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94화 (194/220)

194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8)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순순히 따랐을지….”

일전에 왔을 때 만난 이들을 떠올리는지, 리나가 긴 한숨을 뱉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알비누스 후작이 식량을 빌미로 협박한 게 수십 년은 될 거야.”

그리도 오래 마을과 교류했지만, 루시페우스에겐 절대 말하지 않았고 말이다. 루시페우스와 킬리온에게 서로에 관해 말하지 않았듯이….

그리 생각하며 나는 루시페우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계산하듯 눈을 살포시 내리깐 채였다.

마을과 연관된 일은 루시페우스의 지난 생에 없던 사건이라, 나도 루시페우스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후작을 믿고 순순히 따라나선 걸까요?”

“믿었다기보다, 휘둘린 세월이 그렇게 기니 체념적으로 순응한 거겠지.”

인질이 납치범에게 동조하게 된다는 그 유명한 심리처럼 말이다.

내 단언에 분위기가 숙연해졌을 때였다.

“제가 마을 주민들을 본 적도 없고 그들이 썼을 마도 기계가 어떤 건지도 모르니 확언하긴 어렵지만….”

내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루시페우스가 입을 열었다.

“정확한 건 마검사들에게 물어봐야 알겠습니다만, 그들의 마도 기술로도 그 정도로 멀리까지 이동 마법을 구사하긴 어려울 겁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평소에 마력을 안 쓰고 산다지 않았습니까.”

“네. 신성력으로 대지며 식량을 정화해야 살아갈 수 있으니 마력을 억눌렀죠.”

리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눌러두었던 걸 쓰려고 하면 그 효율이 굉장히 떨어집니다. 신성력을 마력으로 전환한다면 그 위력이 대폭 약화하고요.”

평소에 신성력을 봉인해두고 지내는 루시페우스의 말인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여기서 한번 마법으로 이동하고, 그다음은 도보로 이동했을 수도 있겠네.”

“네. 한편으로는 주민들 역시… 마력이 빨리 회복될 테니 계속 마법을 썼을 수도 있고요. 무엇이든 확실하진 않지만요.”

루시페우스는 그것이 자신의 상태를 근거로 한 추측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듯했다.

내 기사들은 빨간 눈이 이곳의 마력을 타고났기 때문임을 아니 괜찮을 테지만….

“그럼 일단 마검사들이 올 때까지 좀 더 멀리 수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리나랑 린지는 쉬고요. 뭐라도 단서가 있다면 좋으니까요.”

케인과 엘런이 서로에게 동의하듯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루시페우스에게 의존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쓰는 듯했다.

“자취를 일부러 은폐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너무 애쓰진 말고.”

“돌아올 수 없는 바다 방면으로 50일스 정도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런의 대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니까….”

“정확히 열 군데,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열 군데? 경이 알려준 곳 말고?”

“도착지로 설정할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지만, 거기서 수정들이 숙성 중인 다른 곳을 찾는 법을 후작이 압니다. 제가 경계심을 늦추겠답시고 너무 많은 걸 알려 줬더군요.”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가 쓰게 웃었다. 자신이 지닌 마력으로만 그 술식을 가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정확한 원리까지 일러준 모양이었다.

후작이 그가 없이도 어떻게든 그 술식을 가동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하긴, 경의 술식이 꽤 직관적이라고 하니….”

“마탑의 마법사들이 선민의식 때문에 복잡한 술식을 쓰는 줄 알았는데, 나름 보안 문제도 있나 봅니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꽤나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불빛에 비친 루시페우스의 턱은 어슴푸레 불거져 있었다.

그건 그의 평생을 망치고 있는 후작에 대한 분노일 터였다.

나는 그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오히려 다행이지. 그 덕에 그들이 있을 곳의 후보군이 좁혀지는 거니까.”

“…네. 그 열 곳에 주민들을 나누어두었을 겁니다.”

“응. 도착하면 어딘지 확인해주고, 경은 후작 부자를 찾아.”

“예.”

그의 대꾸가 너무도 음산하게 울렸다. 기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은연중에 흘러나온 역할 분담을 되새기는 듯했다.

‘후작 부자가 루시페우스의 몫이라는 것까지….’

그의 복수심이 두 생에 걸친 것임을 아는 나만이 그의 분노를 온전히 이해할 테지만.

