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15)
“마, 마일스! 지금…!”
“저는 그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의 증언에 회의 참석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스칼렛의 옆에는, 베이커 남작과 비슷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아직도 마일스가 보좌관이니?”
“네, 찰리라고, 그 아들을 키우고 있기는 한데….”
그러니까, 저 남자가 찰리 베이커라는 거겠지.
렌틸 자작과의 회동 때 게이블스의 보좌관들에 관해 이야기하더라니, 어느새 그들마저 포섭한 모양이었다.
‘스칼렛의 수완도 수완이지만, 핵심 인력이 쉽게 돌아설 만큼 윌로우 놈이 가주가 된 미래를 다들 비관하는 거겠지.’
역시, 모든 건 섭리대로였다.
“게이블스 영애, 스칼렛. 그 말이 사실인가?”
“미욱한 재주로나마 제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스칼렛이 답하자 회의장이 다시금 웅성거렸다.
“감히 허풍을 아뢴 걸로 들릴까 싶어 첨언하자면, 에버렛령과 앤더슨령 등 저희 가문의 영지의 장부와 그 행정에 관한 서신 모두 제 필적으로 꾸려져 있다는 대신전 필적 감정 결과를 제출합니다.”
아버지가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서운했을 만한 준비였다. 게이블스 후작이 스칼렛을 박대하는 와중에도 귀찮은 일은 꼼꼼히 떠넘긴 덕분이었다.
발언을 마친 뒤 고고하게 자리에 앉는 스칼렛에게, 게이블스의 사업과 관련된 이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스칼렛도 눈도장 잘 찍었고.’
마지막으로 윌로우 놈이 커다란 실책만 저질러 주면 되는데, 이 자리에선 요원할 모양이었다.
뭐, 그렇더라도 오늘 그를 위해 준비해둔 함정이 더 있으니까.
“그래. 상황을 대강 알겠군.”
아버지가 회의장 한가운데의 시계를 흘끗하며 그리 읊조렸다.
논의가 길어진 탓에, 기타 안건 논의를 위해 준비된 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는 참이었다.
“그럼 우선, 지금 이 시간부로 게이블스 가주의 권한을 정지하고 그와 관련하여 언급된 가문들의 서고를 압수 수색할 것이며.”
게이블스 후작과 그를 둘러싼 귀족파 주류 가문들의 낯이 허옇게 질렸다. 저마다 보좌관들을 재촉하는 기색이었지만, 아버지가 이미 황실기사단에 지령을 내렸을 거였다.
“알비누스 후작가의 혈통 문제에 관해서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시선이 알비누스 후작에게 가닿았다.
“조만간 원로원 공판을 열어 심리하도록 하지.”
알비누스 후작의 낯이 잔뜩 굳었다.
그 곁의 도미닉 또한, 오늘 내내 본 중에 가장 딱딱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마치 무언가에 대한 결기가 어려 있다고 착각하리만치.
“세실리아 4황녀 전하 드십니다!”
정무 회의를 마친 뒤, 나는 드레스를 갈아입고서 본궁의 대연회장에서 열리는 만찬 연회에 참석했다.
오늘도, 막심의 에스코트를 받은 채.
내 입장에 평소보다 더욱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다. 아까 정무 회의에서 놀란 귀족들은,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새로이 확인하려는 듯했다.
“제가 전하를 에스코트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리도 시선이 쏟아지다니요….”
이것도 세 번째라고, 막심은 능숙하게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서 내게 말을 걸었다.
마지막이라.
‘그래, 아마 다음 연회는 수확제일 테니까….’
그때면 게이블스의 문제도 끝났을 테고, 알비누스 후작의 공판도 끝났을 테고.
루시페우스의 이전 생에 일어났던 모든 비극은 기미조차 없이 끝났을 테고.
‘그러면, 아마 루시페우스랑….’
생각만으로도 수줍어져, 나는 애써 시선을 굴려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예전 같았으면 레오폴트나 스칼렛 같은 얼굴을 찾았겠지만….
‘또 저런 곳에 서 있네.’
당연한 듯이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내 생각에서 떨어지지 않는 남자였다.
오늘도 연회의 화려함이란 남의 일인 양 벽에 붙어 서서 혼자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는 루시페우스.
