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애써 믿는 마음으로 (13)
“네… 편?”
“저를 낫게 해준 것도 저 영식이지 않습니까. 그간 제게 많은 조언도 해줬고요.”
그리 말하는 윌로우 놈의 낯에 깃든 건 명백한 반가움, 그리고 뿌듯함이었다.
‘궁지에 몰렸다가 제 편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니 신났나 봐.’
누가 봐도 루시페우스는 렌틸 자작을 위해 증언하려고 등장했는데 말이다.
모두가 그런 분위기를 읽었는지 수군대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난번 원로원 의회 때 딱 이런 반응이었겠구나?’
그나마 게이블스 후작은 상황을 정확히 인지했는지 놈의 헛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따금 알비누스 후작 쪽을 흘끗거리면서.
알비누스 후작은, 목울대까지 시뻘게져 있었다. 바로 곁의 도미닉은 눈동자를 벌벌 떨기 시작했다.
후작이 꽤나 당황한 것을 보니, 루시페우스의 금언 마법 덕분에 도미닉은 나와 루시페우스가 같은 편임을 후작에게 알리지 못한 듯했다.
‘…시작 좋고.’
내가 꾸민 무대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 나는 루시페우스를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편으로, 루시페우스를 아는 이들이 일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저 영식, 알비누스의 양아들 아니야?
알비누스 후작의 호위처럼 굴던 그 청년이지?
요 얼마간 감쪽같이 사라졌더라니, 설마 알비누스를 배신한 건가?
귀족파의 온갖 뒷일을 다 도맡아 하던 자 아니었소? 회개라도 한 거야, 뭐야?
‘…반응 좀 봐.’
저기요, 다 들리거든?
사람들이 무작위로 쏟아내는 말에 배려심이라곤 한 톨도 없어서 나는 언짢아지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루시페우스를 ‘공제눈’ 속 인물로만 볼 때의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아, 가슴이 욱죄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가르고 루시페우스가 마침내 증언대에 올라섰을 때.
그제야 좌중이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렇게 수군거린 게 쪽팔린 줄은 아나?’
나는 마음속으로 속도 없이 지껄였던 인사들을 원망하며 루시페우스의 낯을 살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무감해 보였지만, 정말로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걱정 가득한 마음을 눌러 내리며 우선 이어지는 공방을 지켜보기로 했다.
“저는 알비누스의 선대 후작, 마르쿠스 알비누스의 손자인 루시페우스 알비누스입니다. 법적으로는 그레고르 알비누스의 양자로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소개가 자못 장황하였다.
본 적조차 없는 선대 후작을 언급하고, 현 후작과의 관계는 그저 호적상의 문제라는 듯 언급하는 말에….
자기소개가 뭐 저래?
누가 들으면 후작이랑 아주 남인 줄 알겠어?
혹시, 알비누스에 혈통 문제가 있나…?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알비누스 후작 부자에게 향했다.
애써 아닌 척했으나 후작의 검은 눈동자가 군불과도 같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역시 눈치들은 빨라서.’
나는 저 구경꾼들에 대해 가졌던 괘씸함을 조금 덜어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잠시 뒤 렌틸 자작이 질문을 이었다. 사람들이 루시페우스의 말에 담긴 속뜻을 다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준 다음이었다.
“경은 알비누스 후작의 양자로 그를 도와 귀족파의 일들을 직접 수행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 임무에, 게이블스와 함께한 건도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9년 전 힐베르크 당대 후작 부부의 사고를 사주한 이후로 두 가주는 줄곧 뜻을 같이하고 있으니까요.”
담담한 답변에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로즈버리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힐베르크 이야기가 나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게 성녀 시해 사주 건을 기정사실로 단정하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했는지 윌로우 놈의 낯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후작의 그림자로서 여러 일을 수행한 경은 후작이 힐베르크의 비극에 가담했음을 인지하고 있었단 소리군요.”
“예. 두 후작이 금약을 위해 만든 협약서를 제가 보았습니다.”
“저, 허풍도…!”
참다못했는지 게이블스 후작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레고르 알비누스! 가문 사람 하나 단속하지 못해서 지금 웬 물귀신 작전이오!”