그때, 루시페우스가 품을 뒤적여 나침반을 꺼냈다. 어제 소대장들과의 회의가 끝나고서 그에게 돌려준 참이었다.

“이걸 써볼까 합니다.”

“어떻게?”

후작 부자나 마검사들, 또는 빨간 눈의 마을의 그 누구와도 피가 통하는 사람이 없는데…?

내 낯에 서린 의문을 읽었는지, 루시페우스는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려 보이고는 품에서 작은 수통 같은 걸 꺼냈다. 그건 물을 담았다기엔 그 크기가 꽤나 작았는데….

“신관 킬리온의 피입니다.”

“아하.”

킬리온을 만나러 대신전에 갔을 때 받아온 모양이었다.

“그걸 쓰면 최소한 후작의 위치는 알 수 있겠네.”

“게다가 마을 주민 중에 그의 동생과 조카도 있다고 하고요.”

루시페우스는 뚜껑을 따, 나침반에 킬리온의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가 신성력을 운용하자 빛이 나더니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에 쓰면 들킬 테니 지금은 빛줄기가 나오지 않게 해뒀습니다. 하지만 바늘만으로도 대강 어느 방향에 있는지 확인할 수는 있겠죠.”

“그 빛이 그렇게 멀리까지 뻗나 보지?”

“그렇게 개조해두긴 했습니다.”

“그들이 어제 이 나침반의 기능을 확인했으니, 웬 빛이 쏘아지면 의심하긴 하겠네….”

우리든 성기사단이든 올 걸 대비 중이겠지만, 그렇대서 대놓고 행동할 필요는 없으니까. 조심해서 나쁠 거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나침반을 받아서 케인에게 건넸다.

“빛줄기가 나오지 않게 해뒀다는 건, 원하면 활성화할 수 있다는 거지?”

“예. 그게 바늘로만 확인하는 것보다 정확도가 높으니까요.”

“그럼 내일 해가 가장 높아졌을 때 나침반을 쓸 수 있도록, 그전까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도착하게끔 움직이면 되겠네.”

한낮에는 그 빛줄기가 햇볕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테니 들킬 확률이 낮을 테니까.

“그럼 우선 수색하러 출발하겠습니다. 그, 마검사들은 언제쯤 올까요? 오전에 출발했다고 하셨나요?”

케인의 물음에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마도 기계에 의존해야 하는지라 꽤 오래 걸리는군요.”

오전에 마검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먼저 출발시켰지만, 그들의 실력으로는 짧은 거리로 여러 번에 나누어 움직여야 해서인지 우리보다 늦고 있었다.

“아마 자정 전에는 도착할 겁니다.”

“좋아. 경들도 그때까진 돌아와. 신성력 아껴서 내일 써야지.”

“아, 맞다. 그리고요.”

그렇게 논의를 적당히 마무리할 무렵, 리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헨리에테 경이 함께 전달한 내용이 있었네요. 3소대 일인데요. 그, 전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왕림하신다니 놀라서 깜빡 잊었지 뭡니까.”

그리 유들거리는 와중에도 리나의 낯이 다소간 멋쩍게 빛났다.

헨리에테가 우리가 마을로 가고 있다고 연락하며 덧붙인 내용인데, 내가 올 때까지 마을 주민들의 자취를 하나라도 찾겠다고 혈안이 돼 깜빡한 모양이었다.

“3소대는 아로카트령의 경계에 무사히 다다랐다고 합니다. 운반책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닿기 전에 따라잡는 것이 목표라고요.”

“알렉스 경이 보고하고 헨리에테 경이 연락한 시차를 생각하면 몇 시간 전의 일이겠네.”

“잘된 일이네요. 프렘린 쪽이 마법진을 이용하지 않고 움직이는 덕에 곧 따라잡겠습니다.”

케인의 정리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페우스가 마기에 숙성 중인 수정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인위적으로 마력을 불어넣은 수정들 또한 마법으로 옮기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상단의 인맥을 활용해 황성 밖으로 실어 나른 걸 보니 말이다.

반면 알렉스의 3소대는 그간 친분을 다져온 길드들에게서 이동 마법진을 빌려 단시간에 움직일 수 있었다.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건….’

