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87화 (187/220)

187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1)

도미닉 알비누스는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제 이름이 ‘모자란 것’인 줄 알고 자랐다.

“그 후진 데까지 가서 너를 배어 왔는데 고작 이 정도라니, 모자란 것!”

그의 아버지 그레고르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혈안인 사람이었다.

알비누스의 혈통도, 제 이복형이 가진 능력도.

알비누스의 혈통이야 표면상 그의 것이 된 지 오래였다. 진짜 알비누스인 에리나가 성기사단에 들어간 덕에 더더욱 수월했다.

그 비밀을 만든 어머니는 작고한 지 오래. 친부와 이복형만 입막음하면 세상에 그가 알비누스가 아닌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이복형이 빨간 눈인 덕에 그쪽은 잘 풀렸다.

그러고 나니 그 능력이 탐났다.

누구에게나 있는 신성력이 아니라, 그 징그러운 이복형이 이따금 보이던 신비한 능력.

이복형의 고향에서 나는 아이들이 대부분 빨간 눈을 타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레고르는 그 신비에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야 이미 평범하게 태어났지만, 제 자식에게는 그 힘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대가로 빨간 눈을 타고난다면, 이복형처럼 가리고 살게 하면 되었다.

그는 우선 몰락 귀족가에서 알비누스 후작 부인 자리를 채울 영애를 사 왔다.

후작가 정도의 고위 귀족이라면 정략혼을 통해 세를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레고르는 그런 뒷배가 필요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조금 앞당겨 20대 초반의 나이에 가주가 된 그레고르는, 귀족이라면 하지 않을 일에 손을 대서 돈을 크게 벌고 있었으니까.

혈통마저 눈속임한 그는 귀족의 법도며 자존심이란 게 무용함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고서 그는 부인과 함께 빨간 눈의 마을로 갔다. 마력을 타고난 자식을 얻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부인은 빨간 눈이 득시글한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충격으로 앓아누웠고, 결국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죽고 말았다.

다른 몰락 귀족가에서 사 온 두 번째 부인도 비슷했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한 건 아니었지만, 여하간 시름시름 앓다가 임신한 채로 죽었다.

그것이 그 마을에서 지내기에는 그녀들의 신성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임을, 그레고르는 미처 몰랐다.

그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세 번째 부인을 맞아들였다. 신붓감을 사 오며 지불한 거액 덕에 그가 아내 잡아먹는 자라는 소문은 나지 않았지만, 이도 못해 먹을 짓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어쨌건 그는 결혼생활에 있어 매번 나름의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리고 세 번째 부인도 마을의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홧김에, 그는 빨간 눈의 여자에게서 자식을 보았다.

그게 도미닉이었다.

이전부터 이복형과 친부를 압박하기 위해 마을의 돈줄을 쥐고 흔든 만큼, 아이를 셋째 부인이 낳고 죽은 자식으로 꾸며 데려오는 건 손쉬웠다.

다만 아이는 빨간 눈이 아니었고, 타고난 마력도 변변찮았다.

그레고르는 좌절했다.

“모자란 것!”

매일같이 아버지의 타박을 받는 아이에게는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다.

마침 적당한 대상도 있었다.

얼마 전 고모의 아들이라며 아버지가 떠맡게 된 빨간 눈의 아기.

끼니를 걸러도 울지 않는 작고 초라한 아기는 여덟 살의 도미닉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너 같은 게 뭐나 된다고!”

도미닉은 제 아버지가 저를 모자라다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혈통 문제도, 제 출생의 비밀도 몰랐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이 아이의 빨간 눈동자를 볼 때면 저를 볼 때와 현격히 다른 빛을 띤다는 것은 알았다.

여덟 살배기의 눈에도 선명히 보이는 이글이글한 욕망.

그리하여 아기는 도미닉의 분풀이 대상이 되었다.

아기의 재능을 탐하는 것과 별개로 아버지는 아기를 천대했고, 그래서 아기는 도미닉에게 ‘그래도 되는’ 존재였다.

한데 어째서인지 아버지도 저도 아기에게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은 날이면 아기 근처에 물건을 던져 놀라게 하고 욕설을 내뱉을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런다고 해서 그 아기가 엉엉 울거나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소년은 차츰 더 악에 받쳤고, 한편으로는 저보다 한참 어린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죄책감에 대해 면죄부를 받은 양 더욱 집요하게 아기를 괴롭혔다.