“게이블스 후작!”
게이블스 후작이 상황도 잊고 고함을 치자 사회자인 재상, 로젠하르트 백작이 일갈했다.
“공께서는 현재 범죄 관계자로 지목돼 있소. 발언할 것이 있다면 발언을 신청하면 될 일이오.”
“할 말 없소! 모든 게 사실무근이외다! 나, 로버트 게이블스는 무고하오!”
게이블스 후작은 그리 바락거리더니 자리에 털썩 앉아서는 팔짱을 꼈다.
방관자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제 누이가 말도 안 되는 공세를 이어간다고 시위하려는 듯했다.
그것이 기실 지난 원로원 의회 이후로 후작이 취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뭐라도 대응하면 결론이 나는 건 순식간이니까. 최대한 반응을 안 하면서 그사이에 증거를 인멸하려는 건데.’
문제는, 오늘 렌틸 자작이 이리도 큰 폭탄을 터뜨릴 줄은 몰랐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의 발악과도 같은 반응을 본 모두가 협약서의 존재를 믿게 됐을 거였다. 장내의 많은 이들이 힐베르크 후작의 낯을 흘끗거렸다.
‘고마워라.’
나는 속으로 조소하며 다음 풍경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그 협약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황제, 나의 아버지가 물었다. 장내를 향해 있던 루시페우스가 몸을 돌려 아버지에게 묵례한 뒤 대답했다.
“지고하신 대륙의 태양을 뵙습니다. 제가 그레고르 알비누스 부자와 절연한 이래로 후작저에 돌아가지 않아 확답드리긴 어렵습니다만, 집무실 책상 아래서 이어지는 비밀 서고 또는 상단 사무실의 이중 책장을 수색하시면 자료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낯은 황제에 대한 공손함으로 빛날 뿐이었다.
반면, 알비누스 후작 부자는….
‘아닌 척하느라 애쓰는군.’
후작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낯을 굳히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게 다 보였다. 도미닉은 아까부터 식은땀을 뻘뻘 흘릴 뿐이었다.
“그레고르 알비누스는 후작 부부의 사고를 사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힐베르크령을 흡수하기 위해 대천사의 성상을 확보하려고도 했습니다.”
“그 성상은 얼마 전에.”
“예. 안타깝게도 제가 지령을 수행하지 못해 힐베르크 후작이 모든 권리를 되찾는 데 쓰였습니다.”
“알비누스 후작이 왜 힐베르크령을 복속시키려 했는지 아는가?”
봉토의 이양에 관한 문제는 황실에도 중요한 사안인지라, 아버지의 눈빛이 사뭇 날카로워졌다.
“힐베르크령 근방의 영지가 대부분 파산 직전 상태에 있습니다.”
“그럼, 그 영지들을 모두 통합한다면….”
아버지의 청금안이 슬며시 알비누스 후작을 스쳤다. 루시페우스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원로원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임을 알아차린 거였다.
“저는 해당 영지의 가주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쓰일 자금을 조달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금은 대부분….”
거기까지 말한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슬며시 아멜리를 스쳤다. 거기에 깃든 건 명백한 미안함의 감정이었다.
“로즈버리령을 비롯해, 지난봄 그렉 랜들 연쇄 사기 사건의 피해자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멜리 언니의 약혼자 행세로 로즈버리 남작에게서 사업 투자금을 뜯어내고, 급기야는 아멜리에게 마수를 뻗치려다가 레오폴트에게 당한 바로 그 녀석 말이다.
충격적인 소식에 장내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당시 사교계의 눈엣가시였던 아멜리가 직접 사기꾼을 잡겠다고 뛰어들어 화제였던지라 다들 그 사건을 기억했다.
렌틸 자작이 말을 받았다.
“첨언하자면 해당 가문들은 아까 아멜리 힐베르크 양이 증언했던, 로즈버리 선대 남작에게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가문들이기도 합니다. 제가 제출한 서면 자료에 따르면 그 자금은 모두 당시 게이블스 소후작이 주도하던 원로원의 토건 사업에 쓰였지요.”
