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88화 (188/220)

188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2)

루시페우스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안으며, 다른 손으로 내 입가를 맴돌던 손을 쥐어 제 쪽으로 당겼다. 손톱이 잔뜩 물어뜯겨 있었다.

세실리아의 버릇이 아닌, ‘내’ 버릇.

유스티안이 실종됐을 때 이후로 처음 튀어나온 거였다.

“아,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아.”

“네?”

“이건… 내가 빨간 눈의 마을에 관한 걸 들쑤셨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나는 자책하고 있었다.

“왜 그런 말씀을….”

루시페우스의 손이 단단하게도 내 손을 감쌌다.

“내가, 내가 괜한 짓을 해서…. 유시 때도 그랬고.”

“전하.”

“사냥 대회도, 원래 내가 갈 게 아니었는데. 응. 아니었잖아, 그치?”

나는 눈동자를 한곳에 두지 못한 채, 쩔쩔매며 중얼거렸다.

이 바보 같은 말소리가 무슨 뜻인지 루시페우스가 아는 덕분일까, 나는 조금도 걸러내지 못한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그때도, 원래대로 그레이스 언니가 갔으면 유시가 다칠 일도 없었는데 말이야. 이번에도 괜히 내가 그 마을에 대해 찾아보라고 시켜서….”

“전하.”

“나 때문에, 내가 괜한 짓을 해서 다들 잘못되는 거잖아….”

“전하!”

루시페우스가 정신 차리라는 듯 내 어깨를 꾹 쥐었다. 평소 내게 기대더라도 힘 한번 싣지 않던 걸 생각하면 꽤나 긴박한 동작이었다.

“전하. ‘원래’라는 건 없습니다.”

“아냐, 그, 원작… 아니, 경도 알잖아. 경이 살았던 그 생….”

“전하.”

루시페우스가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 시야가 그의 낯으로 가득 차자 그제야 황망히도 굴러가던 눈동자를 그나마 진정할 수 있었다.

“그건 이제 없는 일입니다.”

“아니, 그게….”

“그건 어떤 기준도 되지 못해요. 이미 사라진 시간입니다.”

“사라지다니, 그건….”

그건, 내 머릿속에 그렇게 단단히 새겨져 있는데….

너무 혼란스러워서일까? 나는 루시페우스가 하는 말의 의도를 쉽사리 파악하지 못했다.

“다들 잘못되다니요.”

“안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데?”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고요. 제가 도울 테고, 전하의 기사들은 또 얼마나 유능합니까.”

“뭔가, 뭔가 잘못된 것 같아.”

혼란스레 눈동자를 굴리며 나는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루시페우스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아뇨, 전하.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아냐, 그게.”

“지금 막 들어온 보고고, 그러니 지금부터 살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고 기사들도 부르셨고요. 또 그 기사 나름대로 열심히 추적 중일 겁니다.”

“근데, 아무래도 이건….”

“전하.”

루시페우스가 채근하듯 내 양어깨를 짧게 흔들었다. 자꾸만 달아나는 내 시선을 붙잡으려는 듯,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더욱 깊이 숙이면서였다.

“전하께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으셔서 이 세상이 잘못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아냐, 그게….”

너무도 달라져 버렸는데. 나도, 내 주변인들도, 무엇보다 너도….

그러니까 이건 다 내 탓인데.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그때보다 지금이 어떻게든 더 낫고요.”

나직나직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단호하게 울렸다.

“또 제가 그 시간이 사라지길 바랐으며.”

바랐…다고…?

나는 비로소 그의 낯에 시선을 던졌다. 그제야 정신이 든 것처럼….

안경 너머 그의 눈동자가 깊은 열기를 띠고 있었다.

“전하께서 존재하심으로써… 제가, 저란 사람이 송두리째 바뀌었는데.”

“…….”

“제가 더 이상 죽음을 바라지 않고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라는데.”

“…경.”

“이런 건 전하께 별것 아닙니까.”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의 말소리가 너무도 절박하게 울려, 나는 물씬 솟아오른 당황스러움에 제대로 말을 맺지 못했다.

