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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83화 (183/220)

183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14)

힐베르크 후작을 두고서 혈육 운운하는 건 전혀 이치에 닿지 않았으니까.

한데 힐베르크 후작은 그저 고요한 낯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후작도 신관은 신관이었으니 눈치채고 있었던 걸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회의장의 앞쪽에 집중했을 때. 루시페우스가 덤덤한 낯으로 발언을 이었다.

“실은 제가 최근 대신전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신전이라는 말에, 알비누스 후작의 낯이 다시금 굳었다. 킬리온이 떠오른 게 분명했다.

그 낯에 떠오른 당황스러운 기색이 깊지 않은 것으로 보아, 킬리온이 미쳐서 수도원으로 들어간 걸 아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만난 것도 모르는 듯하고.’

킬리온과 그리도 많은 비밀을 공유해놓고, 그가 미쳤다는 것 하나로 그리 안심하다니.

‘…도대체 그간 빨간 눈을 갖고서 얼마나 협박했길래?”

빨간 눈이라는 것을 빌미로 킬리온을 협박하여 내 비밀도 갖다 바치게 하고, 성녀에게 시한폭탄으로 추정되는 걸 건네라고 했으니 말이다.

설마 그것 말고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상념에 빠져들 무렵이었다.

특별 참관석에 자리해 있던 레베카가 손을 들었다.

오늘의 레베카는 대신전의 고위직 신관 레베카 자매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참이었다.

“그 일을, 제가 대신전을 대표하여 직접 제보하고자 합니다.”

대신전이 가문 내부 문제에 끼어든다면 연유는 단 하나였다.

혈통 문제.

세례를 통해 귀족가의 계보를 관리하고, 신성력을 활용해 혈통을 확인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으니까.

“알비누스 후작과 형제라고 주장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제가 두 신의 종으로서 그와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경의 신성력이 무관함을 확인하였습니다.”

알비누스 후작의 낯이 험악하게 굳었다.

그 반응만으로도 긍정이었다. 충격에 빠진 장내가 황제 앞이라는 것도 잊고 마구잡이로 떠드는 소리에 휩싸였을 때.

사람들의 말소리가 최대한 높아지기를 기다리다가… 나는 적절한 타이밍에 맞추어 손을 들어 올렸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4황녀 전하께서 무슨 발언이라도 하시려고?

이 상황이 뭔지 아시고…?

지금껏 내가 정무 회의에 참석해도 늘 조용히 앉아만 있다 간 탓에, 오래간 고수해온 어리숙한 이미지가 썩 잘 먹혔다는 방증이었다.

내 손끝부터 얼굴까지, 수백 개의 눈동자가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메르제 후작, 세실리아 에슈바이크 알 아마리우스. 고하라.”

아버지의 주문에, 나는 생긋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군 전략실에 혈연을 확인할 수 있는 마도구 몇 가지를 보관 중이어서, 향후 재판에 쓰일 경우를 대비해 제보하고자 합니다.”

내 발언에 장내가 급격히 고요해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우선, 혈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내가 마도구를 제보한다니 판이 퍽 정교함을 모두가 눈치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내 목소리가 지금껏 귀족들이 듣던 것과는 한참 달랐으니까.

‘순진하신 막내 황녀님은 이제 안녕이다, 이거야.’

지금까지 나는 유약한 인상을 강조하기 위해 매가리 없는 목소리를 내곤 했었다.

지금은 진짜 내 목소리에, 스무 해 넘도록 가다듬은 황실의 위엄까지 곁들였고.

나는 모두의 시선을 의연하게 받아내며 단상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더 이상 관객은 아니지만… 아무튼 괜찮아.’

여전히 떨리기야 떨렸지만, 예전처럼 관객의 자세를 되뇔 필요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던 ‘공제눈’이라는 연극은 사실 엉터리였고, 나의 모든 행동에는 그 연극의 엑스트라가 아닌 ‘내’ 의지가 담겨 있으니까.

내가 관객이라며 관망할 필요는, 더 이상 없는 거였으니까.

그 모든 다짐을 되새기며 황제와 황태자가 자리한 단상 바로 앞에 선 나는, 입꼬리를 생긋 들어 올렸다.