다만 나를 쳐다보는 그의 낯에 어딘가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할 뿐이었다.
‘이제 아닌 척도 다 그만둘 때니까.’
정말로,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간 골치를 썩이던 모든 문제를 궤도에 올려 두었으니 알아서 순리대로 흘러갈 거였다.
나는 그 뿌듯한 마음을 애써 숨기지 않으며 황실 가족이 모여 있는 쪽으로 나아갔다.
막내 전하께서 역시 오늘 일에….
레이디 스칼렛과 교분이 있으시더니….
군부에 들어가신 게 심상치 않으시긴 했어….
내 미소를 해석하는 군중의 수군거림을 뒤로한 채.
“오늘도 짐과 골치 아픈 이야기를 나누느라 아수라마수라를 이끄는 그대들이 수고 많았네.”
내가 내 자리에 오르고, 장내가 적당히 정돈된 뒤.
“지끈지끈한 이야기는 다 잊어두고, 오늘 밤 즐기다 돌아가길 비네.”
“아수라마수라에 영원한 광영을!”
아버지의 짤막한 건배사와 함께 만찬 연회가 시작되었다.
정무 회의 만찬연은 황실과 모든 귀족이 다 함께 공무를 논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10월 정무 회의에 참석한 가문이 평소보다 많은 만큼, 그 식솔들이 함께 참석하는 만찬연 또한 여느 때보다 성대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아까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모든 인파를 뚫고 황실 쪽에 가장 먼저 다가온 이는 나의 외삼촌, 에슈바이크 공작이었다.
동남쪽에 자리한 에슈바이크령의 영주로, 동대륙과 남대륙으로 향하는 뱃길을 꽉 잡고 있어 황실의 외교와 통상에 큰 지원군이었다.
그런 내 외삼촌의 낯은 나에 대한 걱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조카딸이 신성력이 없어서 피나 줄줄 흘리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황실의 과보호 속성은, 친척에게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으니까.’
나는 1년 만에 만난 나의 외삼촌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요, 외삼촌. 나 스스로 해하지 않는 이상 내가 다칠 일은 절대 없는 것, 아시잖아요.”
“은사를 진 자의 칼끝은 늘 대륙의 적들을 향해야 하는데, 귀하신 몸을 향하니 놀랄 수밖에요.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설마 내가 칼을 들 일이 또 있으려고요? 내 기사들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데요.”
“하하, 그 유명한 기사들 아닙니까. 당연한 말씀입니다.”
내 태연한 대답에, 에슈바이크 공작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간 외삼촌마저 속여왔던 탓에, 그 또한 오늘 나의 강단 있는 모습을 보고 꽤나 즐거워하는 낯이었다.
에슈바이크 공작 외에도 평소 황실 연회에서 보기 힘든 지방 귀족들이 하나둘씩 인사를 올리고 갔다.
그들 모두 황성 사교계 인사들에게는 신선한 면면들이라, 이윽고 연회장 곳곳에 그들을 중심으로 무리가 형성되었다.
한편으로는, 아우렌바흐 공작과 힐베르크 후작을 중심으로 한 무리도 있었다. 두 아버지는 최근 아우렌바흐에서 힐베르크에 사병을 지원해준 일로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이걸 계기로 힐베르크가 본격적으로 황실파에 들어가겠고, 한편으로는 레오폴트랑 아멜리의 결혼설도 촉발되겠고.’
정말로, 남주와 여주의 꽉 찬 해피엔딩도 다가오고 있는 거였다.
‘공제눈’에 집착하지 않게 된 나라지만, 내 친구의 더없는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여전했으니까.
나는 흐뭇한 마음을 담아 연회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게이블스 후작 좀 봐. 어떻게든 건재한 척하려고….’
귀족파의 주류도 오늘 그 사달을 겪었으면서 애써 단합하듯 뭉쳐 있었다. 게이블스 후작은 무고한 체하기 위해서인지 부러 자신만만하게 굴었다.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윌로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망나니들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시며 낄낄대는 게, 아까의 정무 회의는 그에게 그저 무용담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스칼렛과 렌틸 자작을 위시한 귀족파의 새로운 부류가 형성돼 있었다. 스칼렛과 친한 영애들이 주축이 되어, 귀족파에 새로운 흐름이 생겼음을 시사했다.