더 이상 뭐라 주절대지 못하고, 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루시페우스의 낯을 멀거니 쳐다보니… 그의 미간이 진중함을 내색하듯 얕게 주름져 있었다.

“이런 제가, 전하의 곁에 있지 않습니까.”

내 어깨를 쥐었던 손이 스르르 미끄러졌다가, 다시금 내 손을 쥐어 올렸다. 손톱 몇 개가 너덜너덜해진 쪽이었다.

그걸 보는 루시페우스의 낯이 고통으로 흐무러졌다. 마치 자신의 상처를 보는 것처럼….

“그러니 이런 건, 제발….”

그 손끝을 감싸듯 그의 손이 말려들더니… 언젠가처럼 그의 입술이 제 손의 접힌 부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 틈을 통해 숨을 불어넣는 듯도, 입맞춤인 듯도 한 그 경건함이 얼마간 흘렀을 때.

똑똑똑.

비상소집인 만큼, 허락의 말이 없었는데도 문이 벌컥 열렸다. 세 소대장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가 루시페우스와 붙어 있는 걸 보고도 모두들 별 반응이 없었다.

“왔어? 우선 다들 앉아봐.”

나 또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들을 맞이했다. 당황할 겨를조차 없었다는 게 맞을 거였다.

조금 전까지 루시페우스 앞에서 한껏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을 감추느라 바빴으니까.

내 수하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세르니타 때의 일로 족했다.

한편으로는, 루시페우스 덕분에 그 짤막한 순간에 진정할 수 있었다.

자리를 권하며 내뻗는 손끝에는 조금 전까지 너덜너덜했던 손톱이 매끈한 호선을 회복해 있었다.

“경들을 부른 이유는… 리나 경에게서 전보가 왔는데. 그게….”

리나의 이름이 불리자 세 기사의 낯이 밝아졌던 것도 잠시. 그들의 눈동자가 슬며시 나와 헨리에테를 훑었다.

둘 다 만찬연을 위해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 그대로였다.

굳이 이 시간에 저들을 부른 것이 예사로운 사안 때문은 아닐 터. 세 소대장의 낯이 다시금 심각해졌다.

“…헨리에테 경.”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더 빠를 거였다. 내 손짓에, 끝자리에서 관련 서류를 정리하던 헨리에테가 세 소대장 중 가장 가까이 자리한 알렉스에게 리나의 전보를 건넸다.

알렉스가 숨 집어삼키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엘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보를 읽은 케인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건….”

“좋은 상황은 아니겠지.”

내 단정에 숙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알비누스 동태는 어때?”

“아….”

내 물음에, 케인이 적잖이 당황한 낯이었다.

빨간 눈의 마을 주민들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에 뒤이어 알비누스를 묻는다는 건….

“후작의 이복형인 신관이 빨간 눈의 마을 출신이었잖아.”

케인을 바라보며 말했기에 그 맞은편에 앉은 루시페우스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또한 잔뜩 놀란 것이 느껴졌다.

“후작은 분명 그 마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어.”

그리고, 루시페우스에게는 말해주지 않았을 거였다. 킬리온이 빨간 눈이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듯이.

“제 친부가 생전에 그곳에서 살았으니,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했을 거야.”

“하지만, 당시 리나 경의 진술에 의하면 마을은 꽤나 궁핍하다고….”

헨리에테가 속기록을 뒤적이며 대꾸했다. 빨간 눈의 마을을 발견하고서 귀환한 리나가 내게 보고한 내용을 기록한 거였다.

“풍족하게 해주면 그게 목줄이 아니지. 이따금 숨통 간신히 트일 만큼만 적선해줘야 그게 아쉬울 테니까.”

내 냉소적인 말에 다시금 적막이 내려앉았다.

후작이 자신의 비밀을 아는 자들에게 온정을 베풀 인물이 못 된다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았던 것이다.

케인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정무 회의가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귀가했지만, 그땐 이미 황실 근위대가 출동하여 집무실의 서류들을 압수 수색 중이었습니다. 소후작이 곧바로 상단으로 가는 낌새더군요.”