나는 내 곁에서 심각한 낯을 짓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루시페우스가 알비누스의 일을 도우며 거래해온 이르겐트의 마법진이 황성에서 가장 멀리까지 움직일 수 있었지.’

그래, 이렇게.

다 괜찮을 거였다.

우리가 함께하니 다 잘되었고. 또….

나는 둘러앉은 내 수하들을 보았다. 내 직속 기사들 중 가장 먼저 서임을 받은 케인과 엘런, 그들과 동기인 리나, 그 외에도 10년 넘게 동고동락한 기사들.

돌발 상황이 생겼지만, 내가 일궈온 게 있으니 다 괜찮을 거였다.

‘어젠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당황했지만, 차근차근 해나가면 되니까.’

지금 바로 소득이 없대도, 어쨌든 루시페우스의 지난 생에서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았다.

성기사단에서 훨씬 많은 인원을 파견할 거였고, 우리가 맞서야 할 건 루시페우스가 아니라 그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치들이니까.

“좋아. 그럼 자정 즈음에 여기서 다시 만나.”

마검사들이 도착한 것은 정말로 자정이 다 되었을 때였다.

그간 나는 루시페우스의 청으로 잠깐이나마 눈을 붙였다. 아무리 제가 계속 회복해주고 있다지만, 마기가 짙은 곳인 만큼 어찌 될지 모른다면서.

실제로 기사들 앞에서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이따금 미약한 어지러움이 엄습해 식은땀이 나던 차였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이 흘렀을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혀 눈이 뜨였다.

<여기서는 모시는 분께 무릎도 내어드리나? 개방적이네.>

<야, 딱 봐도 애인이잖아.>

<황녀 아냐? 머리 색이 말이야. 그리고 누가 애인을 이런 데 데려와?>

<조용히 좀 해.>

“으응, 뭐야….”

내가 슬며시 눈을 뜨자, 내 시야에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들어왔다. 자다 깬 내가 조명에 눈이 아플까 봐 가려주고 있는 루시페우스의 손이었다.

“깨셨어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목소리에 어딘가 언짢은 기색이 담겨 있었다.

<윽, 화나셨네.>

<그러게 내가 닥치랬지.>

…서대륙 공통어?

루시페우스의 손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저 맞은편에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이 열 명쯤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저자들은….”

“서대륙의 마검사들입니다.”

으응, 그렇겠지…. 내가 눈을 느릿하게 끔벅이며 정신을 차리려 애쓸 때였다.

“목이라도 축이시겠습니까.”

“고마워.”

<저거 봐. 저게 주군 보는 눈빛이냐.>

<이 대륙에서는 다를 수도 있지.>

<저렇게 온화한 표정도 지을 수 있으시구나….>

마검사들은 로브의 후드 너머로 이편을 흘끗대며 저들끼리 뭐라고 쑥덕거렸다.

그간 막심을 제외한 내 기사들 아무하고도 말이 통하지 않았으니 마음 놓고 지껄이는 모양인데….

<미안한데, 다 알아듣거든?>

히익! 내가 저들을 노려보며 쏘아붙이자 마검사들이 기겁해서는 숨을 집어삼켰다.

<우, 우, 우, 우리말을 하네…?>

<야, 말 가려서 해. 알아듣는다잖아.>

<어허, 알아‘들으신’다잖아.>

마검사들은 당황했는지 저들끼리 마구잡이로 떠들어댔다.

“아, 전하께서 공통어를 하시는군요.”

“어렸을 때 배워두긴 했는데, 써먹을 일이 생길 줄은 몰랐네. 심문을 내가 했다면 좋았을 텐데, 저들이 잡혀 왔을 때가 하필이면 기사들이 나 과보호한다고 애쓸 때라.”

“아….”

루시페우스가 시기를 가늠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짧게 웃었다.

세르니타에서의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어, 암조 기사들이 내가 직접 움직이는 걸 결사반대하던 시절이었더랬다.

그리고 내가 그를 무작정 피해 다니던 시절.

“전하께서 주무시니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저들의 제국어가 짧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입니다.”

루시페우스의 말소리가 불만스러운 듯 울렸다.

그게 또 귀여워서 키득거리고 싶은 걸 참고, 나는 마검사들을 향해 최대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마도 기계라는 걸 사용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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