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6)
나는 그대로 그의 손을 잡아끌어, 언젠가처럼 손목의 맥박 뛰는 곳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전하….”
입술연지 자국이 그의 두드러진 힘줄과 핏줄 위로 어우러진 풍경이 보기 좋았다.
나는 뿌듯한 낯으로 그의 소맷자락과 장갑을 정돈하며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 최적의 시기는 원래대로 성기사단이 당도했을 때겠지. 두 달이 그믐이 되고, 수정이 마기에 완전히 잠식되고. 하지만 성기사단이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면….”
“상황이 갖춰지지 않았겠으나, 마지막 발악을 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 죄를 빌미로 경이 즉결 처분해. 사적 복수로써.”
나는 그를 안심시키듯 생긋 웃었다.
“로젤리아 언니랑 담판 짓고 올게. 그동안 경은….”
“…전하의 기사를 도와 알비누스 부자가 황성에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역시 경이야. 고마워.”
제 소맷부리를 매만지는 그의 낯이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전하께서 갑자기 어쩐 일로?”
“오늘은 전략실장으로서 왔어. 단장님께선 계시지?”
“…아,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로젤리아의 부관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무언가 심상찮음을 눈치챈 듯했다.
“각하, 전략실 실장 세실리아 에슈바이크 알 아마리우스입니다.”
그의 말을 곱씹는지, 안에서는 즉각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 뒤,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로젤리아가 응답했다.
“들어오라 하게.”
로젤리아 또한 무슨 일이 있음을 알아차린 거겠지.
부관이 열어주는 문을 통해 집무실에 들어서자, 로젤리아가 제 책상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그래, 세실. 웬일로 네가 연통도 없이 직접 오고.”
응접탁자의 상석과 긴 소파에 우리가 나눠 앉은 뒤.
“저, 차는 어떻게….”
“괜찮아.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내 대꾸에 부관이 고개를 꾸벅여 보이고는 집무실에서 나갔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어서 빨리 말씀드릴게요.”
로젤리아의 눈썹이 그린 듯이 올라갔다.
“이번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파견을 앞당겨 주세요.”
“…다음 주 출정 예정인데?”
“그것보다 빨라야 합니다. 기왕이면 오늘 당장.”
로젤리아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고개를 까딱여 내게 계속 말하라 지시하는 것이, 지금의 로젤리아는 내 둘째 언니가 아니라 성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나도 덩달아 자세를 가다듬어 깍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와 관련하여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불온한 움직임이라.”
“어제 정무 회의에서의 일로 앙심을 품은 알비누스 후작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강제로 개방하여 인공적인 격랑을 일으킬 예정입니다.”
“…뭐라?”
예상 밖의 이야기에 로젤리아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 또한 루시페우스의 이전 생을 몰랐다면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엄밀히 말해, 그 일이 일어나리라 확신하는 것은 나와 루시페우스뿐이었다.
내 수하들은 나의 판단을 믿을 뿐이고, 루시페우스에게 조력하는 마검사들은 연구를 위해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리기를 그저 기대하는 거니까.
“어제 그 영식이 알비누스의 양자라고 했지….”
로젤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루시페우스가 어제 정무 회의 때 우리 편임을 공공연히 내보였고, 한편으로는 내부 고발자로서 알비누스 후작의 음모에 관해 증언한 것을 돌이키는 듯했다.
그러니 내가 언급하는 알비누스의 정황은 신빙성이 높았다.
부디 로젤리아가 그리 판단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나는 로젤리아의 낯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믿어주세요, 언니.’
그 정보를 갖고 성기사단의 출정을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오로지 내 판단이니까….
로젤리아가 생각을 정리할 만한 간격을 주고서, 나는 내처 말을 이었다.
“그들이 수정을 독점한 바람에 아직 군비가 온전히 갖춰지지 않은 것, 알아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걸 노리고 그들이 수정을 독점한 것 아니겠어요?”
“…며칠의 말미가 더 있다고 해서 메워질 피해도 아니긴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어차피 시중에는 수정 원석이 씨가 말랐으니까.
“더불어 그들이 매입한 수정을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쪽으로 운반하고 있는 정황이 있어서 제 기사들이 이를 뒤쫓고 있어요.”
늘 준엄한 로젤리아의 낯이 더없이 딱딱해졌다.
“그 수정을 일종의 마력석으로 가공한 듯해요. 아마 서대륙의 마도 공학을 활용한 모양이고, 그걸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강제로 개방하는 술식에 쓰려는 거예요.”
“너는 그걸 어찌 알고.”
로젤리아의 말끝에는 물음표가 빠져 있었다. 말을 꺼낸 순간 알비누스의 핵심 전력이었던 루시페우스로부터 들은 정보임을 깨달았을 테니까.
“…네. 원래는 그 일에 루시페우스 경의 마력이 쓰이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걸 하지 않기 위해 그가 알비누스와 절연한 거고요.”
물론 루시페우스가 없었다면 애초에 없었을 계획이었지만, 그런 불필요한 정보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 그가 마법사라고 했지. 한데 그의 마력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도 서대륙의 마도 공학을 이용하는 건가?”
“혹시 빨간 눈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대해 알고 계세요?”
내 동문서답에, 로젤리아의 청록색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빛났다.
“빨간 눈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나는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성기사단이 교단과 밀접하다고 해도, 교단의 비밀까지는 공유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곧 학자의 탑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할 테지만.
“돌아올 수 없는 바다로부터 300일스 거리에 빨간 눈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어요. 학자의 탑은 거기서 난 사람들이 빨간 눈인 것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에 영향을 받아서라고 판단하고요.”
“그리고 그들이 마력을 타고났다는 추측이로군.”
“알비누스는 그들의 마력을 착취할 셈입니다. 이미 마을 주민들이 피랍된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자유민을 납치하기까지.”