알렉스가 말을 받았다.

“소후작이 상단에 도착했을 땐, 역시 황실 기사단 별동대가 이미 도착한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상단 사무실의 서류란 서류는 다 압수되었어요.”

“오전에 지시한 건?”

“그게, 세르니타에 나타났던 마검사의 수와 루시페우스 경께서 감시하시던 저택에 머무르는 마검사의 수가 맞지 않기는 합니다.”

역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낭패감이 깃든 낯으로 루시페우스가 읊조렸다.

“파벌이 갈려 있다더니, 애초부터 따로 행동한 모양이군요.”

“경을 믿지 못하니까. 이렇게 될 경우를 대비한 보험인 모양이고.”

“…애초부터 배신할 생각이기야 했습니다만.”

“애초부터, 후작 또한 믿지 않은 거겠지.”

루시페우스의 콧가에 짧은 웃음이 스쳤다. 그것이 자조든 냉소든… 후작을 믿었던 지난 생에 대한 연민이 깃들었을 거였다.

알렉스가 보고를 이었다.

“다섯 정도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던데, 그들의 소재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고요. 다만, 상단 지하 창고에서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알렉스가 품의 주머니에서 엄지손톱 크기의 보석을 꺼내 보였다. 보석은 보석인데, 그 가운데 기묘한 색의 빛이 일렁이는 것이….

“제게 좀.”

알렉스가 가타부타 대꾸도 하기 전에, 루시페우스가 마법으로 알렉스의 손에서 그 보석을 가져갔다.

투명한 보석 안에는 청록빛과 핏빛이 섞인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거, 수정이야?”

“…예.”

그리 대꾸하는 루시페우스의 목소리에 진득한 낭패감이 배어 있었다.

“혹시 그 안에 깃든 게….”

“마기는 아닙니다.”

루시페우스가 단언했다. 그 말에, 귀족파의 계획에 따라 수정이 마기에 잠식되고 있다는 걸 들은 바 있는 세 소대장이 눈동자를 흠칫 떨었다.

“이건, 일종의 마력입니다. 한데….”

그 수정을 샅샅이 탐색하려는 듯, 루시페우스는 숫제 장갑까지 벗고서 거기에 제 기운을 흘려 넣었다.

“일반적인 마력이 아닙니다. 소후작이 전하께 드렸던 마도 기계에서처럼… 신성력을 변환해서 만든 마력인 듯하군요.”

“그렇다면….”

“마도 기계를 이용해 인위적인 마력을 만들어 부여했거나, 이 수정이 일종의 마력석 역할을 한 거겠죠. 하지만.”

루시페우스가 침통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왠지,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서 숙성 중인 것들과 유사한 기질을 띤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에 케인과 알렉스가 놀란 티를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놀랐지만 구태여 내색하지 않았다. 알비누스에서 일어난 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며 루시페우스가 자책할까 봐서.

루시페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마을 주민의 수효가 어찌 됩니까.”

“백 호가량 된다고 합니다.”

헨리에테가 속기록을 확인하며 답했다.

“백 호라면….”

“환경이 그래서인지 가구당 인원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해요. 마을 인구수는 최대 사백 명 정도….”

노동력이 자산인 평민들은 자식을 네댓씩 낳곤 하지만, 워낙에 마기가 강한 곳이라 그게 여의치 못한 모양이었다.

“사백, 사백이라….”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루시페우스의 미간에 주름이 얕게 패었다. 그런 그의 낯은 점차 괴로움으로 물들어갔다.

“아마, 그들을 쓰려나 봅니다.”

“쓰다…니?”

“그들이 신성력을 계발하기 위해 마력을 억눌렀대도 타고난 마력의 크기는 평균 이상이겠지요.”

“…그렇겠지만….”

설마.

루시페우스가 말하려는 것이 짐작만으로도 섬뜩하여 나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루시페우스는 참담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네. 그들의 마력을 억지로 발현시켜서… 술식에 활용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위적인 격랑을… 어떻게든 일으키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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