그러던 중에 도미닉은 아기의 빨간 눈이 세간에서는 악마의 눈동자라 불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악마 새끼보단 모자란 것이 나았다. 그래도 저는 아버지가 멀끔하게 꾸며서 저택 밖에도 데리고 다녀 주었으니까.

하지만 한번 모자란 것은 평생 모자란 것이었다.

악마 새끼는 하인들이 문자를 가르쳐준 것만으로도 제가 읽고 버린 책을 술술 읽어나갔다. 동화로 된 역사책이나 초급 산수학, 어린이 예법서 등을 뗀 것은 도미닉보다 훨씬 빨랐다.

악마 새끼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흡족해했다. 아이의 빨간 눈을 볼 때와 같은 눈빛을 띠었으니까.

일곱 살이나 터울이 지는 아이에게 도미닉은 더욱 깊은 열등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하여 도미닉은 저만의 방법으로 아버지의 눈에 들기로 했다. 윌로우 게이블스를 비롯한 귀족파 소년들의 무리에 끼려고 애쓴 것이다.

녀석들이 저를 졸부 가문의 등신이라고 비웃는 걸 다 참아가면서.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세계가 뒤바뀌었다.

“네가 아비를 잘 만난 덕에 너처럼 모자란 것도 부마가 될 수 있겠구나.”

아버지에게 늘 굽신거리던 신관이 뭔가를 귀띔해준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모자란 아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황실과 피를 섞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건 제 핏줄이어야 했으니까.

“어차피 4황녀가 성인이 되려면 한참 남았으니, 그때까지 사람 구실 좀 하거라.”

그렇게 서대륙행이 결정되었다.

도미닉에게 모자란 수많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걸 돈으로 때울 수 있음을 알게 되면서였다.

마력이 없다면 마도 공학을 배우면 되는 것.

알비누스 상단을 서대륙에 진출시킨다는 명목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8년의 인고 끝에 그 세월을 보상받으러 귀환했을 때.

“제가 오래간 그려온 여성은 전하뿐이신데.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내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미안, 경. 내가 어제 발을 다쳐서 말이야.”

그리 대꾸하는 4황녀의 시선이 제가 아닌 다른 곳에 붙박여 있었다.

그게 어디인지, 그가 모를 수는 없었다.

그가 평생을 비교당해온 의동생이 자리한 곳.

녀석의 빨간 눈에 붙박여서 번들거리던 아버지의 눈동자를 본 이래로 그를 짓눌러온 열등감이 폭발하고 말았다.

“나를 부마로 만들어줄 미래의 피앙세께서는 참 너그러운 성정을 가지셨지. 너같이 더러운 핏줄 따위에게 눈길도 주시고 말이야.”

하지만 8년이라는 세월은 많은 걸 바꿀 만큼 긴 시간이었다.

제가 악마 새끼라고 윽박지르던 왜소한 아이가 번듯하게 자라나, 체구로도 능력으로도 저를 압도하여 더 이상 저를 참아주지 않을 만큼.

아버지와 거래한 대가를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으나 돌아온 건 배신이었다.

“그리고 오늘 네놈이 반의반 쪽짜리 악마의 자식한테 받은 수모는…. 평생 잊지 말길.”

그 그악스러운 능력으로 제게 행한 무시무시한 협박.

그 곁에서 제게 조소하던 4황녀.

예의조차 차리지 않고 오만한 낯으로 저를 비웃던 그 연약한 계집.

‘신성력도 없는 게 감히 나를 농락해? 모자란 년을 내가 다 이해하고 품어 주겠다는데. 게다가, 붙어먹어도 하필…!’

역시, 멍청한 계집들은 얼굴에 홀리고 마는 건가? 아니면 악마의 자식이 또 어떤 사특한 주술을 걸어서…?

그렇게 피해 의식과 열패감으로 똘똘 뭉친 몇 번의 낮밤이 지나고, 마침내 10월 정무 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

“아, 아버지.”

그간 제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도미닉이 해쓱한 낯으로 제 아비를 찾았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

“그 일, 제가 책임지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아니, 하게 해주십시오.”

알비누스 후작의 냉랭한 눈동자가 제 유일한 혈육을 훑었다.

4황녀와 만나서 무슨 변고가 있었는지, 그날의 일에 대해 입도 벙긋 못 하던 녀석이었다.

후작은 거기에 루시페우스가 개입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르니타에서 힐베르크의 딸을 납치하려던 일에 4황녀가 끼어들었던 것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도 도미닉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그저, 그 모든 게 제 아들이 모자란 탓이라 판단했다.

