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16)
‘이런 기쁨에 적응하면 안 되는데.’
레베카도, 세실리아의 뒷배인 황태자도 그들의 결합을 축복할 준비가 만만이었지만, 상황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루시페우스는 잃기 전에 체념하는 것이 더 익숙했고, 운 좋게 세실리아의 곁을 허락받기야 했으나 그 이상의 행운을 바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여 간신히 과욕을 부리지 않을 수 있는 거였지만.
그 과욕을 반의반이나마 살려, 세실리아의 등을 짚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보았다.
거기에 어떤 집착적인 소유욕이 깃든 줄도 모르고 세실리아는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어때, 다들 제대로 보고 있어? 그자도?”
“그 누가 저의 레이디 작은 별로부터 감히 시선을 뗄 수 있겠습니까.”
“아이, 그런 거 말고.”
“목적하신 바만 없었다면 정말 눈을 멀게 하고 싶으리만치 이글이글하게도 보고 있습니다.”
“좋아.”
그는 오래간 제 작은 빛이 누구에게나 다정한 이라고 생각했지만, 더없이 가까운 자리를 얻고 나니 더 많은 것이 보였다.
세실리아의 다정은 일종의 무관심이었고, 진짜 다정은 상대에 따라 그 깊이의 편차가 컸으며, 제게 보이는 것은 간혹 섬찟할 만큼 과하다는 것.
그리고 이따금, 그 다정만큼 제게 잔인하리만치 매정할 때도 있으시다는 것.
남들 앞에서 가까운 사이임을 과시하는 영광을 내리시면서, 한편으로는 윌로우 게이블스의 시야에 들어 그를 자극하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도리가 없었다.
세실리아가 그의 인생 그 자체인 바에야.
그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투정 같은 한마디였다. 맞잡은 손에 힘을 슬며시 쥐며 간신히 말했다.
세실리아가 스스로 깊은 상처를 냈던, 끝내 그가 돌보지 못한 그 상처가 났던 곳이었다.
“아까는 너무하셨습니다.”
“…미안.”
다만, 빠른 사과에 그 투정도 오래가지 못했을 뿐이지만.
“경이 걱정할 줄 알긴 했는데….”
“아셨는데, 필요하니까 하셨겠고요.”
“효과 확실했잖아?”
그리 말하며 세실리아가 눈을 치켜뜨며 애교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 은빛 속눈썹이 나풀거림에 그의 심장이 하릴없이 간질여지고 말았다.
애초에 그는 세실리아에게 어떤 투정을 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 있었다.
루시페우스는 대신 제 마음을 미욱한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하는 편을 택했다.
“오늘따라 정말 고혹적이십니다. 저의 레이디 작은 별께 다시 한번 반할 정도로요.”
그리 말하는 그의 눈빛이 경애로 빛났다.
“내가 그간 좀 애같이 하고 다녔지?”
“애는요….”
루시페우스가 앓듯이 읊조렸다. 그녀가 어떤 맥락에서 ‘애’라는 단어를 선택한 줄은 알았지만 그는 그걸 긍정하는 척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유일한 인간이고, 마음속 벗이며 여인인 세월이 얼마나 유구한데.
그의 눈동자가 슬며시 세실리아의 차림을 훑었다.
늘 채도가 낮은 파스텔톤의 부풀린 드레스만 입어 요정 같던 그녀가, 어깨와 등을 파고 몸매를 드러내는 진한 색의 드레스를 입자 밤의 군주가 되었다.
무엇이 되었건, 그가 경배할 대상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누구도 레이디 작은 별께서 지고하신 황실의 딸이심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낯간지러운 소리는 그만해.”
세실리아가 그의 가슴팍 근처에서 쿡쿡 웃었다. 제가 생각해도 세실리아가 좋아할 종류의 발언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그녀를 기쁘게 할 이야기를 꺼냈다.
“마검사들 말입니다. 우선 풀어준 이들은 확실히 협조하기로 했습니다만….”