내 갑작스러운 참전에 놀란 아버지가 물었다.

“재판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알비누스 후작가가 근래 아수라마수라 귀족 사회의 많은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친바. 정말로 알비누스 후작이 알비누스의 혈통을 이을 자격이 없다면 온 귀족을 기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후작의 혈통에 관해 심리하셔야지요.”

회의장이 살얼음 낀 듯 얼어붙었다. 보지 않아도 알비누스 후작 부자의 낯이 사색이 됐을 게 선명했다.

그에 내가 코웃음 치며 손짓하자, 나를 따라 나온 헨리에테가 비단 필로우를 내게 건넸다.

그 위에는 아멜리에게서 빌린 인연 팔찌와 루시페우스가 준 동대륙 샤먼의 나침반이 올려져 있었다.

필로우째 아버지와 그레이스가 자리한 단상 위에 올리며 나는 발언을 이었다.

“하나는 친자 인지에 관한 귀족법이 개정되기 전에 사용되었던 3세기의 인연 팔찌. 또 하나는 동대륙의 샤먼들이 쓰는 혈연 추적 마도구입니다.”

내 말에 좌중의 수군거림이 높아졌다.

동대륙의 마도구라고?

그런 걸 믿을 만한가?

그런 게 군부의 전략실에 있다고?

도대체 전략실이 뭐 하는 데길래?

그냥 막내 황녀님 관료 놀이하시는 곳 아니었어?

그리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다시 내게로 향했다. 거기에 실린 감정은 대체로 의구심이었다.

‘뭐, 이쯤은 나도 각오한 일이고.’

그간 경계심을 안 사겠답시고 살살 피해 다녔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냉소하며 헨리에테에게 손을 내밀자, 단검 하나가 손에 쥐였다.

그걸 바라보는 귀족들의 낯이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막내 전하께서, 저렇게도 웃으셨어?

아니, 저 칼을 갖고 뭘 하시려고?

저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드높아졌다.

“동대륙의 샤먼이 제작한 마도구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그들의 웅성거림을 무시하며 빈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동작 하나하나에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짐작했을 것이기에.

“이전 생에는 제 절망만을 가리켰는데, 이번 생에는 전하의 의지에 쓰이니 정말 값지기 그지없습니다.”

며칠 전, 나침반 마도구를 내게 빌려주면서 더없이 감격스럽다고 말하던 그였다.

루시페우스가 그걸로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에리나 경의 시신이 묻힌 곳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균열 속에 흡수되었다는 것, 그리고 알비누스 후작과 자신이 피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으니까.

이번에는 내 일을 위해 쓰인다니 뿌듯하다는 것이었지만….

“제 몸 다치는 일에 너무도 무심한 아이라서 말이지. 지켜보는 사람 마음도 좀 헤아려 주면 좋을 텐데….”

“…모르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안전에 무신경하게 구는 걸 괴로워하는 그는 지금도 내가 하려는 일을 눈빛으로나마 한껏 반대하고 있었다.

‘루시페우스, 미안.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는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나는 루시페우스의 근처도 보지 않은 채 그대로 내 손바닥을 크게 그었다.

모두의 낯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세실…!”

언니들과 아버지도 화들짝 놀랐다.

루시페우스는 이런 자리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달려올 기세였다.

‘윽….’

나로서는, 너무 아팠다.

황실의 과보호 덕에 칼에 베일 일은 세실 평생 단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생각보다 너무 아파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침착하게 아버지 앞에 올려두었던 나침반을 집어 사람들을 향해 보였다.

“여기, 이 홈에 피를 흘려 넣으면.”

나는 회의장에 자리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손을 꾹 쥐어 후두둑, 피를 나침반 위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레베카의 초커를 짚어 나침반에 신성력을 발동시키자….

“아니, 그건?”

“8분의 1만 일치해도 이렇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더군요.”

나침반에서 터져 나온 빛줄기는 아버지와 세 언니, 그리고 내 외삼촌인 에슈바이크 공작, 할머니인 선황후를 통해 혈연을 공유하는 몇몇 귀족들에게로 이어졌다.

