그리 말하려던 거였는데.
<그러니까 말이지.>
<아, 저, 죄송합니다. 저희 녀석들이 마스터, 그, 루우- 경께 퍽 매료되어.>
내가 불쾌해하는 걸 인지한 우두머리의 말에, 그 곁의 마검사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뒤에 자리한 루시페우스 쪽을 자꾸만 흘끗거리면서.
이게 바로 엘런이 말하던 강아지 같은 눈망울인가…?
<매료라 하면.>
<그게….>
그리 말한 우두머리가 또 루시페우스를 힐끔댔다. 어디까지 말해도 될지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 비밀은 없어. 아직 말하지 않았대도 언젠가는 내게 말할 거고. 왜냐면 내가 그의….>
거기까지 말한 나는 순간적으로 낯이 빨개졌다가, 뻔뻔한 낯으로 재빨리 말했다.
<연인이자 주군이거든.>
…에, 에헴. 제국인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최초의 인정이 참 수줍고 떨렸다.
‘뭐, 트,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젠…?’
아하, 역시.
어쩐지.
그 사냥터에서도 그렇고….
나와 루시페우스 간의 지난 사연을 모르는 마검사들은 그렇게 수군거리며 납득하고 말았지만.
그들이 또 멋대로 떠들기 시작해, 답답해진 내가 다시금 물꼬를 텄다.
<혹 그의 마력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기인한 것과 연관된 건가?>
<아, 네! 맞습니다!>
“하문하시는 데 다 정직하게 답하도록.”
“예, 예! 당연!”
루시페우스의 말에 마검사들은 예의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여댔다.
<마스터… 경께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탐사하러 왔습니다. 알비누- 씨가 올해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리는데 한번 가보겠냐고, 호위로 함께하면 노잣돈을 대준다기에 본대륙에 왔지요.>
<무슨 관광이라도 온 듯이 말하는군?>
<알비누- 씨가 주기상 열릴 때가 돼서 열린다는 것처럼 말해서요…. 한데 본대륙의 정치 싸움에 얽힐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마검사들은 그저 무고한 것처럼 굴었다. 세르니타에서 우리를 공격하기도 했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의 지시에 따랐지? 힐베르크 후작과 렌틸 자작을 암살하려 했잖아.>
<그으, 말도 잘 안 통하는 저희에게 먹고 잘 곳을 준다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검사들이 굉장히 겸연쩍은 낯을 했다.
그들이 까딱하면 불법 체류자가 될 상황이긴 했다. 그러니 숙식을 제공해주는 이들이 요구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하고도 남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루시페우스 경에게 그대들이 원하는 건, 본대륙에 체류하는 동안의 숙식이 아닐 텐데.>
<아, 그게, 그저 쓰시는 마력이 대단해서….>
<그의 마력은 그대들이 세르니타의 별장에서 경험했잖아.>
그때 불안정해진 루시페우스가 저도 모르게 마법을 쓰자, 모든 마검사가 갑작스레 거품을 물고 쓰러지거나 헛구역질을 해대지 않았던가.
저들이 대번에 제압당한 기억을 떠올리니 수치스러운지, 마검사들의 어깨가 조금 옹송그려졌다.
<그때야, 그저 강한 마법사려니 했습니다. 이 대륙의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저희 대륙의 마법사들보다 강하니까요.>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저희는 그 차이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그곳을 탐사하려고 한 건데, 마스터… 루시푸-스 경께서 그곳에서 마법을 쓰시니 그곳의 마나가 마치 루시푸-스 경의 의지인 것처럼 움직이더군요. 그걸 관찰하고 연구하는 게 저희의 목표입니다.>
우두머리가 어눌한 발음으로 루시페우스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마검사들의 낯이 굉장히 해맑아졌다.
한편으로는 루시페우스의 낯이 어둑해지는 것이, 엘런의 말대로 창피해서 이들과의 이야기를 얼버무린 게 맞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가서 루시페우스 경이 마법을 쓰는 걸 관찰한다, 이건가?>
<예, 정확하십니다!>
<그리고, 그대들의 동행을 내버려두는 대가로 우리는 알비누스 쪽에 붙은 마검사들의 정보를 제공받는 거고.>
<맞습니다!>
우두머리 사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루시페우스에게 원하는 것이 생각보다 사소하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만큼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일 거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반쯤 젖혀 루시페우스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다 이해했어. 그럼 이들에게 뭘 어떻게 물어보면 될까?”
“…제가 전하를 보필해야 하는데 전하께 도움을 받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이, 지금 그런 게 중요해?”
그가 고개를 기울여서는 내 손끝을 지분거리며 하는 말에 귓가가 간지러워 나는 쿡쿡 웃었다.
그 모든 걸 지켜보는 마검사들의 눈빛이 어딘가 묘했다.
루시페우스가 나 아닌 이들을 대하는 냉랭함이나, 저들이 루시페우스를 어렵게 생각하는 걸 보면 낯선 풍경이기야 하겠지만….
“그 마검사들이 쓰는 마도 기계로 마을 주민을 모두 옮길 수 있는지, 몇 번에 나누어 움직이든 그들의 마력만으로 가능한지…. 그리고 혹시 술식을 따로 익히지 않아도 마력을 주입하는 것만으로 마도 기계가 작동하는지. 그 정도면 되겠습니다.”
그들이 이동 마법에 쓰는 마도 기계의 능력치에 관해 묻는 거였다.
