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93화 (193/220)

193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7)

“절대로…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않으시겠다고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로 짙은 열기를 띠었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보인다고 착각되리만치.

내가 윽박지르다시피 기사들을 설득하니 더는 내색하지 못했겠지만, 상황이 이리되어 가장 불만스러운 건 그일 거였다.

애초에 그는 이 일을 혼자서 해결하길 바랐으니까.

루시페우스가 다시금 내 손을 쥐었다. 조금 더 깊이 당겨진 손등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고개를 숙인 그가 시선을 내리깔자, 안경과의 사이로 보이는 속눈썹 너머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제가 최선을 다해 전하를 지킬 테지만, 정말, 정말 또 만에 하나의 경우… 모르는 일이니까요.”

거기에 어떤 절박함이 담겨 있어,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응, 그럴게.”

아니, 애초에 그건 내 다짐이기도 했다.

그간 레베카의 신성력과 내 기사들을 믿으며 마음 놓고 다녔지만, 이제는 달랐다.

정말로 위험한 곳임을 알았고, 고지가 코앞이고, 무엇보다 앞으로도 함께하고픈 이가 있으니까.

이 무대가 끝난 뒤에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돌발 행동도 안 하고, 방해 안 되게 할게.”

“방해는요….”

루시페우스가 앓듯이 읊조리며 내쉬는 한숨이 손등에서 간질간질했다.

“걱정 마.”

나는 다시 손을 뒤집어, 손안에 그의 입맞춤을 담았다.

“정말로. 경을 위해서 그럴게.”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지난 생이건 원작이건 그런 건 다 차치하고서, 온전히 새롭게 맞이할 우리의 시간을 위해서 말이야.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수십 개의 말발굽이 땅을 차는 소리를 뚫고 루시페우스의 걱정스러운 말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괜찮으시죠?”

“응, 괜찮아! 오히려 밤바람이 시원해서 좋은데.”

“그래도 추우시면 말씀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결계를 잔뜩 쳐두고선, 경.”

그리 태연하게 말했지만, 몸이 흔들리는 양에 나는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깊은 밤의 허허벌판을 벌써 한 시간째 달리는 중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승마를 배운 적조차 없어서, 루시페우스가 달리는 말에 얹혀 가는 신세였지만.

“정말로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조금만 더 참으세요.”

“괜찮다니까.”

그는 내가 놀라지 않도록 소리 없이 박차를 가해 말을 재촉했다. 바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 깊이 수그린 그의 품에 내 등이 온전히 감싸였다.

황성에서 아로카트령의 본성까지는 신전의 이동 포털을 이용해서 움직였다.

신성력을 활용한 일종의 이동 마법진인 이동 포털은 신관들이 오지에 포교 갈 때나 성기사단이 격랑을 대비해 진군할 때만 쓰였다.

평소 마기를 잠재우러 가는 파견에는 하루 이틀 정도의 시차가 중요하지 않아 포털을 쓰지 않으나, 성기사단에서 지금의 상황을 준격랑 시로 선포한 덕이었다.

격랑 때만큼 대규모의 인원이 차출되었고, 무엇보다 조속한 진군이 필요했으니까.

우리 또한 성기사단장 로젤리아의 인가로 이동 포털을 쓸 수 있었다.

그 뒤 빨간 눈의 마을과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는 루시페우스의 마법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수색을 위해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만큼, 그 마을에서 말을 빌렸다.

말을 못 타는 내가 있었지만 별수 없었다. 한시가 급한 데다 산세가 험한 곳을 달려야 하는지라 마차를 쓸 순 없었으니까.

‘루시페우스가 신성력을 써줘서 덜 피곤한 것 같은데, 나중에 귀환하면 완전 뻗겠네….’