“…잘 생각했다.”

그 모든 한심함을 꾹꾹 누르며 후작이 짓씹듯 말했다.

제 양아들이 약속했던 미래는 황홀함 그 자체였다.

눈엣가시인 황실파를 혼란의 구덩이에 밀어 넣어 반수 이상을 멸절하고, 그 공로와 힐베르크령을 중심으로 흡수한 동북부의 거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귀족파의 실세가 되는 것.

‘힐베르크령이야 물 건너간 지 오래고, 게이블스 놈에게 발목 잡혀서 다 망하게 생겼으니, 이판사판이야.’

녀석의 힘을 더 이상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녀석이 다지고 간 것이 있어서 마지막 한 수도 둘 수 있는 거였다.

그 힘이 없어도.

그 잔학무도한 계획이 실현할 미래에 대한 설렘을 눌러 참듯 후작이 잎궐련을 비벼 껐다.

“네가 이때를 위해 그 먼 데서 오래간 버틴 것 아니겠느냐.”

“…….”

“부마가 다 무어냐. 귀족파의 수장이 되면 그만인 것을.”

“…예.”

양순하게 모아 쥔 도미닉의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 없는 절망으로 빛났다.

부마, 그게 못 될 바에야.

그 낯을 들여다보던 후작은 작게 손을 흔들어 아들을 물렸다. 그의 낯에 깃든 게 무언지 알 생각조차 없었다.

“…쯧, 모자란 것.”

언제나와 같은 타박이 등 뒤로 울렸다.

예상대로 정무 회의는 엉터리 대잔치였다.

아니, 상상 그 이상이었다.

배신자 악마 새끼까지 힘을 보탠 게이블스 집안싸움은 볼만했다. 하지만 그 불똥이 알비누스에 튀는 게 문제였고, 무엇보다….

“정말로 알비누스 후작이 알비누스의 혈통을 이을 자격이 없다면 온 귀족을 기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4황녀가 거기서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설마 모든 게 그녀의 판이었던가…?

그리고 제 신성력이 모자람을 만천하에 내보이며 다시금 제게 비웃음을 선사하기까지.

십여 년 전 아버지가 부마 자리를 입에 올린 이래로 도미닉은 그녀의 옆자리가 제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걸 얻지 못하게 될 줄은, 그것도 하필 그 녀석에게 뺏기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악마 새끼의 혈통이 천하니 남첩이나 되면 다행이겠지만….’

쾅!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또, 또 그 새끼한테 뺏긴 거지…!’

그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하게 된 원망을 곱씹으며 도미닉이 이를 빠드득 갈 때였다.

도미닉이 홀로 병째 위스키를 마시던 공간에 갑작스레 한 남자의 신형이 나타났다. 상단 건물 지하에서 이동 마법진을 통해 이어지는 공간은 모든 감시로부터 자유로웠다.

복면을 쓴 남자가 어눌한 목소리를 냈다.

“수도원, 신관, 아무도 모른다. 추측한다, 이동했다, 비밀스럽게.”

“대신전으로 갔겠지.”

알아보라고 시킨 지가 언젠데, 쯧.

‘…이제 상관없어. 그 새끼가 나도 몰랐던 혈통 문제를 어찌 알았건….’

얼마 전부터 마검사들이 비협조적으로 굴기 시작하면서 가동할 수 있는 인원이 줄어든 탓에 일의 진척이 더뎠던 거지만… 이젠 다 상관없었다.

‘프렘린의 개가 마도 기계를 갖고 떠난 게 열흘도 넘었으니, 곧 도착할 테고….’

마검사 녀석들도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 하고.

그러니까 얼마 뒤면, 모든 게 뒤집힐 거였다.

‘…부디 받아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만들어주지.’

도미닉의 검은 눈동자 너머로, 울먹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녹금빛 눈동자가 선연했다.

“어떡해, 어떻게 해….”

깊은 밤, 프리지어궁의 집무실.

긴급회의를 위해 세 소대장을 호출해 놓고서, 나는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해 계속 서성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빨간 눈의 마을 주민이 단체로 실종되다니….

루시페우스의 전생에 일어났던 일도 아니고, 근래의 일을 다 헤집어도 상황을 좀체 파악할 수 없었다.

그때, 루시페우스가 내게 훌쩍 다가왔다.

“…손톱 상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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