나는 루시페우스의 말을 그대로 통역했다.
<한 번에 많아야 스무 명 정도일까요? 하지만 단시간에 반복하긴 힘들 겁니다. 그들이 저희 대륙에서도 마법깨나 쓴다는 인사들인데 그래도 이 대륙의 마법사들에 비하면 능력이 떨어지거든요.>
<그렇다면….>
<술식을 몰라도 쓸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 마도 기계이니, 다른 사람의 마력을 보태면 될 겁니다. 아, 움직여야 하는 대상 스스로의 마력을 쓰면 좀 더 기능성이 높아지고요.>
역시….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루시페우스에게 말했다.
“주민들의 마력을 이용해서 이동한 것이 맞겠어. 이자들에게 지금 상황에 관해서는 아직 설명 안 했지?”
“전하께서 쉬시는데 제가 어찌 목소리를 내겠습니까.”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다정하게 울리는 남자의 얼굴에 눈을 흘겼다. 마검사들이 황망하게 눈동자를 데로록 굴려댄 것은 덤이었다.
<그대들의 동료가 이 마을의 주민들을 납치하는 데 일조했음은 들었겠지.>
<예, 예에…. 동료라기보다, 그저 잠깐의 동행… 정도였달까요?>
루시페우스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것이, 알비누스 쪽 일에 손을 떼기로 해놓고 상황이 이리되어 어지간히 겸연쩍은 모양이었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태생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에 영향을 받아 큰 마력을 타고났지. 루시페우스 경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 말에 마검사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새로운 발견에 들뜬 듯했다.
<그들의 마력으로 마도 기계를 작동해서 이동한 것 같아. 내 기사들이 수색 중이지만, 꼬리를 잡길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해.>
<하긴, 마스터의 마력을 대체하기 위해 그들을 납치했다고 했죠….>
마검사들의 낯이 숙연해졌다.
<아무튼, 이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그 전하… 맞으시죠?>
나는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전하의 기사들이 저희를 오래간 심문했지만 저희에게 권한이 없어서 묵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알비누- 씨를 따르는 자들은 그저 평화 협정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마도 기계를 쓰는 게 목적인 자들이라….>
<평화 협정?>
<저희 대륙에서는 마력을 크게 타고나지 않아도 마도 기계만 있으면 마법을 쓸 수 있다 보니, 마도 기계의 소유며 개발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거든요.>
아하, 나는 눈썹을 느릿하게 들썩였다.
전생으로 치면 총기 소유 규제, 뭐 그런 걸까?
<하지만 그들처럼 마력을 조금이라도 더 타고난 이들은 어떻게든 마도 기계를 개조하고 최대 보유 수량 이상의 마도 기계를 몰래 소지하고…. 그러니까, 더 큰 능력에 탐닉하더군요.>
<마도 기계와 관련된 규제가 없는 본대륙에 와서 마음껏 공격성을 펼치고자 왔다는 소리군.>
<그러니 전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그들이 이동 마법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 정도에 그쳤지만, 다른 용도의 마도 기계는 어떻게 개조했는지 저희도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요.>
<…조언 고마워. 하지만 세르니타에서는 내 기사들과 적대하는 게 고작 아니었나?>
<그때야 알비누- 씨가 죽는 이 없게끔 하라고 했으니까요…. 무, 물론, 저희가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 루, 루시푸-스 경께서 강하시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당연한 소릴.>
내가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를 미소 띤 얼굴로 올려다보자, 루시페우스가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걱정할 게 어딨겠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내 안전에 혈안인데.
나는 그의 손을 톡톡 두드리고는 마검사들에게 말했다.
<새벽에 출발할 거야. 해가 완전히 높아지기 전에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도달하는 게 목표고. 우리는 말로 움직일 건데.>
<저희야, 좌표만 알려주시면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마도 기계로 이동할 테니 위치만 알려달래.”
내 정리에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어지간히도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봤는지, 마검사들이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오늘도 멀리 왔는데 내일도 움직이려면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 봐.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가까워지면 마력도 잘 회복될 거라면서?>
<그렇습니까?>
우두머리가 깜짝 놀라 루시페우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오오, 대단하군요.>
<역시 마력의 근원에서 가장 가까우신 분께서는….>
<마스터께서는 이 근처에서 마력을 더 빨리 회복하신다는 말씀이시지?>
<이곳의 마나가 괜히 순종하는 게 아닌가 봐.>
<무슨 의미지?>
저들끼리 갑자기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 대기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 말씀하신 것처럼 이 근방에선 마력이 빨리 회복되는 현상이… 저희에겐 일어나지 않거든요.>
<예, 저희의 마력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것과 이질적이니까요.>
<대단합니다. 역시 따라오길 잘했어요.>
우두머리의 말에 다른 마검사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금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루시페우스도 자신의 마력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기인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지….’
루시페우스가 지닌 마력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나와 호응도가 높은 반면, 본대륙도 아닌 서대륙 출신인 그들의 마력은 이곳의 마나와 잘 어우러지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러면….
<잠깐. 마력도 회복 못 하면 거기까지 간대도 공격 하나 못 하는 거 아냐? 그대들, 쓸모없네?>
<윽.>
신성력 마력 둘 다 제로인 내가 그들의 아픈 곳을 찔렀다.
<영명하신 지적이지만 서럽군요…. 하지만 저희가 그곳에 갖다 놓은 귀여운 마도 기계는 쓸모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