승마에 몸이 흔들리는 충격을 마법으로 완화했을 텐데도 긴장감이 상당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우리 두 사람에 케인과 엘런 두 소대장과 그들 휘하의 정예 여섯. 총 아홉 필의 말이 달리며 스치는 풍경은 황량 그 자체였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가까운 탓에 생명체가 자생하기 어려워서인지, 스치는 나무 한 그루조차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처음에는 두 달이 모두 곧 그믐이라 사위가 어둑해서 보이는 게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둠에 눈이 익었음 직한데도 시야는 그저 컴컴하기만 했다.

‘말을 빌린 마을에서 빠져나올 때만 해도 숲이 보였는데.’

은신할 곳이 없어서 산짐승이나 마(魔)동물이 튀어나오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만큼 사냥도 힘들고 채집할 나무도 없다는 소리라, 빨간 눈의 마을의 사정이 생각보다 더 안 좋겠다 싶을 무렵.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선두에서 달리던 엘런이 외쳤다.

“신성력으로 시력을 강화한 자들만 볼 수 있는 표식을 만들어 놓았군요.”

앞쪽 먼 곳을 살피듯 내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고서 루시페우스가 중얼거렸다.

출발하면서 황성에 남은 헨리에테에게 리나와 연락해 달라고 했으니, 두 사람이 마을로 돌아와 우릴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잠시.”

루시페우스의 손이 내 눈앞을 스쳤다.

어렸을 때 레오폴트와 수련생 후보들의 체력 시험을 훔쳐봤을 때처럼 눈 위로 신성력이 덧씌워졌다.

명료해진 시야에 들어온 건 밤하늘을 수놓은 은은한 불빛이었다. 일종의 조명탄 같은 것을 신성력으로 구현하여 쏘아낸 섬광의 끝에, 우리의 목적지가 있을 거였다.

밤의 마을은 음산했다.

인적이 끊긴 지 며칠이 돼서일 수도, 마을의 절망과 비탄에 수백 년간 잠식돼서일 수도, 마을에 그 흔한 가로수 하나 없어서일 수도 있는 쓸쓸하고 황폐한 풍경.

“전하, 이쪽입니다.”

1소대의 기사들과 한발 먼저 도착한 케인이 우리를 안내했다.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서자, 기사들이 리나와 린지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이런 오지산간에서 전하를 다 뵙다니, 고단한 출장의 여정에 단비와도 같군요.”

“경도 참, 이런 때조차.”

“이런 때니까 더 그렇죠.”

그리 말하며 리나가 헤실헤실 웃었다. 말은 평소처럼 느물거렸지만 피로 때문인지 눈 밑이 우묵했다.

루시페우스는 말없이 창가로 향했다. 결계를 치려는 듯했다.

“근처에 생명체도 별로 없을 건데, 그냥 쉬지.”

“괜찮습니다.”

“아까 다 함께 이동시키느라고 고생했잖아. 그거 회복해야 하지 않겠어?”

루시페우스의 마력이 아무리 강대하대도 무한하진 않을 테니까.

“음, 그게….”

잠시 머뭇대던 루시페우스는 고개를 숙여 내게 귀엣말을 청했다. 내가 바싹 다가서자 나직한 말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렸다.

“제 마력이 그곳에서 기인해서인지 이 근방에서는 마법을 쓰기가 더 수월하더군요.”

“하지만, 경은 그때 마력을 다 소진해서.”

그래서 죽었다고…. 나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로 대꾸했다가, 급히 목소리를 낮췄을 때.

“죽겠다는 각오로 다 짜내면 회복도 오래 걸리나 보지요.”

마침표처럼 그의 손끝이 내 귓가를 쓸며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저도 제가 한 말이 안타깝게 울릴 걸 알긴 아는지….

다정한 손길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욱신거렸다.

그 저미는 마음을 내색하는 대신 나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정말 한 명도 안 남았습니다. 신성력이 없으면 이 환경에서 버티기 어렵다 보니 마을 주민 모두 신성력이 일정량 이상이거든요. 그런데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지 말입니다.”

우리는 신성력으로 밝힌 조명 아래 둘러앉아 리나와 린지의 보고를 들었다. 마을에 기증하기 위해 가져온 식량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면서였다.

