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5)
루시페우스가 마법을 걸어준 덕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일어난 늦은 아침.
일어나자마자 확인한 케인의 보고는, 알비누스의 부자가 둘 다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었다. 추측대로 환영 마법으로 그림자들의 감시를 속였으며, 저택과 상단 건물의 모든 사용인은 수면 마법에 걸려 있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차분해졌다.
‘…불안한 건 루시페우스 앞에서 다 털어 냈으니까.’
자책은 어제로 충분했다.
나는 우선 황성 수비대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후작 부자나 다른 수상한 자들이 성문을 빠져나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동시에 케인의 1소대에는 시내 탐문 수사를 명했다.
‘하지만 지금껏 소식이 없다는 건, 황성에 없단 소리고….’
오찬을 겸해 연 다과회라 아직 이른 오후긴 했다. 하지만 리나에게서 전보가 온 뒤로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그렇다면 이제 어쩐다….’
머릿속으로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스칼렛이 능숙하게 슈테파니를 비롯한 어린 공녀들과의 대화를 이끄는 걸 감상하고 있을 때.
저기 좀 보세요.
맙소사.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던 영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을 향했다.
홍조를 띤 낯으로 후원의 입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
“어머, 전하의 검은 신사님께서 오셨네요.”
스칼렛이 부채를 살랑거리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울렸다.
오늘 내내 진중하게 굴더니, 나를 놀릴 기회만은 도저히 놓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루시페우스는 다과회에 참석할 의사가 없음을 피력하듯 후원의 입구에서 시종들에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어제 루시페우스와 단둘이 있는 모습을 계속 보인 탓일까, 다과회에 참석한 영애들 모두가 반짝반짝한 눈망울을 빛내고 있었다.
‘이맘때엔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을 테니까….’
나는 그런 분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체하며 헨리에테에게 확인해 보라고 턱짓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도 많았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스칼렛이니, 굳이 그와의 관계를 과시할 필요는 없고. 어수선한 티를 낼 상황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찻잔에 입을 묻을 때였다.
“전하.”
루시페우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온 헨리에테가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에게 귀를 내주었다.
“마을의 위치를 확인하셨다고 합니다. 그쪽에 협조하는 마검사들의 정보도 대강 파악하셔서, 바로 마검사들과 출발하실 예정이라고….”
“뭐? 안 돼!”
나는 상황도 잊고 새된 목소리를 내며 루시페우스 쪽을 쳐다보았다. 정작 그는 태연하였으나….
어머, 어머.
혹시 사랑싸움…?
다과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바빠졌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 전혀 고려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눈빛을 못 본 체하며 헨리에테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새로 들어온 보고는 없지?”
“네, 아직….”
헨리에테가 빤히 계속 여기 있었음에도 그리 다그칠 정도로 마음이 초조해졌다.
“급한 일이세요?”
그때,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단순히 전하를 뵈러 오신 건 아닌가 보죠?”
스칼렛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서 물어오기에 나는 나지막이 대꾸했다.
“용건 없으면 안 왔지.”
“왜요, 용건 없어도 연심이 불타서 오셨을 수도 있죠. 어제부로 공개 연애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건….”
널 위해서 윌로우 놈 자극하려고 한 일이잖아, 몰라? 내가 단호하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여 무언의 메시지를 보낼 무렵.
“얼른 가보셔야 하는 거죠? 이 자리는 제가 책임지고 마무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 말하며 내리깐 스칼렛의 호박색 눈동자가 부채 너머로 후원의 전경을 한 바퀴 훑었다. 참석자의 면면을 되새기며 이 자리를 어떻게 꾸릴지 가늠하는 기색이었다.
“…괜찮겠어?”
“프리지어궁에 저보다 더 많이 온 레이디도 없을 거고. 어차피 이 자리는 저를 주인공으로 세워주시기 위한 거고. 헤르미아나 전하와 에슈바이크 소공녀가 계시니 황실 뒷배도 충분하고. 전하께선 안 계셔도 돼요.”
“좋은 계산인데, 토사구팽당하는 기분인걸?”
“프리지어궁 후원을 내주신 것으로도 충분하단 소리죠. 어제 귀족파 쪽에 사달이 났고, 이쪽을 위해 증언한 루시페우스 경이 급한 일로 오셨으니 손님들도 관련된 문제겠거니 할 거예요.”
저 초롱초롱한 눈빛 너머로 무슨 사고가 터졌음을 짐작할 테니 제게도 호재라는 소리였다. 스칼렛의 야무진 상황 판단에 나는 흐뭇함을 느끼며, 고마움을 담아 그녀의 손을 한번 꼭 쥐었다.
“헤니.”
“네, 이모님.”
“전략실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 남은 시간은 네가 책임져줄래?”
“어머, 물론이죠.”
말은 그리 했지만 미성년인 헤르미아나가 성인이 대다수인 이 자리를 통솔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황실 직계가 엄연히 자리해 있는데 외부인인 스칼렛에게 뒤를 맡기는 게 보기 좋진 않을 테니까.
‘이것만으로도 리피샤 같은 애들이 신나서 스칼렛의 영향력을 노래할 테고.’
이 자리의 의미를 꿰뚫고 있는 헤르미아나는 눈치 좋게 스칼렛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레이디 스칼렛, 괜찮다면 나를 도와주지 않겠어? 나보다야 영애가 프리지어궁에 더 자주 와봤을 테니까.”
“영광입니다, 1황손 전하.”
스칼렛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꾸벅여 인사하였다.
“모르는 거 있으면 저기 내 시녀들도 남아 있으니까.”