그건 협조라기보다 무조건적인 추종에 가까웠지만, 타인의 전폭적인 지지가 어색하기만 한 그는 굳이 ‘협조’라는 표현을 고수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파벌이 갈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파벌?”
“소후작에게 개인적으로 고용된 자들과 아닌 자들, 돈을 벌기 위해 온 자들과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신비를 연구하러 온 자들…. 그렇게 말이지요.”
대번에 진지해진 낯빛으로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그래도, 소후작과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마검사가 있을지 알아보라고 지시해 두기는 했는데….”
“역시 레이디 작은 별께서는 현명하십니다.”
사뭇 진지해진 콧잔등에 입술을 내리누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그는 제 마음속에 피어난 열기의 반의반도 안 되는 대꾸를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저에게 협조하는 자들은 후자입니다.”
“개인적으로 고용된 게 아니고,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연구하러 온 이들이라는 거지?”
“예. 그들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관측하기 위해 화상 마도 기계를 갖다 놓았는데, 그걸 통해 제 상을 보고는 제 마력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군요.”
“아, 그렇게 알았다는 거야? 나는 그들이 구금돼 있으면서 외부랑 연락할 수 있었던 줄 알았어.”
루시페우스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다녀온 것은 그들이 수선화궁에 구금되고 한참 뒤의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후작이 그들과 수정을 어디서 숙성 중인지 공유했나 보네.”
“예. 이동 마법이 미숙한 건 사실이지만 한 사람이 하루 꼬박 움직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긴 하니까요.”
루시페우스는 다소 멋쩍은 낯을 지었다.
그들이 접근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것을 번복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으나….
“걱정 마. 경이 아니었으면 그런 사실도 알지 못했을 테니까.”
어쨌든 세실리아는 제게만은 한없이 다정하였다. 저는 실수라며 자책하던 것을 그녀가 가볍게 넘어감에, 루시페우스는 다시금 그녀의 곁을 간구했던 것이 제 두 생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쁨에 그의 낯이 온화함으로 빛나고, 세실리아의 등을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들의 거리가 더없이 가까워짐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 소문이 다 사실이었나 봐.
그러게. 아무리 왈츠라지만 저렇게 가깝게….
곧 국혼이 치러지려나?
그들이 여느 연인들처럼 서로 어깨와 등을 안고서 왈츠를 추는 걸 보고들 하는 말이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그저 손만 대충 맞잡은 채로 추는 춤이었으니까.
루시페우스가 이전 생에 단 한 번 아멜리와 춤을 췄을 때 그러했듯이.
“왜 첫 춤을 추지 않지? 로즈버리 영애와 함께 있던데.”
“…그게 궁금하십니까?”
“6월 자선 파티에서 첫 춤의 의미를 내가 모르지 않아.”
그러고 보면 알제니아의 자선 파티에서 세실리아가 제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걸 처음으로 알았었는데.
그때의 추억이 새삼 아련하여, 루시페우스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응?”
“제가 이전 생에 알제니아에서 그 레이디와 춤을 췄던 걸 전하께서도 아시겠지요.”
아, 그랬지. 세실리아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대꾸처럼 울렸다.
“그때 타인과 접촉할 수 있는지 실험할 겸 제 마력이며 신성력을 최대한으로 눌러 두었었습니다.”
“나랑 닿을 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죠.”
“그러다 내가 아파했으면 어쩌려고?”
“전하께서는 어린 저를, 그것도 감정 과잉에 폭주하던 저를 만지고도 괜찮지 않으셨습니까.”
…하긴 그랬지.
저를 놀리려던 그 잔인한 장난기를 거두고 세실리아는 또 곰곰이 생각에 잠긴 낯이 되었다.
“사실 그렇게 해도 다들 고통스러워하는 거였는데, 그 레이디에게선 별 내색이 없어서 신기하게 여겼던 겁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신성력과 그 레이디의 신성력이 닮았기 때문에 괜찮았던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럼 힐베르크 후작과도 괜찮으려나?”
“높은 확률로요. 하지만….”
루시페우스는 세실리아를 조금 더 제 쪽으로 당겼다. 숫제 포옹에 가까우리만치, 두 사람의 가슴이 거의 맞닿을 간격이 되었다.