그들의 호의를 사겠답시고 가져온 걸 막상 우리가 쓰게 되니 여지없이 마음이 착잡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수색했어?”

“일단 해가 지기 전까지 이 근방 100일스 거리는 얼추 다 둘러봤습니다. 초목이 없는 덕에 시야가 확보돼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 말하는 리나의 말소리가 다소 씁쓸하게 울렸다. 낮에는 그 황량함이 더욱 명백히 보일 테니까.

“추적할 만한 단서는 없고? 아무래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갔다면, 혹시 짐수레나….”

“전혀 없었습니다.”

“발자국도, 수레바퀴 자국도 없었어요. 말발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린지가 첨언했다. 한 가지에 꽂히면 거기에만 매달리는 리나를 보완하는, 매사에 꼼꼼한 린지의 진술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역시, 그 마검사들이….”

케인이 말을 줄이며 루시페우스 쪽을 흘끗했다. 그에게 협조하기로 한 마검사들이 다른 파벌에 관한 정보를 알렸다고 했으니까.

마침 루시페우스는 건물을 둘러싼 결계를 다 쳤는지 벽에서 막 손을 뗀 참이었다.

제게 조언을 구하는 낌새를 읽은 그는 말없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그럼 잠시.”

내 곁에 앉은 루시페우스가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기사들의 눈에 이채가 도는 게, 마법이든 신성력이든 뭔가를 쓴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의 미간에 슬며시 주름이 지는가 싶더니….

“예. 신성력이든 마력이든, 근처에 인간의 기척은 없습니다.”

그 누구보다 강한 그의 단언에 모두가 침통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검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의 순간 이동 마법은 이만한 인원을 움직일 만큼 뛰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들에겐 마도 기계가 있지.”

내가 답삭 넘겨받은 말에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 부자도 함께 움직일까? 리나 경과 린지 경이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그들이 황성에 있었으니 여기까지 오진 못했더라도 말이야.”

“적어도 후작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올 겁니다. 뭐든 직접 확인해야 성에 차는 인물이니까요. 하지만 소후작은….”

도미닉의 일에 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는지 루시페우스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루시페우스의 이전 생에 후작이 그를 돌아올 수 없는 바다로 밀어 넣었다고 했지….’

후작이 직접 움직인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사건이지만, 도미닉은 그때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공제눈’에서 그는 그저 유일하게 남은 알비누스 정도로 그려지고 말았으니까. 루시페우스의 기억에도 도미닉이 이 일에 개입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도대체 왜….

“…마검사들은 소후작에게 고용돼 있지?”

“예.”

“그러면 소후작도 함께 움직이지 않을까? 그러니 마검사 다섯 중 최소 하나는 후작 부자를 이동시키기 위해 황성에 남아 있었겠고….”

이전 생에는 루시페우스가 직접 후작과 함께 움직였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먼저 이동한 마검사가 많아야 넷….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론 마을 사람들을 전부 이동시킬 수 없으니 마도 기계의 힘을 빌려야 했겠지. 그러나 그마저도 수백을 옮기기엔 한계가 있을 테니 마을 사람들의 협조를 구해야 하지 않았을까….”

“납치인데, 협조를요?”

“안 그래도, 단순한 납치라고 단정 짓기엔 다소 이상한 점들이 있어요.”

엘런의 반문에 린지가 끼어들었다.

“처음에 납치된 것으로 의심된다고 보고드렸던 건 짐을 꾸린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거든요. 하지만 정말 납치라면 그 많은 인원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저항했을 텐데 그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발버둥을 치든 어쩌든 몸싸움을 한 흔적이 없다는 모양이었다.

“한편 마법이나 약물을 사용해 잠재운 뒤 대거 이동시켰다고 생각하면 또 그들을 짐수레로든 뭐로든 나른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역시 없었고요.”

“그러니까, 종합해보면 마을 사람들에게 직접 마도 기계를 작동시키도록 했다는 게 가장 말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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