본디 바늘만으로 혈육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던 것을 오늘을 위해 루시페우스가 개조한 거였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귀족들은 머릿속으로 황실의 계보를 그리느라 여념이 없는 낯이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아니, 근데.

저기, 피가….

빛줄기를 한참 동안 구경하던 이들 중 몇몇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가 아래로 늘어뜨린 손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일부러 연한 색으로 골라 입은 진줏빛 드레스 자락 위에 혈흔이 더없이 선명했다.

‘황실의 신성력이라면 지혈쯤은 손쉬운 일이겠지만.’

나는 일부러 레베카의 초커를 쓰지 않고서 그대로 놔두었다. 황실의 비밀 하나가 만천하에 알려지도록.

그리고 탁, 나침반을 닫아 아버지에게로 반납한 뒤.

“이상입니다.”

그리 말하며 나는 알비누스 후작 부자가 앉은 쪽을 일별하였다. 두 사내의 낯이 당황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남들에게야 내가 이 마도구를 제보함으로써 그들의 혈통 문제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지로 보였겠지만….

‘봤지? 내가 신성력이 없는 것쯤은 내 약점도 못 돼.’

그런 의미를 담아 나는 도미닉에게 비웃음 가득한 낯을 보였다.

이와 관련된 어떤 단어도 빚지 못하는 그의 입매가 빳빳이 굳어 있었다. 패배감에 빠진 낯은 천치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알비누스 후작 또한, 제가 도미닉을 부마로 넣네 마네 하던 게 애초에 망상에 불과했음을 이제라도 알았을 거였다.

나는 헨리에테로부터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손을 꼭 눌러 지혈하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는 내내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뜨거웠다. 나에 대한 걱정과, 그 걱정을 내색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 부글대는 듯했다.

이어지는 공방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아버지가 렌틸 자작이 제출한 문건에 적힌 것들에 관해 게이블스 후작에게 물었고, 그에 대해 후작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풍경이 반복되었다.

모르쇠로 일관하려던 작전은 압도적인 증거와 증언 덕에 무용해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그대의 후계자도 가담한 것인가?”

“아, 아닙니다! 윌로우, 제 아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른다라…. 그대의 아들이 아마 스물일곱이지. 내 딸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 다섯 살이나 많다던 기억이었는데.”

아버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의미심장한 눈빛에, 게이블스 후작은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일 거였다.

아버지의 유도신문에 제 모자란 아들을 감싸려던 게 딱 걸리고 말았으니까.

‘가주직을 박탈당하게 생겼으니 윌로우를 연루시키면 안 되는 거지만, 윌로우가 그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는 것 또한 가주로서 부족한 건 마찬가지니까.’

나는 한 편의 촌극을 보듯 즐거운 마음으로 게이블스 부자의 헛발질을 감상했다.

“그러면, 게이블스의 살림은 소후작이 관리했나? 후작 부인이 작고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공이 직접 관리하기엔 번거로웠을 테고.”

“그건….”

“제가 대신 대답해도 괜찮겠습니까?”

게이블스 후작이 우물쭈물할 때, 그 곁에 앉아 있던 신사가 조심스레 발언권을 청했다.

‘저자는 후작의 보좌관인….’

고동색 머리칼을 2대 8의 비율로 넘긴 아래로 뿔테 안경을 낀 중년의 남성이었다.

보좌관의 지원 사격이 기꺼운지, 게이블스 후작은 고개를 엄청난 속도로 끄덕여댔다.

“저는 게이블스 후작가의 가신인 베이커 남작, 마일스입니다. 제국력 478년에 후작 부인께서 작고하신 이래로 4년간은 제가 저택 살림을 맡았으며….”

게이블스 후작의 낯에 의문이 들어찼다. 아마 윌로우가 어려서부터 잘한 것처럼 꾸며서 말하길 바랐을 테니까.

“제국력 482년에 게이블스 영애이신 레이디 스칼렛께서 열네 살의 나이로 저택 내부 관리를 떠안으셨습니다. 지금 후작가 안살림은 모두 영애님께서 도맡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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