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90화 (190/220)

190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4)

내 수하도 아니면서 내 일을 하나라도 더 도우려 애쓰는 게 미안해서, 나는 자꾸만 루시페우스를 만류하게 되었다.

“괜찮습니다.”

그의 단단한 손끝이 내 관자놀이 근처를 맴돌며 머리칼을 지분거렸다.

“전하께서 오늘 많이 무리하셨고, 내일도 바쁘시지 않습니까.”

“경도 마검사들 만나러 가야 하잖아.”

“저야 튼튼하니까요.”

“괜찮다면 막심 경을 붙여줄까? 그럼 좀 더 빨리 끝나지 않을까…?”

아무리 그들이 호의적이고 제국어를 알아듣는다지만, 통역이 있다면 더 편할 테니….

“안 괜찮습니다.”

루시페우스의 말소리가 사뭇 단호했다.

역시 막심이 아직도 불편하군…? 그리 생각하며 눈동자를 데로록 굴리자니, 루시페우스의 낯에 난처한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손끝으로 내 미간을 꾹꾹 문지르며 말했다.

“전하께서 절 신경 써주신다는 기쁨만 받겠습니다. 소통하는 데 큰 지장도 없고, 무엇보다 그 영식이 마법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 그로서도 고생일 테고요.”

“그래?”

하긴, 그 이후로도 이따금 루시페우스가 단독으로 그들을 만났으니 괜찮을까?

“오늘 전하께서 큰 상을 내려 주셨으니, 지금으로서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상?”

“제가 감히 전하의 첫 춤을 얻었지 않습니까.”

“‘감히’, 그런 말은 하지 말고.”

“언감생심, 전하와 그리도 가까움을 만천하에 보일 수 있는 영광을 얻은걸요.”

하여간…. 나는 그의 단어 선택이 번번이 간지러워서 쿡쿡 웃었다.

“그리고….”

그리 중얼거리며 루시페우스의 손이 이불 위에 올려두었던 내 손을 찾아 쥐었다.

체한 사람 손을 주무르듯 양손으로 쥐고서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손바닥을 문질렀다.

정무 회의 때 내가 피를 내기 위해 베었던 곳이었다. 레베카가 치유해줘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그 상흔이 보이기라도 하는 양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금이 진 곳을 따라 몇 번이고 그의 눅진한 손길이 이어졌다. 혹여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상처가 남았을까 확인하듯 꼼꼼하게도….

“제가 시작한 일이니, 제가 매듭짓는 게 맞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내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짧게 웃는 루시페우스의 낯이 아파 보였다.

“우선은, 푹 쉬세요.”

“응, 경도.”

그의 손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더니, 시야가 부예졌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소리가 의식 너머로 가물가물했다.

기다릴게. 그런 대답이 입 안에서 맴돌다가 스러졌다.

‘아녜스 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전 성소의 후미진 곳에 자리한 작은 기도실.

며칠 전 비밀리에 대신전으로 옮겨 온 킬리온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제단 위 신상 뒤편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햇볕이 은은하게 쏟아져 내렸다. 오색의 빛 그림자가 눈물로 범벅된 킬리온의 낯에 드리웠다.

‘제가 삿된 마음으로 감히 귀의의 뜻을 입에 올렸고, 결국에는 속세와 연을 끊지 못해서….’

시작은 정말 사소했다.

제 아들, 도미닉이 그처럼 마력을 쓰게 도와달라는 것.

그게 마력을 봉인하고 사제가 된 그에게 할 만한 부탁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다음은 신전에 있는 출생 기록부에서 알비누스의 방계의 목록을 달라는 거였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그의 비밀을 갖고 협박하니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은 가족의 신변이, 나아가 빨간 눈의 마을의 생계가 볼모로 잡혔다.

그렇게 이복동생의 협박은 점차 흉악해져만 갔다.

“막내 황녀가 마침 도미닉 녀석과 여섯 살밖에 차이 나지 않으니, 이야기를 잘 맞춰보면 좋을 것 같은데….”

“성녀를 모시고 싶다고 했잖아. 그 남편이란 작자만 없으면 다시 귀의하시지 않겠어?”

그가 성녀를 가까이서 모시고 싶은 거야 틀림이 없었다.

어린 시절, 묵묵히 마을을 위해 봉사하던 소년을 처음으로 알아주신 분이었으니까.

