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86화 (186/220)

186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17)

“세실, 내 동생아!”

“오라버니, 잘 지내셨죠?”

“…이제는 이 오라비에게 달려와 안기지도 않고.”

테오도르가 행커치프를 꺼내 눈시울을 찍어내는 척했다. 내가 마음씨 넓은 나의 새언니, 글렌치아 공작에게 오늘도 내 오빠가 주책이라 미안하다는 의미로 미소 지어 보였을 때.

“그러게요. 전하께서 이리 빨리 정착하지 않으셨더라면 오늘도 당신께 달려와서 안기셨을 텐데.”

…내가 언제요?

새언니까지 왜 그래요?

“루시페우스 경이라고 했지? 내, 장갑이라도 던지고 싶은데, 그대가 마법사라니. 검사였다면 좀 대볼 법했을 것을.”

“대보기는 뭘 대봐요? 당신께서 옛날부터 아우렌바흐 소공작한테도 그런 소리를 했지만 가당키나 했어요?”

“그는 이제 어엿한 성기사 아니오.”

“안 어엿했어도 당신은 안 돼요. 장갑 대신 제 금화나 던지세요.”

글렌치아 공작이 자신의 부를 자랑하며 농담을 했지만, 나는 눈동자를 떨며 루시페우스의 낯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아, 아냐, 그런 사이였던 거, 응?

하지만 루시페우스는 그저 덤덤한 낯으로 그들에게 묵례할 뿐이었다.

‘아, 맞다.’

이 주접스러운 오빠 부부를 진정시킬 겸, 지나가던 시종에게 오늘 글렌치아 공작에게 소개할 사람을 불러오라 명했다.

“하아, 저는 전하께서 아수라마수라 사내들 다 휘어잡고 미혼으로 오래오래 지내시길 바랐는데요.”

“내, 내가 뭘 휘어잡아?”

“고귀한 여성은 그저 말만 섞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망상을 일으키니까요.”

글렌치아 공작이 내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결혼을 너무 빨리 했다고 아쉬워하는 거요?”

“뭐어, 누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남는 법이죠.”

“허, 그럼 나도 5년은 더 있다가 혼인할 걸 그랬소.”

“어머, 누구랑요? 저는 스물다섯 넘은 남자랑 결혼하고 싶진 않았는걸요.”

하, 하하…. 내 오빠 부부의 금슬 좋은 만담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하필 그게 루시페우스 앞이어서 민망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루시페우스에게 이런 화목한 가족이란 것이 낯설 것만 같아서….

내가 그의 낯을 살피며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꼬옥 줄 때였다.

“전하, 역시 맞았죠? 그때 종소리 들으셨던 거?”

…익숙한 종소리 타령이 들려와서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레오폴트가 와 있었다.

내가 시종에게 불러달라 청한 아멜리와 함께.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레오폴트의 말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아멜리를 맞이했다.

“어서 와, 레이디 아멜리.”

눈치 빠른 아멜리는 내가 테오도르 부부와 함께 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금세 예의 바른 낯을 지었다.

“공작. 여기는 힐베르크 소후작, 레이디 아멜리. 레이디 아멜리, 여기는 글렌치아 공작. 두 사람, 초면이지?”

“반가워요. 글렌치아의 레아나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힐베르크의 아멜리라고 합니다. 일전에 글렌치아의 무도회에 참석하기는 했었는데 인사는 처음 드리네요.”

글렌치아 공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아멜리를 훑었다. 오늘도 그녀의 감식안이 잘 작동했는지, 이내 그 낯에 흐뭇한 미소가 깃들었다.

“공작. 아까 레이디 아멜리가 정무 회의 때 증언하는 거 들었지? 로즈버리의 폐광 말인데.”

“아하.”

글렌치아 공작의 눈썹이 느릿하게 들썩였다.

“그럼요. 우리 글렌치아가 아직 부족해서 그런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영지엘 아직 못 가봤네요.”

“아, 아니에요! 로즈버리가, 그게….”

수정 광산업의 일인자인 글렌치아 공작이 겸손하게 하는 말에 아멜리가 펄쩍 뛰었다.

그러니까, 로즈버리의 수정 광맥을 개발하기 위해 글렌치아 상단을 소개해 주려는 거였다.

“원래 돈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게 상인의 덕목인데 저희 아버지 코가 꽤 무디셨어요. 허구한 날 노르타 산맥 위스키나 서대륙 화주(火酒)나 똑같다고 하셨으니까요.”