그렇게 아수라마수라의 온 귀족이 모인 사교의 장.
알비누스 부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증거 인멸한다고 꽁지 빠져라 갔겠지만, 이미 늦었을 텐데.’
게이블스 후작이야 모든 음모를 방조하거나 협조한 정도의 혐의를 갖고 있었지만, 알비누스 후작은 그 음모를 직접 고안하고 실행한 이였다.
그 수족이었던 루시페우스의 증언이 결정적이었으니까.
‘그리고, 루시페우스는….’
그는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 기대선 채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율리안 겔프가 그 곁에 있는 것뿐.
‘루시페우스한테 친우라고 할 만한 건 저 겔프 영식뿐일 텐데. 그동안 이쪽 일한다고 못 만났겠지…?’
율리안 겔프가 어쩐지 들뜬 듯 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고 있는 걸 보면 더더욱 그래 보였다.
한편으로는 귀족파 망나니들이 루시페우스 쪽을 흘끗대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간 루시페우스가 저들 편인 줄 알 때는 두려워했으면서, 술에 취해서 겁을 다 상실했는지 아카데미 때처럼 구는 것이었다.
루시페우스와 친한 체하던 레이븐 백작 등의 신사들도 그들과 어울려서 루시페우스를 질시했다.
‘박쥐들이 따로 없다니까. 예전에는 루시페우스가 귀족파 일 맡겨준다고 살갑게 굴던 것들이.’
루시페우스야 그 모든 게 익숙한 듯 무시했지만….
그때, 적당한 분위기를 기다렸던 듯 악단이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 연회장 한가운데 공간을 만들자, 그 자리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가 첫 춤을 선보였다.
정식 무도회가 아닌 만큼 격식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기에, 참석객들 또한 둘씩 짝을 지어 춤을 추었다.
레오폴트와 아멜리도 빠지지 않았고.
그리고….
“전하.”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반색하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경.”
“괜찮으시다면, 제게 전하와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응.”
루시페우스의 검은 장갑 위로, 그에 맞춰 검은 레이스 장갑을 낀 내 손이 올랐다.
“기꺼이.”
갈색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에 생긋 웃는 내 낯이 비쳤다.
내가 그와 손을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근처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의 피날레였다.
“그날, 나한테 춤을 청해줘.”
“춤을요?”
“경이 나와 춤추면 꽤 재밌는 반응이 올 것 같은데…. 안 그래?”
“…다른 목적 때문이신 듯해 아쉽지만, 제게 전하와 춤출 수 있는 영광을 허하신다니 감격스럽기 그지없군요.”
루시페우스는 세실리아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조차 흘려들을 수 없는 그의 운명대로, 그 장난 같은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그녀의 제안이 노리는 바는 명백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제가 얻을 수 있는 기쁨은 더더욱 확실했다.
황궁의 대연회장 가운데서 세실리아와 마주 보고 서자, 루시페우스는 더없는 감격에 차올랐다.
제 손에 쥐인 가녀린 손, 제 손이 감히 짚고 있는 등의 맨살, 그리고 제 어깨를 꼭 감싼 작고 단단한 손의 감촉까지.
저들이 그리도 가까이 있는 것을 연회장의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전 생에도, 이번 생에도 그를 늘 천시하거나 경원시하던 이들의 시선이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이런 것도 하나의 복수일까.
어떻게 된 거야? 4황녀 전하께서 춤을 다 추시고?
그러게, 늘 폐하나 포발트 백작님과만 추지 않으셨어?
그런데, 저자는 아까 황실의 편에서 증언하기야 했다지만….
게다가 분명 알비누스 후작의 이복누이의 혼외자일 텐데….
아무리 4황녀 전하께서 ‘그런’ 이들도 중용하신다지만…?
세실리아의 수하들만큼이나 기감이 발달한 그에게 연회장 저 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라고 안 들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놀라움이 향한 곳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루시페우스는 목뒤가 쭈뼛해질 정도의 기쁨을 느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제 작은 빛의, 제 어린 날의 온기의 곁을 차지한 게 바로 그 자신임을 모두의 눈에 아로새길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