상황을 곱씹는 듯 턱을 매만지는 로젤리아의 청록색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알았다. 최대한 출정을 앞당겨 보도록 하지.”
역시 내 언니…!
로젤리아의 단언에, 나는 남몰래 손을 불끈 쥐었다. 내 언니가 나를 믿는다는 사실이 새삼 짜릿했다.
“정말로 격랑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파견 인원도 늘려야 해요. 귀족파에서 두 달이 그믐이 되는 날을 노린 만큼, 성기사단이 파견 나올 것을 대비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 격랑 대비에 준하는 인원으로 출정 인원을 증가하겠다. 규모가 크니 대신전 포털을 쓸 수 있도록 해야겠고.”
해리슨! 로젤리아가 부관을 불렀다.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그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한 시간 뒤에 성기사단 전 간부를 소집한다. 의제는 이번 그믐 파견 계획 재논의.”
“네.”
상명하복이 몸에 밴 군인이어서일까, 그는 아무런 반문 없이 그대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전략실에서는 제 보좌관 헨리에테 라마르 경을 참석게 하겠습니다. 관련된 전략실 자료에 관한 모든 권한 또한 그녀에게 위임하고요.”
“너는?”
“저는 곧바로 제 기사들과 빨간 눈의 마을 수색을 지원하러 떠나겠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뵈어요.”
“위험합니다!”
내가 읊은 계획에, 케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엘런 또한 말은 안 해도 반대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맞은편에 앉은 루시페우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의 입매가 한껏 굳어 있었다.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시다니요. 너무 멀고, 게다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까지 가게 되면….”
케인이 말끝을 흐렸다.
암조 모두가 내가 회복력이 더디다는 걸 짐작하고 있던 데다가, 어제의 퍼포먼스 때문에 신성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기까지 한 참이었다.
“내가 없으면, 지휘는 누가 할 건데?”
“그건 제가.”
케인이 충동적으로 대꾸했다. 전략실로 편제를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직속 소대의 소대장이 그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이건 더 이상 우리만의 일이 아니야. 이미 성기사단장님께도 그렇게 보고했고, 인가도 났어.”
끄응, 케인이 침음을 삼켰다. 성기사단장에게 보고한 사항을 고작 수하들의 만류로 번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성기사단과 합류할 거야. 통솔권이 있는 내가 있어야 해. 이 일에 관해 가장 정보가 많은 건 우리니까, 작전에 대한 주도권도 챙겨야 하고.”
“하지만 마을 주민들을 그전에 찾게 되면요.”
“그렇다면 평화롭게 성기사단과 황성으로 귀환하면 되겠지.”
높은 확률로, 빨간 눈의 주민들을 우리가 되찾더라도 어떻게든 일은 벌어질 거라는 게 내 추측이었지만.
그들이 없으면 없는 대로, 신성력을 마력으로 전환하여 미미한 격랑이라도 일으키려 할 거였다.
정말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일 테니까.
“경들이 성기사단 소속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는 독립체야. 성기사단 산하가 아니라 제국군 산하 전략실이잖아. 지금껏 그들과 훈련조차 함께한 적이 없는데, 경들이 나 없이 성기사단과 의견을 조율할 수 있어?”
내 말에 틀림이 없어서, 기사들은 모두 침통한 낯을 지을 뿐이었다.
그중 가장 괴로운 낯을 한 건 루시페우스였다.
애초에 마검사들과 따로 움직이려다가 내게 설득된 순간부터 이런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닐 거였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직접 움직이겠다고 선언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그리 말하며 나는 루시페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위험한 일에 뛰어들 상황을 만들었다고 자책하고 있을 테니까.
“내가 직접 출정해서 지휘했을 거야.”
그가 기억하는 이전 생의 세실리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결심은 그랬다.
“올봄, 귀족파에서 돌아올 수 없는 바다와 관련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확신했을 때부터 내 계획은 그랬어.”
‘공제눈’의 클라이맥스인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전장이 인위적으로 꾸려졌음을 알았을 때부터 말이지.
흑막이자 서브 남주인 루시페우스 알비누스와 그저 반목할 줄 알았던 그 시절에….
그 생각을 하자니 마음이 아릿해졌을 때였다.
“전하.”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페우스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팔걸이 위에 올려둔 내 손을 쥐는 그의 낯은 참담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저, 그럼 소대 녀석들 준비시키러, 그리 중얼거리며 케인과 엘런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어찌하건 아랑곳없이, 루시페우스는 내 손등에 제 이마를 천천히 눌렀다.
“전하께서 명하시면 저는 정말이지 도리가 없는 걸 아시면서….”
너무하십니다…. 그리 읊조리는 그의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번번이 그의 걱정을 사는 것도 미안하고 또 곤란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마를 밀어 고개를 들게 했다. 루시페우스의 낯에는 불안이 일렁이고 있었다.
“경. 내가 봄에 계획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좋아. 경을 대적하러 가는 게 아니라 경과 함께 가는 거니까.”
애초에 각오한 것보다 적이 약하며 그의 강함에 의지한다는 말이었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루시페우스의 낯에서는 흐뭇함 비슷한 것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는 정말, 전하께서 상상하시는 이상으로 황폐합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내겐 레베카 언니의 초커도 있고, 테오도르 오빠가 선물해준 마도구도 많지.”
나는 루시페우스의 말을 끊으며 대꾸했다. 내 주변인들이 나를 걱정할 때면 늘 하는 말이었다.
“내 기사들도 있고.”
“…….”
“…무엇보다 경이 있잖아.”
내 진심으로써 조금이라도 기쁘게 하길 바라는 말이었지만, 그의 낯은 더욱 어둑해질 따름이었다.
루시페우스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