글렌치아 공작이 선황 대의 가주였던 제 아버지를 언급하며 너스레 떨었다.

“혹시 수확제 때 로즈버리 영주님께서 황성에 오실까요?”

“그, 글쎄요, 워낙에 멀어서….”

“아니지, 그런 큰 고객을 유치하려면 저희 글렌치아에서….”

내 의도를 알아차린 글렌치아 공작이 매우 저돌적으로 굴었다. 글렌치아 상단의 규모에 비하면 로즈버리의 광맥이 대단한 건 아니겠으나, 힐베르크와 아우렌바흐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생긴 아멜리에게 살갑게 구는 듯했다.

“우리 전하께서 친우도 다 소개해 주시고.”

…그게 아니었나.

“연인도 대동하시고. 제가 다 흐뭇하네요, 여보.”

…뭐? 갑자기 흐른 소리가 이상했다.

“아, 아니야!”

“뭐가요? 두 분, 친우 아니세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다시금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보며 눈동자를 떨 때였다.

갑작스레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보기 조옿습니다!”

소리만 들어도 술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은 고함이 가까이서 들렸다.

반사적인 위협감에 내가 루시페우스와 맞잡은 손을 꼭 쥐며 그편을 돌아보자….

“이 귀신 새끼가, 사람을 속여도 유분수지…!”

얼굴이 시뻘게지리만치 술에 취한 윌로우 놈이었다. 홉뜬 그의 눈동자는 루시페우스를 향해 있었다.

“뭐? 네놈의 의형이 부마가 되고 싶다느니, 뭐? 나를 그렇게 기만해놓고?”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내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둔 루시페우스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반 뼘은 큰 그가 다가서자 윌로우 놈은 고개를 볼품없게도 치켜올려야만 했다.

“그래! 그런데, 네놈이, 어? 네놈이…!”

윌로우 놈이 알아서 폭주해주길 바란 건 맞았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아무리 안하무인이라지만 연회에서 이렇게까지 취한 건 처음인데….

홧술을 퍼부었나? 아니면 아팠던 동안 주량이 줄었나?

나는 저 멀리에 있는 스칼렛을 살폈다. 스칼렛은 안 그래도 이게 내 계획의 일부인지 확인하고자 나와 눈을 마주치려 애쓰고 있었다.

얘 곧 자멸할 테니까, 처신 잘해서 가주들에게 눈도장 단단히 찍어놔.

그런 의미를 담아 내가 눈을 깜빡이자, 스칼렛이 고개를 까딱였다.

“네놈이 그렇게 나한테 감언이설을 속살거려 놓고, 어?”

“제가 소후작께 드린 말이 다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식식대는 윌로우와 달리 루시페우스의 말소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뭐 해! 지금 게이블스가 다 망하게 생겼는데!”

윌로우가 크게 팔을 휘둘러 루시페우스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루시페우스는 크게 뒷걸음질 쳐서 가뿐히도 빠져나갔다.

한편 사색이 되어 이편으로 뛰어오고 있는 게이블스 후작이 보였었다. 이 지경이 돼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했다.

안 망한 척하려고 여유 부리고 있었는데, 제 아들의 입으로 다 망하게 생긴 참인 거지.

“하하, 힐베르크라.”

루시페우스가 피하는 바람에 휘청한 윌로우는 다짜고짜 아멜리 쪽으로 다가갔다.

레오폴트가 재빨리 그를 막아섰다.

“힐베르크, 살려둬 준 걸 고마운 줄 알아야지.”

역시. 윌로우의 입에 물려둔 폭탄이 이렇게 터지는 거였다.

“지금이야 떵떵거리겠지만, 어? 신관이고 뭐고 다 협박해서 모조리 나락 보내겠다고… 그래! 알비누스가!”

다시금 놈의 고개가 루시페우스 쪽을 향했다.

“알비누스가 그랬지! 성녀만 없으면 귀족파가 황실파 누르는 건 시간문제라고! 그 가짜 사고면 다 된다고! 그런데 아니네? 그래서 황실의 개가 되려고 4황녀에게 빌붙나?”

루시페우스를 공격하겠다고 알비누스의 약점을 터뜨리는 건데… 녀석은 그게 게이블스의 약점이기도 한 것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래, 제기랄…. 네 녀석이 번번이 4황녀를 싸고돌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리 말하는 녀석의 고개가 다시금 휙, 돌아, 내게로 향했다.