“네가 이렇게 넓은 밭을 매일같이 정화한다고? 정말 대단하구나.”

신성력이 가장 많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신성력을 쪽쪽 소진하던 소년에게, 그 인정의 한마디는 구원이었다.

성녀를 따라 귀의하게 된 건 소년의 운명과도 같았다. 마을의 배신자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시기가 엇갈려 성녀님을 직접 모시지는 못했지만, 교단의 행사 때면 뵐 수 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그러니 누군가의 목숨을 앗으면서까지 성녀의 곁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형님이 마을을 버린 바람에 내가 식량을 대신 대주고 있잖아. 그게 얼마나 손핸데. 그걸 메우려면 이 일을 꼭 성사해야만 해.”

성녀의 남편에게 죄가 있다고 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황실의 비밀을 빼돌렸다는 죄책감과 계속되는 협박에 시달리던 킬리온은 제 이복동생이 시킨 게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상자에 든 찻잎은 일반인 수준의 신성력을 앗는 것이라 성녀에겐 아무 피해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 상자가 찻잎을 담은 것치고는 자못 무거웠다는 것을, 킬리온은 성녀의 비보를 전해 듣고서야 떠올렸다.

“어머, 뭘 이런 걸 다 준비했니. 고마워라.”

고마워라.

그것이 그가 들은 성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아녜스 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교단에 들어오고, 두 신께 몸을 바쳤다는 허울 좋은 핑계 때문에 죽음으로 사죄하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그의 광인 행세는 일종의 속죄였다.

‘저 같은 건 애초에 두 신의 종이 될 자격이 없었던 거지요….’

제단에 올려둔 채 맞잡은 손 위로 그의 이마가 내려앉았다. 돌로 된 제단의 표면에 그의 눈물이 방울졌다.

흑, 흐흑…. 감히 소리 높이지 못하는 흐느낌이 이어질 때.

똑똑똑.

무신경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여기 계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킬리온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대화 소리가 문지방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이 기운은.’

킬리온이 몇 주 전 수도원을 다녀간 에리나의 아들을 떠올리며 허겁지겁 안경을 쓰던 그때.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그 청년이 기도실 안으로 들어왔다.

성인 남성 두엇이 눕기도 빠듯하리만치 좁은 기도실. 등 뒤로 문을 닫은 청년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킬리온과 마주 보았다.

킬리온은 눈물 번진 낯으로 그가 하는 양을 멀거니 보았다.

“그간 잘 지내셨지요.”

“…….”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나, 나, 나는….”

“레베카 전하께 다 들었습니다.”

청년의 나직한 말소리에 킬리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진짜 미친 게 아님을 안다는 소리였다.

교황급의 신성력을 가진 레베카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대신전으로 옮겨온 날, 레베카가 저를 물끄러미 살피던 것을 떠올리며 킬리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눈물에 젖은 손을 옷자락에 닦을 무렵.

“백부님께서 출생하신 마을에 대해 들었습니다.”

킬리온의 손이 우뚝 멎었다.

청년, 루시페우스는 고요히 제 안경을 벗었다. 그의 것과 닮은 붉은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저는 저 같은 자가 또 있다는 걸, 백부님의 사정을 알기 전까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백부는 무슨….”

그들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이이니 루시페우스의 단어 선택은 그릇되었다.

하지만 그가 저를 그리 부르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건 청년에겐 그레고르가 양부였고, 그에겐 다른 혈육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빨간 눈을 숨기고 살아가는 삶은 당사자만이 이해할 수 있으니까.

킬리온 또한, 귀의하여 사제가 된 이후로 빨간 눈을 마주한 것이 거의 40년 만에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레고르가 마을 주민들을 납치했습니다.”

“뭐…?”

킬리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돌아오는 그믐날에 작은 달도 그믐이 되지요. 그때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인위적으로 개방하여 격랑을 일으킬 계획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냐…?”

“…가능합니다.”

루시페우스의 낯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킬리온은 그것이 그저 그 사악한 음모에 대한 착잡함이라고 생각했다. 이전 생에서 루시페우스가 그 일을 기어코 성공했기 때문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원래는 저와 하려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갈라서면서 제 마력을 쓸 수 없게 되자 마을 주민들을 제물로 삼을 요량인 듯합니다.”