“굉장히 번거로운 데다…. 굳이 확인해 봐야 할까요?”
도저한 다정함을 담아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며, 루시페우스는 세실리아의 머리 건너편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 너머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자에게 보내는 그 눈빛은 세실리아를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온도를 띠었다. 그의 입매엔 미미한 조소마저 깃들어 있었다.
쨍그랑!
와인잔 깨지는 소리가 났다.
“게이블스 소후작이 와인잔을 던졌습니다.”
내가 묻기도 전에, 루시페우스가 덥석 답을 안겨주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페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진심 한가득 섞인 연기였다.
아니, 그러면 연기가 아닌가?
그러니까, 윌로우 놈이 밑바닥을 보일 수 있도록 그를 살살 긁고자, 그 핑계로 루시페우스와 춤을 춘 거였다.
‘도미닉 놈하고 반목한 이유가 나 때문이었다니까 말이지.’
그런데 정말로 그게 먹혔는지, 그런 격한 반응이….
챙강!
“…이번에는 위스키 잔이군요.”
“사람 안 다쳤어?”
“다행히도요. 눈빛이 아주 무섭습니다.”
“경을 노려봐?”
루시페우스가 피식 웃었다. 무섭다는 건 숫제 엄살이었다.
어휴,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른 사람이 저랬으면 근위대가 끌고 나갈 감인데.’
오늘 아수라마수라 온 귀족의 이목이 쏠린 자리에서 더욱 큰 사고를 쳐주길 바라며 좀 더 내버려 둬야만 했다.
내게 언질 받은 황실 기사들이 까딱하면 체포할 기세로 감시 중이었고, 그게 누가 봐도 티가 나기에 참석객 모두가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윌로우 놈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뭐, 진상을 부려주면 나야 고맙지.
‘여차하면 루시페우스가 건 마법을 풀면 되고.’
안전장치야 많았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와의 왈츠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그러니까, 윌로우를 핑계 삼아 공식 석상에서 루시페우스와 당당하게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국 검법을 익힌 적 있나?”
춤곡이 끝나고, 내가 모두의 시선 속에서 루시페우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의 둘째 언니 로젤리아가 다짜고짜 루시페우스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루시페우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양 차분하게 대꾸했다.
“아카데미에서 교양으로 기초 초식을 익힌 게 다입니다.”
“따로 수련한 건 없고?”
“예….”
루시페우스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그게 마치 다른 이들처럼 어려서 검술을 익히지 못한 걸 씁쓸하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괜히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혹여 그런 게 아니라도 내가 민망해서 로젤리아를 제지하려고 할 때였다.
“언니, 그게….”
“…아쉽군.”
엥?
그러고 보니 로젤리아의 눈매가 좁아져 있었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기민하게 움직이며 루시페우스의 어깨너비나 팔 길이 같은 걸 살피고 있었다.
“수련하지 않았는데도 이리 체격이 좋다니. 분명 제대로 수련해 성기사가 됐다면 이름난 기사가 됐을 텐데….”
네?
기사라뇨?
루시페우스가 얼마나 강한 마법사인데?
“물론 그대가 마법을 쓴다고야 했지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남자는 자고로 기사가 진리라서 말이지.”
“네에? 어, 언니?”
나는 당황해서 눈동자만 떨었다.
루시페우스 또한 로젤리아의 말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가늠하려는 듯 눈매를 좁혔을 때.
로젤리아가 피식 웃으며 루시페우스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루시페우스 경이라고? 반갑네. 그대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형제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는 초면이라 농담 좀 해보았네.”
…역시 우리 고지식한 언니의 재미없는 농담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러셨군요. 제국을 수호하는 날개이신 성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로젤리아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루시페우스가 짧게 묵례했다. 아까 말한 것처럼, 그의 마력을 어떻게든 눌러 짧은 접촉을 시도한 듯했다.
“자네가 정말 성기사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없네.”
“송구스럽습니다.”
…그리고 내 형제들의 주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