나는 후원 곳곳에 포진해 있는 아네트와 메리제인, 패티샤 등을 눈짓했다.
“저, 손님 여러분?”
대충 이야기가 정리되자, 스칼렛이 낭랑하게 목소리를 울려 참석객들의 주의를 끌었다.
“4황녀 전하께서 정무 일로 바쁘셔서 먼저 일어나셔야 할 것 같다시네요. 뭐, 장밋빛 기류도 아주 틀린 짐작은 아니지만.”
“응, 오늘 와줘서 모두들 고마워요.”
나는 느물거리는 스칼렛을 작게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전략실 일이 요즘 바빠서 말이죠. 어제에 이어 오늘도, 레이디 스칼렛과 즐거운 시간 보내기를 바라요.”
전략실 일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스칼렛을 주인공인 것처럼 지칭하기까지…. 내 말이 전반적으로 의미심장하여, 이를 곱씹느라 참석객 모두의 낯이 잠시간 멎었다.
“자, 그럼. 1황손 전하께서 상석을 채워 주시겠어요?”
그리고 그들이 깊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스칼렛의 진행.
“제가 오늘을 위해 글렌치아 상단을 졸라 특별히 구한 남대륙산 차를 소개하도록 할게요. 혹시 이 자리를 좀 더 즐기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칼미르 공작가에서 선물해주신 칼미르령 사과주도 있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스칼렛의 이미지는 완벽히 갱신될 거였다.
몇 년간 사교계에서 군림해온 레이디 스칼렛이 아니라, 황실과 명문가들의 지지에 힘입어 게이블스라는 유력 가문의 가주가 될 한 사람의 게이블스로서.
‘이쪽 일은, 정말로 내 손을 다 떠난 거야.’
이제는, 다른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
나는 재빨리 후원을 빠져나가 루시페우스에게로 향했다.
우리를 살피기 위한 시선들이 따라붙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장면은 보여줄 수 없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나는 담백하게 루시페우스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후원을 빠져나가며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경, 혼자 움직이지 마. 같이 해.”
“그게 훨씬 효율적입니다. 마검사들도 함께하고요.”
“아냐, 그러지 마.”
프리지어궁으로 향하는 길목, 나는 내 손을 올려두었던 그의 손을 양손으로 꼭 쥐며 그를 멈춰 세웠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였다.
“같이 확인하자. 함께하면 더 빠를 거야.”
“너무 위험합니다. 그리고 그건, 제게서 시작된 일이니….”
그리 얼버무리는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슬며시 뒤쪽으로 흘렀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헨리에테도 덩달아 멈춰 서 있던 차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비밀과 연관된 이야기여서겠지.
나는 그의 손을 흔들어 내게로 시선을 끌어왔다.
“그 마을의 일은 정말로 내 기사들의 몫이야. 이제 와서 경에게만 맡길 순 없어. 하물며 아무리 경에게 호의적이라지만 서대륙 마검사들의 뭘 믿고?”
“하지만, 전하.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는 일 아닙니까.”
효율만 놓고 따지면 루시페우스의 말은 참이었다. 그가 혼자 움직여서 후작 패거리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거야 일도 아닐 거였고. 하지만….
‘루시페우스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죽을 수도 있는걸.’
‘공제눈’이 아무리 엉터리 이야기라지만, 특히 루시페우스의 최후에 대해 그릇되게 그렸다지만… 나는 그걸 아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제외한 것들은 모두 사실대로 적혀 있었으니까. 루시페우스의 일도, 몇 가지 비밀을 제외하면 사실에 가까웠으니까.
‘게다가 실제로는 후작의 손에 죽었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의 손을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명분을 만드는 건, 내가 세실 평생 해온 일이었다.
“그들이 지금 꾀하고 있는 건 대륙급의 중범죄야.”
“일이 일어나기 전에 흉수들만 제가 처리하면 됩니다. 그럼 모두 안전한걸요.”
“물론 경이 복수하고 싶은 마음 잘 알아. 사적 복수가 더 통쾌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건 대륙의 안보가 걸린 문제야. 황실 차원에서 엄중히 다뤄야 할 사안이라고.”
“…….”
그에 반박할 수 없는 루시페우스의 낯에 은은한 괴로움이 깃들었다.
그는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길 바랐다. 그것이 직접 후작을 처단하고 싶다거나 정말로 효율을 따지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서로가 잘 알았다.
내가 어떻게든 그 일에 힘을 쏟는 걸 원하지 않아서.
내가 위험해지지 않길 바라서.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나는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을 빚어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이 복수할 수 있으면 좋겠어.”
“말씀드렸잖습니까. 복수심은 제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내가 그걸 원해. 경이 뺏겼던 걸 보란 듯이 모두 되찾는 것.”
“…….”
루시페우스가 입매가 빳빳하게 굳었다. 상황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성기사단을 동원할 거야.”
“네?”
“후작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여는 건 성기사단을 공격하기 위해서잖아.”
나는 루시페우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균열을 인위적으로 확장해 격랑을 일으키는 건, 그의 이전 생에나 지금이나 성기사단을 겨냥한 함정이었다. 교단과도 연계된 성기사단은 황실과 황실파의 무력이나 마찬가지니까.
어차피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 민가라곤 빨간 눈의 마을뿐, 격랑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그들의 목적일 리 없었다.
“…그렇죠. 성기사단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군요.”
루시페우스가 빈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당혹스러운 낯을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또한 지금의 상황에 당황해서, 차분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모든 건 그의 손에서 시작된 일이고, 한편으로는 그 일로 인해 내가 혼란스러워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어제는 루시페우스가 나를 진정시켜 줬으니까….’
오늘은 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