킬리온의 동공이 잔뜩 수축한 채 얼어붙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지만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 동생과 조카들, 그리고 유년 시절을 함께한 빨간 눈의 벗들…. 밭뙈기를 정화하던 제가 도망치는 바람에 식량을 바깥에서 구해 오느라 굶주림에 익숙해진 마을 사람들.

킬리온이 끝끝내 그레고르의 협박에 굴복했던 유일한 이유….

‘삼백도 넘는 목숨인데. 그 녀석에겐 그게 그렇게 쉬운 건가….’

한편으로는 청년이 지닌 마력을 생각하면 마을 사람들 전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황망함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눈동자를 올바로 마주하며, 붉은 눈의 청년이 말했다.

“한시가 급합니다. 마을의 위치를 알려 주십시오.”

킬리온의 눈시울에는 눈물이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프리지어궁의 후원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가득한 건 처음이네요. 이게 다, 레이디 스칼렛의 영향력이겠지요?”

자칭 스칼렛 오른팔 리피샤 쿠첼의 말소리가 은근하게 울렸다.

그 아버지 쿠첼 백작이 귀족파의 주류가 아닌 덕에 그녀는 마음 편히 스칼렛의 추종자 행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제 영향력이기는요? 아름다운 가을날의 풍경을 모두와 나누고 싶으신 4황녀 전하의 은덕이지요.”

“하지만 이 특별한 날의 참석객 면면을 보세요.”

그리 말하며 리피샤가 반대편 테이블을 눈짓했다.

그레이스의 딸인 1황손 헤르미아나와 나의 오촌 조카 에슈바이크 소공녀 슈테파니를 비롯해 지방 대귀족의 공녀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그들뿐 아니라 황성에 체류 중인 온 가문에 초대장을 돌린 탓에, 오늘 다과회는 후원 곳곳에 테이블을 놓아야만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슈테파니. 레이디 스칼렛과는 인사를 나눴니?”

“아, 아뇨, 전하. 아직….”

내 질문에 갈색 머리칼 아래로 내 어머니와 같은 녹색 눈동자를 빛내는 소녀가 낯을 붉혔다. 열다섯의 슈테파니는 무려 황후의 종손녀이자 에슈바이크 공작의 손녀라는 이름값에도 불구하고 수줍게만 굴었다.

“레이디 스칼렛.”

내가 옆 테이블에 자리한 스칼렛에게 손짓했다.

“내 조카가 영애에게 인사하고 싶다는데.”

“어머, 영광입니다. 어제 연회 때 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저희 가족의 불민한 사정 때문에….”

그리 말하며 스칼렛이 눈썹을 한껏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 낯에 안타까움이란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제 윌로우 놈이 한심한 짓거리를 했고, 그걸 수습하느라 제가 일찍 퇴장했음을 피력하는 거였다.

어머, 그러셨죠.

어제 일찍 귀가하셔서 아쉬웠어요.

스칼렛의 의도를 파악한 추종자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오늘 초대받은 모두가 이 자리의 의미를 알았다.

어제 게이블스 부자의 허물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남은 유일한 게이블스로서 스칼렛이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뒷배가, 바로 나.

그러잖았다면 스칼렛이 주목받기를 기다린 것처럼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으리라.

아무래도 이리될 줄 아셨던 것 같죠?

초대장이야 진즉에 돌렸다지만….

그러고 보면 두 분의 우정이 벌써….

놀라워하는 참석객들의 시선에 깃든 건 호의였다. 게이블스 후작의 직무가 정지된 상황에서 앞으로 게이블스를 이끌 확률이 가장 큰 스칼렛에게 밉보이고픈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 모든 흐름의 정점에서, 평생 사교계에 군림한 스칼렛은 절대로 들뜨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고전미 넘치는 드레스를 선택함으로써 기품과 신뢰도를 가미했고, 제게 이득이 될 가문의 영애들과는 한 번이라도 더 눈을 마주쳤다.

높은 가을 하늘, 단풍이 들기 시작한 프리지어궁의 후원, 모두가 미소를 띤 훈훈한 분위기, 이곳이 자신의 무대임을 확신하는 낯으로 사람들의 동경을 사고 있는 스칼렛.

나는 그 완벽한 풍경을 바라보며…

‘지금껏 아무런 보고가 없는 걸 보니, 알비누스 부자가 황성을 빠져나간 모양이지.’

내색할 수 없는 나만의 고민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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