“당신이 내 혼삿길을 막더니, 이제는 스칼렛 그년을 충동질해서…!”

그러면서 녀석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루시페우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딱, 울렸다.

“당신만 내 거였으면… 으억!”

괴상한 비명과 함께, 윌로우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루시페우스의 마법이 풀리며 운동 한 번 제대로 못 한 근육이 살찐 몸을 버티지 못한 거였다.

온 귀족 사회의 이목이 쏠린 곳에서 슬랩스틱. 놈다운 최후였다.

따라라, 따라, 따라라라라라.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후원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왈츠를 추듯, 루시페우스의 손을 꼭 쥔 채로.

윌로우 놈이 엎어지고 난 뒤. 스칼렛이 다가와 카리스마 있게 장내를 정리하고서 후작과 함께 퇴장했다.

정무 회의때 찍은 눈도장을 확인 사살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계획한 것이 모두 맞아떨어졌음에, 자축하는 마음으로 스파클링 와인을 한 잔이나 마신 차였다.

“그리 즐거우십니까.”

“응. 경은 아니야?”

“저야, 전하께서 즐거우시면 충분합니다.”

“그런 거 말고.”

언제나처럼 담백한 남자의 표현에, 나는 그와 손 맞잡은 팔을 쭉 펴며 뒤로 갔다가, 그 반동으로 팔을 굽히며 뱅글뱅글 돌아 그에게 안겼다.

“경이 경 스스로의 일로 즐거우면 좋겠어.”

“…글쎄요. 그들에게 복수했다고 말하면 그들이 제게 너무 큰 의미인 것 같아서.”

내가 너무 팔랑댔던 걸까? 루시페우스가 그대로 양팔을 감아 나를 포획하듯 안았다.

그에게 등 뒤로 안긴 채 나는 느릿느릿하게 프리지어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후원에 내리쬐는 달빛이 해밝았다.

마치 내 마음처럼.

오랜 과업이 다 끝나가는 거였다.

단 하루에 대부분의 일이 정리되자 조금 현실감은 떨어졌지만, 아직 자잘한 일들이 남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내가 살고, 서로를 믿어 마지않는 연인이 있고.

그래, 연인.

오늘 굳이 루시페우스와의 관계를 선보인 것은 윌로우를 자극하는 한편으로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잘 풀리기까지 해서….

“경이랑 함께하길 잘한 것 같아.”

“그렇습니까.”

벅찬 듯한 대꾸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짧은 입맞춤이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우리가 함께한 이후로 다 잘되고 있잖아.”

응. 앞으로도 잘될 거고.

거기까지 말한 나는 몸을 돌려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술에 취해서일까? 자꾸만 내뱉고 싶은 말들이 마음속에서 울컥거렸다.

지금은, 내가 느끼는 이 벅찬 행복을 말로 다 풀어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내 취기를 타박하듯 그의 모양 좋은 손가락이 톡톡, 내 볼을 쓸듯이 두드렸다.

하려던 말도 잊고 그저 좋아서,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려는데.

“전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요즘 그림자들은 대충 눈치껏 떨어져 다니는데, 누구지?

고개를 빼어 루시페우스의 등 뒤를 살폈더니, 멀리서부터 뛰어왔는지 한껏 달아오른 얼굴의 헨리에테가 와 있었다.

“무슨 일이야?”

헨리에테도 만찬연에 참석한 만큼 한껏 꾸민 차림이라 불편했을 텐데, 뭐가 그리 급했을까?

암조 기사들의 보고나 접견 신청이 헨리에테를 이뤄지는 만큼, 이런 날에도 헨리에테의 업무가 늦춰지는 법이 없기야 했는데….

“그게, 리나 경으로부터 전언이 도착했습니다만.”

“아, 드디어!”

오늘의 고양감 때문일까, 나는 평소보다 훨씬 기쁜 낯으로 헨리에테가 건네는 전보를 받아 들었다.

리나까지 별 탈 없다니, 오늘은 정말 완벽한 하루….

“전하?”

전보를 받아 든 순간. 거기 적힌 내용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전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길래….”

내 반응에 놀란 루시페우스가 마법을 써서 그 쪽지를 두둥실 떠오르게 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나로서는 단연코 상상하지 못했던 거였다.

조금 전까지의 고양감과 기분 좋은 취기가 싹 날아갔다.

「빨간 눈의 마을 주민 전체 실종. 납치된 것으로 의심. 추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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