당시 게이블스 소후작, 그러니까 지금의 게이블스 후작이었다.
아버지의 손짓에, 원로원 의장이 해당 페이지를 찾아 아버지에게 올렸다.
자료를 읽는 아버지의 미간에 주름이 짙어졌다.
“…그래. 그래서 힐베르크 후작의 영애를 납치하려고까지 했다라.”
“폐하!”
그때, 알비누스 후작이 이를 빠드득 갈며 일어났다.
태도가 불손할 뿐 나름 발언권을 청하며 일어난지라 재상도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협잡꾼의 진술입니다!”
그리 말하는 알비누스 후작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하지만 루시페우스의 증언은 모두 렌틸 자작이 제출한 증거에 부합했다.
게다가 루시페우스는 후작에게 혈통의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후작이 루시페우스를 아들 취급하지 않는다는 걸 많은 귀족이 알고 있었다.
나는 저자가 양자인 걸 오늘 처음 알았소.
보좌관이나 호위 기사인 줄 알았지.
남들에게 소개도 안 하지 않았어?
알비누스 후작의 음모에 가담한 이가 아니라면 모두 루시페우스와 후작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그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루시페우스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직접 후작의 입을 열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말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정신계 마법을 암시하는 거였다.
“그러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장내에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사람은 귀족파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걸로도 그들이 겁먹었을 테니까.
‘허튼수작 부려봐야 소용없다는 거지.’
아, 든든해라. 나는 흐뭇한 마음 반 그에 대한 애정 반으로 루시페우스를 바라보았다.
‘오늘 일만 끝나면, 이제 마음 놓고 함께 다닐 수 있을 거야. 루시페우스도 마음고생이 많았으니까, 당분간은 편하게만 지내야지.’
오늘 일만 끝나면….
모든 건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부터 만찬연 때까지,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 어떻게 판을 흔들지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그리고 그 외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을 때쯤, 루시페우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렌틸 자작이 고발한 게이블스 후작의 악행 중 알비누스와 연관된 것은… 예. 모두 제가 개입한 것이 맞습니다.”
아버지를 바라본 채 서서 눈을 살포시 내리깐 채, 루시페우스는 자백을 이어갔다.
“베라초를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에 잠식시킨 건. 사냥 대회에 풀린 마수를 세뇌한 건. 힐베르크 영애 아멜리 양에 대한 납치 사주 건. 선황께서 로즈버리령을 위해 비밀로 해두셨던 폐광 폭파에 인부를 파견한 건 말입니다.”
“한데, 마수를 세뇌했다 함은….”
“예. 제가 마법을 쓸 줄 압니다. 비록 마탑에서 수학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사실을 몰랐던 이들은 하나같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레오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르니타 별채에서의 일을 게이블스, 세르니타, 오겐, 앙블렌, 프렘린의 협력자들이 몰랐던 것은 제가 그들에게 정신계 마법을 걸어 자리를 피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걸 털어놓은 루시페우스의 낯은 매우 담담해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 리가 없었다.
그가 겨누는 칼끝은 지난 생의 말미에서부터 벼려진 것이었고, 거기에 깃든 분노는 내가 감히 이해한다 말할 수도 없는 종류일 거였다.
그가 누렸어야 할 것을 앗아가 놓고, 적반하장으로 그를 학대했던 후작 부자….
‘남들은 그 슬픔을 짐작도 못 하겠지.’
내 생각을 읽은 듯, 귀족파들의 자리 곳곳에서 원성이 쏟아졌다.
어찌 양부이자 숙부를 배신하오? 돈에라도 팔렸소?
영식은 키워준 은혜도 모르오?
혈육의 정 같은 건 없소?
혈육의 정이라…. 루시페우스의 콧가에 짧은 웃음이 스쳤다.
“혈육의 정 때문에, 이렇게 증언할 결심도 한 겁니다.”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시선은 원로원 의원들이 자리한 쪽의 한가운데쯤을 스쳤다.
그러니까, 힐베르크 후작의 자리였다.
내내 알비누스 후작을 이름으로 부르던 그가 혈육 운운하며 힐베르크 후작을 바라보자, 장내가 다시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